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괴테의 생애와 사상
2. 작품 줄거리
3. 작품 제작 경위
4. 슬픔의 미학, 짝사랑
5. 계몽주의 문학과 베르테르
6.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낭만성
7. 실존적 죽음, 자살
2. 작품 줄거리
3. 작품 제작 경위
4. 슬픔의 미학, 짝사랑
5. 계몽주의 문학과 베르테르
6.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낭만성
7. 실존적 죽음, 자살
본문내용
정신적인 영역으로만 계속 확장된다. 그래서 재능은 무한한 만유와 자연 그리고 내면적인 자기 세계에서 배회한다.
2부에서 베르테르가 민중 또는 시민적-평민계층의 편에서 귀족계급 내지 궁정사회를 대비시킬 때, 일반적 사회상황에 관한 그의 예리한 판단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12월 24일자 편지에서 “감자를 심거나 곡물을 팔러 말타고 시내에 가는 사람”이 “노예선의 사슬에 묶여 있는” 자신보다 더 나은 일을 하고 있다고 쓴다. 그리고 공사관에서 “서로 상대방 눈치를 살피는 구역질나는 무리들 틈에 섞여 사는 비참한 영광, 이 지겨움! 서로 한 걸음이라도 먼저 얻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만 있는 그네들의 지위욕, 참으로 한심하고 딱한 그 욕망은 완전히 노골적”이라고 한다. 이어서 베르테르는 그가 제 3신분이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겪는 수모를 한편으론 이해하면서도 “신분차별이 내가 이 땅에서 조그만 기쁨과 한 줄기 행복을 향유할 수 있는 길을 가로막아서는 안된다.”고 적는다. 자신의 현재를 즐기려는 의지가 매우 강력한, 다른 말로 시민적인 자기의식이 매우 뚜렷한 베르테르는 이제 귀족들의 면전에서 노골적으로 소외당하고 결국 쫓겨나는 심각한 좌절을 경험한다.
마침내 경직된 기존사회를 거부하는 베르테르는 사회적 억압에서 스스로를 해방하기 위해 자살에서 최종적인 해결책을 찾는다. 그의 자살은 스스로 선택한 자유와 이상이 현실에서 좌절됨을 뜻한다. 베르테르의 죽음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모순들을 자기의지에 의해 강제로 해결하려는 최후 수단이었고, 그래서 순수한 의미에서 더 비극적이다.
7. 실존적 죽음, 자살
1부에 베르테르와 알베르토의 '자살'에 대한 논란이 나온다. 알베르토는 '자살'이란괴로운 인생을 굳이 참고 견디느니 죽어 버리는 약자의 행동이라고 규정해 버린다. 반면 베르테르는 '자살'을인간의 본성이 서로 뒤얽혀 반발하는 온갖 힘의 미궁 속에서 빠져 나올 출구를 찾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되는 길이라고 말한다. 알베르토의 '자살'에 대한 정의는 이성에 바탕을 둔 계몽주의적 발상이다. 그러나 베르테르의 '자살'에 대한 정의는 이성보다는 상황과 감정에 따른 순간적인 행동으로써 앞서 말한 Sturm und Drang의 시대적 조류에 기초하고 있다. 이 외에도 베르테르와 알베르토의 대화를 보면 알베르토는 전형적인 계몽주의자이고 베르테르는 풍부한 감성을 지니고 감정적으로 사고하는 인물이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소위 산다는 것은 실은 '죽어가는 것'에 머무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된다.' 때로는 곁눈질과, 색안경을 통해 바라본 세계에서 삶의 다양한 일면을 보기도 한다.
