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무력을 앞세운 수탈구조의 구축
A) 특강 요약
B-1) 일제 무단통치의 확립
B-2) 식민지 수탈구조의 구축
2. 3․ 1운동
B-1) 1910년대 국내의 민족운동
B-2) 1910년대 해외의 민족운동
A-1) 3․ 1운동 발발의 배경
B-3) 3․ 1운동 발발의 배경 (추가)
A-2) 3․ 1운동의 전개과정
B-4) 3․ 1운동의 전개과정 (추가)
A-3) 일제의 탄압과 운동의 퇴조
A-4) 노령ㆍ간도지역에서의 3ㆍ1운동
A-5) 3ㆍ1운동의 역사적 의의
b-5) 3ㆍ1운동의 역사적 의의 (한계)
3. 임시정부의 성립과 초기 활동
A-1) 임시정부의 성립
A-2) 임시정부의 초기 활동과 내분
B-1) 상해시기(1919~1932)의 임시정부
4. 만주ㆍ연해주에서의 독립전쟁
A)특강요약
B-1) 독립군의 편성
B-2) 독립군의 항전
※ 참고자료
A) 특강 요약
B-1) 일제 무단통치의 확립
B-2) 식민지 수탈구조의 구축
2. 3․ 1운동
B-1) 1910년대 국내의 민족운동
B-2) 1910년대 해외의 민족운동
A-1) 3․ 1운동 발발의 배경
B-3) 3․ 1운동 발발의 배경 (추가)
A-2) 3․ 1운동의 전개과정
B-4) 3․ 1운동의 전개과정 (추가)
A-3) 일제의 탄압과 운동의 퇴조
A-4) 노령ㆍ간도지역에서의 3ㆍ1운동
A-5) 3ㆍ1운동의 역사적 의의
b-5) 3ㆍ1운동의 역사적 의의 (한계)
3. 임시정부의 성립과 초기 활동
A-1) 임시정부의 성립
A-2) 임시정부의 초기 활동과 내분
B-1) 상해시기(1919~1932)의 임시정부
4. 만주ㆍ연해주에서의 독립전쟁
A)특강요약
B-1) 독립군의 편성
B-2) 독립군의 항전
※ 참고자료
본문내용
편성된 항일 단체 및 독립군단 가운데 중요한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大韓國民軍
대한국민군은 대한국민회 산하에 편성된 독립군단이다. 대한국민회는 북간도 지방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각 지방 대표가 처음 ‘조선 독립 기성회’를 결성하여 북간도의 독립운동을 조직화한 데서 비롯되었다. 대한 국민회는 국간도 각지에 본부와 지방회ㆍ지회를 두고 독립운동을 일원화했다. 安武가 인솔한 대한국민군은 주로 홍범도가 거느리는 대한독립군과 최명록이 인솔하는 군무도독부군과의 공동작전을 통해 전과를 올렸으며 청산리대첩이 임박한 1920년 가을에는 이들 두 군단과 차례로 통합을 이룩함으로써 전력의 극대화를 기할 수 있었다.
② 大韓軍政署 (北路軍政署)
대한군정서는 대종교의 영도자였던 徐一등이 1911년 북간도 일대에서 의병들을 규합해서 조직한 중광단이 발전한 것이다. 본영을 왕청현에 두고 있던 중광단은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와 재항전할 시기로 인정하고 만주 일대의 대종교도ㆍ한말 의병및 공교회원을 규합하여 正義團으로 확장하였다. 정의단을 1919년 8월에 또다시 확장ㆍ발전시켜 軍政會라 개칭하고 그 후 5분단 70여 지단의 조직을 갖는 등 유력한 항일 독립 군단으로 발전한 군정회는 1919년 12월 상해 임시정부의 명령에 복종키로 하고 大韓軍政署로 개칭하여 임시정부 산하의 중요한 전투군단화했다.
③ 大韓獨立軍
대한독립군은 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홍범도가 거느리는 독립군으로서 3ㆍ1운동 발발 직후부터 크게 활동했던 부대다. 국민회의 대한 국민군과 공동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간부와 군졸 훈련에 힘썼다. 그러나 대한 독립군은 항상 1개 독립 항일 군부대로 유지하기 보다는 여타 독립군 단체와의 연합을 추구하고 있었다.
