광해군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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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해군에 대한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1. 광해군에 대한 재해석
2. 광해군, 그는 누구인가
3. 왕세자가 된 광해군

Ⅱ. 본론
1. 임진왜란의 히딩크, 광해군
2. 즉위와 새로운 시대
3. 왕권 강화의 집착과 광해군의 오류
4. 새로운 사상과 실각

Ⅲ. 결론

본문내용

청하자 미온적으로 대응했다. 현대에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탁월한 외교술로 칭찬받지만 성리학적 입장에서는 왜란 때 우리를 도와준 ‘은혜’를 갚지 않는 것은 큰 불충이라고 여겼다. 사림파들은 사대적이고 보수적이며 중화주의가 강했기 때문에 당시 광해군과는 코드가 맞지 않았을 것이다. 또 앞서 언급한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폐모 등도 성리학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당시 사회 분위기를 보았을 때 인조반정, 즉 광해군은 실각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들은 명분에 투철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기득권 세력이 아닌 주변인으로 밖에 활동할 수 없었고, 본인들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리학적 명분과 의리에 목숨을 거는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반정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적인 뒷받침과 확고한 명분 등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래로부터 백성들의 지지 내지는 묵인이 있었다. 혁명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소리 없는 민중들의 지지인데, 백성에게까지 광해군의 폐모살제는 폐륜으로 비췄기 때문이다. 또 잦은 토목공사로 인해 수많은 민가가 헐리고 막대한 비용이 드는 탓에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진 이유도 있었다.
Ⅲ. 결론
광해군은 폐위 된 이후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다 결국 1641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눈을 감았다. 광해군의 몰락은 당시 새롭게 자리 잡던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그 사상이 얼마나 뿌리내리는지 가늠하지 못한 이유가 크다. 현대 국회의원과도 같은 사대부들이 신봉하는 일반의 정서를 무시하고 그들을 포용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은 그의 엄청난 실수이다. 그로인해 많은 사대부들이 등을 돌렸고 결국 그는 실각할 수밖에 없었다.
또 붕당정치의 흐름 속에서 붕당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이끄는 리더의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한 것도 그의 큰 실수이다. 때문에 훌륭한 외교를 펼치면서도 결국 내조가 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광해군이 내정에서 좀 더 정치력을 발휘하여 신료들을 조정했더라면 아마도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참고문헌
1. 한명기(2002), 광해군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역사비평사
2. 김민경(2004), 조선 광해군대의 정치적 대립, 인제대교육대학원, 석사
3. 박시용(2003), 광해군대의 정국동향과 내정개혁정책의 추진에 대하여, 경남대교육대학원,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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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2.24
  • 저작시기20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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