④ 軍務都督府
군무도독부는 본영을 왕청현 춘화향 봉의동에 두고 최진동이 거느리는 독립군 부대다. 간부 중에는 특히 공교도가 많았으며, 강력한 국내 진입전을 주장, 실천했다.
⑤ 西路 軍政署
서로 군정서는 1919년 1월 서간에 한족회가 조직ㆍ편성했던 군정부를 개편한 독립군 군영이다. 일찍이 서로 군정서의 전신인 군정부는 3ㆍ1운동 발발 후 장정을 모아 신흥 학교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활동을 개시하게 되자, 한족회에서는 윤기섭을 상해에 대표로 파견하여 임시정부는 상해에 두되 만주에는 군정부를 수립할 것을 협의하게 했다. 이 타협안의 원칙이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통과되었고, 따라서 군정부를 軍政署라 개칭하고 임시정부 산하에 들어갔다.
⑥ 大韓獨立團
대한 독립단 1919년 4월 15일에 유하현 삼원보 서구 대화사에서 결서오디었다. 조맹선, 박장호, 백삼규, 최영호 등 구한말의 의병장들이 주동이 되었다. 독립군 편성에 서간도의 한인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매월 수백 명의 지원자가 있어 1919년 8월 중순경에는 그 수가 1천 5백명에 달했다고 한다. 따라서 독립단에서는 그 중 7백명을 하얼빈에 주둔한 백계군 부대에 보내 군사훈련을 받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독립단은 결성 후 구한말 의병 계열과 신진 청녀들과의 이념ㆍ사상사으이 차이로 암투를 계속하다가 1920년 초 마친내 기원 독립단과 민국 독립단으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양파는 1920년 2월에 한족회 청년단 연합회 등과 함께 광복군 사령부를 조직, 임시 정부 산하에 들어갔다.
⑦ 光復軍總營
광복군 총영은 1920년 7월경에 관전현 안자구에서 조직된 듯한테, 상해 인시 정부에서 파견된 이작이 대한 청년단 간부 등과 주동이 되어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투 군단을 만들 목적에서 발족했다. 본영의 군인은 주로 청년단의 결사대 외에도 대한 독립 군비단의 별동대인 군비단과 대한 독립단 및 서로 군정서원이 많았다.
B-2) 독립군의 항전 신용하, 한국 항일독립운동사연구
독립군이 일제와 전투를 전개하여 독립을 달성하기에는 어려운 조건이 많았다. 첫째는 독립군이 각지에 분산 조직되어 하나의 통합체가 되어 있지 못한 점, 둘째, 각지 독립군은 거의 충족한 무기와 기타 武備를 갖추고 있지 못한 점, 셋째, 독립군의 활동 무대가 중국 주권하의 영토이므로 중국 관헌의 간섭이 적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처럼 곤란한 여건에서도 각 독립군 부대는 1919년말부터 일제군경과 항전을 서슴치 않았고 때로는 국내진입작전을 되풀이 하였다. 독립 선언 1주년 기념일인 1920년 3월 1일부터 6일까지 사이에 임시정부에서 확인한 전투만 해도 전후 32회에 달했고 일제 군경 파출소와 총독부 하급 관서를 파괴한 것이 34건이었다. 증보 3ㆍ1운동사, 윤병석
이 당시 중요한 전투로는 山屯子戰鬪, 鳳梧洞勝捷, 靑山里大捷 등이 있다.
봉오동 전투의 서전이 되었던 두방강변인 화룡현 산둔자 전투는 독립군이 그동안 통상적으로 수행하던 소규모의 국내 진입작전이 도화선이 되었다. 1920년 6월 4일 새벽 30명 내외로 구성된 독립군의 한 소부대는 흔히 전개하던 국내진입작전으로 두만강을 건너 종성 북방 강양동으로 진격, 그 곳의 일본 헌병분견소를 격파하고 날이 저물어 두만강을 다시건너 봉오동 본진으로 귀환하여 작전을 종료했다. 그러나 일군이 전투의 패배를 복수하고자 쫓았으나 추격하지 못하자 삼둔자에 이르러 무고한 양민을 살육하고 이에 독립군은 산둔자 서남방 요지에 잠복하였다가 이들을 공격, 섬멸시켜버렸다.
봉오동전투는 국경선을 수비하는 일군이 봉오동 독립군 군영을 독립군의 진원지로 여겨 이를 격멸하려다가 일군이 대패한 전투다 1920년 6월 7일군 1개 대대병력은 봉오동을 포위 공격하고 보병을 선두로 전진해왔다. 이에 대하여 독립군측은 봉오동의 주민들을 피난시키고 홍범도ㆍ최진동이 선두 지휘하여 엄밀한 작전 계획을 세워 그들을 고스란히 봉오동에 가두고, 사면 고지에서 사격을 가해 일군 사실 157명, 중상 2백여명, 경상 1백여명을 내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청산리 전투는 독립군 사상 최대 승첩으로 일본군이 독립군 토벌을 획책하여 불법으로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과 대전하던 전투 중 가장 큰 격전이요, 또한 우리 독립군이 그들에게 대승한 기록이다. 위 내용 참조.
① 大韓國民軍
대한국민군은 대한국민회 산하에 편성된 독립군단이다. 대한국민회는 북간도 지방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각 지방 대표가 처음 ‘조선 독립 기성회’를 결성하여 북간도의 독립운동을 조직화한 데서 비롯되었다. 대한 국민회는 국간도 각지에 본부와 지방회ㆍ지회를 두고 독립운동을 일원화했다. 安武가 인솔한 대한국민군은 주로 홍범도가 거느리는 대한독립군과 최명록이 인솔하는 군무도독부군과의 공동작전을 통해 전과를 올렸으며 청산리대첩이 임박한 1920년 가을에는 이들 두 군단과 차례로 통합을 이룩함으로써 전력의 극대화를 기할 수 있었다.
② 大韓軍政署 (北路軍政署)
대한군정서는 대종교의 영도자였던 徐一등이 1911년 북간도 일대에서 의병들을 규합해서 조직한 중광단이 발전한 것이다. 본영을 왕청현에 두고 있던 중광단은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와 재항전할 시기로 인정하고 만주 일대의 대종교도ㆍ한말 의병및 공교회원을 규합하여 正義團으로 확장하였다. 정의단을 1919년 8월에 또다시 확장ㆍ발전시켜 軍政會라 개칭하고 그 후 5분단 70여 지단의 조직을 갖는 등 유력한 항일 독립 군단으로 발전한 군정회는 1919년 12월 상해 임시정부의 명령에 복종키로 하고 大韓軍政署로 개칭하여 임시정부 산하의 중요한 전투군단화했다.
③ 大韓獨立軍
대한독립군은 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홍범도가 거느리는 독립군으로서 3ㆍ1운동 발발 직후부터 크게 활동했던 부대다. 국민회의 대한 국민군과 공동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간부와 군졸 훈련에 힘썼다. 그러나 대한 독립군은 항상 1개 독립 항일 군부대로 유지하기 보다는 여타 독립군 단체와의 연합을 추구하고 있었다.
④ 軍務都督府
군무도독부는 본영을 왕청현 춘화향 봉의동에 두고 최진동이 거느리는 독립군 부대다. 간부 중에는 특히 공교도가 많았으며, 강력한 국내 진입전을 주장, 실천했다.
⑤ 西路 軍政署
서로 군정서는 1919년 1월 서간에 한족회가 조직ㆍ편성했던 군정부를 개편한 독립군 군영이다. 일찍이 서로 군정서의 전신인 군정부는 3ㆍ1운동 발발 후 장정을 모아 신흥 학교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활동을 개시하게 되자, 한족회에서는 윤기섭을 상해에 대표로 파견하여 임시정부는 상해에 두되 만주에는 군정부를 수립할 것을 협의하게 했다. 이 타협안의 원칙이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통과되었고, 따라서 군정부를 軍政署라 개칭하고 임시정부 산하에 들어갔다.
⑥ 大韓獨立團
대한 독립단 1919년 4월 15일에 유하현 삼원보 서구 대화사에서 결서오디었다. 조맹선, 박장호, 백삼규, 최영호 등 구한말의 의병장들이 주동이 되었다. 독립군 편성에 서간도의 한인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매월 수백 명의 지원자가 있어 1919년 8월 중순경에는 그 수가 1천 5백명에 달했다고 한다. 따라서 독립단에서는 그 중 7백명을 하얼빈에 주둔한 백계군 부대에 보내 군사훈련을 받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독립단은 결성 후 구한말 의병 계열과 신진 청녀들과의 이념ㆍ사상사으이 차이로 암투를 계속하다가 1920년 초 마친내 기원 독립단과 민국 독립단으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양파는 1920년 2월에 한족회 청년단 연합회 등과 함께 광복군 사령부를 조직, 임시 정부 산하에 들어갔다.
⑦ 光復軍總營
광복군 총영은 1920년 7월경에 관전현 안자구에서 조직된 듯한테, 상해 인시 정부에서 파견된 이작이 대한 청년단 간부 등과 주동이 되어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투 군단을 만들 목적에서 발족했다. 본영의 군인은 주로 청년단의 결사대 외에도 대한 독립 군비단의 별동대인 군비단과 대한 독립단 및 서로 군정서원이 많았다.
B-2) 독립군의 항전 신용하, 한국 항일독립운동사연구
독립군이 일제와 전투를 전개하여 독립을 달성하기에는 어려운 조건이 많았다. 첫째는 독립군이 각지에 분산 조직되어 하나의 통합체가 되어 있지 못한 점, 둘째, 각지 독립군은 거의 충족한 무기와 기타 武備를 갖추고 있지 못한 점, 셋째, 독립군의 활동 무대가 중국 주권하의 영토이므로 중국 관헌의 간섭이 적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처럼 곤란한 여건에서도 각 독립군 부대는 1919년말부터 일제군경과 항전을 서슴치 않았고 때로는 국내진입작전을 되풀이 하였다. 독립 선언 1주년 기념일인 1920년 3월 1일부터 6일까지 사이에 임시정부에서 확인한 전투만 해도 전후 32회에 달했고 일제 군경 파출소와 총독부 하급 관서를 파괴한 것이 34건이었다. 증보 3ㆍ1운동사, 윤병석
이 당시 중요한 전투로는 山屯子戰鬪, 鳳梧洞勝捷, 靑山里大捷 등이 있다.
봉오동 전투의 서전이 되었던 두방강변인 화룡현 산둔자 전투는 독립군이 그동안 통상적으로 수행하던 소규모의 국내 진입작전이 도화선이 되었다. 1920년 6월 4일 새벽 30명 내외로 구성된 독립군의 한 소부대는 흔히 전개하던 국내진입작전으로 두만강을 건너 종성 북방 강양동으로 진격, 그 곳의 일본 헌병분견소를 격파하고 날이 저물어 두만강을 다시건너 봉오동 본진으로 귀환하여 작전을 종료했다. 그러나 일군이 전투의 패배를 복수하고자 쫓았으나 추격하지 못하자 삼둔자에 이르러 무고한 양민을 살육하고 이에 독립군은 산둔자 서남방 요지에 잠복하였다가 이들을 공격, 섬멸시켜버렸다.
봉오동전투는 국경선을 수비하는 일군이 봉오동 독립군 군영을 독립군의 진원지로 여겨 이를 격멸하려다가 일군이 대패한 전투다 1920년 6월 7일군 1개 대대병력은 봉오동을 포위 공격하고 보병을 선두로 전진해왔다. 이에 대하여 독립군측은 봉오동의 주민들을 피난시키고 홍범도ㆍ최진동이 선두 지휘하여 엄밀한 작전 계획을 세워 그들을 고스란히 봉오동에 가두고, 사면 고지에서 사격을 가해 일군 사실 157명, 중상 2백여명, 경상 1백여명을 내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청산리 전투는 독립군 사상 최대 승첩으로 일본군이 독립군 토벌을 획책하여 불법으로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과 대전하던 전투 중 가장 큰 격전이요, 또한 우리 독립군이 그들에게 대승한 기록이다. 위 내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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