소설의 내용은 베르테르가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괴로워 하다가 결국은 자살을 하게 된다는, 오늘날로 치면 신파 구조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18c유럽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함을 비관하여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의 소설은, 그야말로 놀랠 '노'자 였을 것이다. 이유인 즉, 앞서 말한 기독교적 윤리관으로는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죄악이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이런 인간 말종(?) 베르테르를 마음으로 동정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부분에서 발생한다. 베르테르는 왜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수세기에 걸쳐 이어져온 이 문제의 답은 사실상 '사랑'으로 판명되었다. 기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타령이다. 하지만 이건 어떤가? 베르테르는 한 여인을 '죽도록' 사랑했으나, 그'사랑'이 베르테르를 죽인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사랑의 고통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절망에 빠졌고, 그 절망에서 구원받기 위해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사랑 때문에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단 얘기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베르테르는 왜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성직자는 단 한사람도 따라 가지 않았다' 소설은 이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어쩌면 이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되지는 않을까. 자살의 부당함을 말하는 종교의 윤리 의식이나, 기독교로 치면 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의 권리에 관해서나, 온당하지 않은 권위주의가 그 기저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괴테가 비윤리적인 퇴행으로 금기 시 되었던 자살에 관한 보고서를 사람들 앞에 내 놓은 것이다. 종교계의 시선으로 이는 확실히 그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기독교 윤리 강령의 일탈로 비추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문학가가 반사회 운동가일 필요는 없어도, 지배 이데올로기의 노예여서는 안되는 것처럼, 베르테르를 죽음에 이르게 한 남상에는 절대적 권위에 대한 도전의 일면이 있었던지도 모르는 일이다. 같은 코드로, 베르테르라는 인물의 정열적이고 감성적인 성격과,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그의 죽음에 대한 혐의를 받아온 사랑이란, 누구도 의심치 않을 만한 확실한 알리바이가 되준 셈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이 불러일으킨 센세이션은 극단적으로 말해, 괴테 자신도 모르는 사이 행해진, 강력한 집단 최면술이었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내 스스로 내 삶을 결정짓고 싶어. 난 내 의지가 아닌 사고나 질병 따위로 내 삶을 마감하고 싶지 않아. 나는 내가 죽어야겠다고 결정한 바로 그 순간, 그대로 죽어버릴 거야.'
요즘 사회에 자살은 센세이션을 넘어선 고질적인 질환으로 분류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에 대한 각개 각층의 논의도 넘쳐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한번도 베르테르처럼 완벽하게, 처절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사랑을 시작하기 전부터 사랑이 끝날 때까지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보통은,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부셔서, 또는 제정신이 아니어서 죽음을 결심하는데 말이다. 그런 점에서 빌헬름에게 보내는 무수한 유언장과 사망신고서는 기이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는 애초에 죽기 위해 태어나는 불운을 짊어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필연적으로 스스로의 실존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고 처음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느꼈을 삶의 실존적 비극을 가슴아파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2부에서 베르테르가 민중 또는 시민적-평민계층의 편에서 귀족계급 내지 궁정사회를 대비시킬 때, 일반적 사회상황에 관한 그의 예리한 판단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12월 24일자 편지에서 “감자를 심거나 곡물을 팔러 말타고 시내에 가는 사람”이 “노예선의 사슬에 묶여 있는” 자신보다 더 나은 일을 하고 있다고 쓴다. 그리고 공사관에서 “서로 상대방 눈치를 살피는 구역질나는 무리들 틈에 섞여 사는 비참한 영광, 이 지겨움! 서로 한 걸음이라도 먼저 얻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만 있는 그네들의 지위욕, 참으로 한심하고 딱한 그 욕망은 완전히 노골적”이라고 한다. 이어서 베르테르는 그가 제 3신분이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겪는 수모를 한편으론 이해하면서도 “신분차별이 내가 이 땅에서 조그만 기쁨과 한 줄기 행복을 향유할 수 있는 길을 가로막아서는 안된다.”고 적는다. 자신의 현재를 즐기려는 의지가 매우 강력한, 다른 말로 시민적인 자기의식이 매우 뚜렷한 베르테르는 이제 귀족들의 면전에서 노골적으로 소외당하고 결국 쫓겨나는 심각한 좌절을 경험한다.
마침내 경직된 기존사회를 거부하는 베르테르는 사회적 억압에서 스스로를 해방하기 위해 자살에서 최종적인 해결책을 찾는다. 그의 자살은 스스로 선택한 자유와 이상이 현실에서 좌절됨을 뜻한다. 베르테르의 죽음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모순들을 자기의지에 의해 강제로 해결하려는 최후 수단이었고, 그래서 순수한 의미에서 더 비극적이다.
7. 실존적 죽음, 자살
1부에 베르테르와 알베르토의 '자살'에 대한 논란이 나온다. 알베르토는 '자살'이란괴로운 인생을 굳이 참고 견디느니 죽어 버리는 약자의 행동이라고 규정해 버린다. 반면 베르테르는 '자살'을인간의 본성이 서로 뒤얽혀 반발하는 온갖 힘의 미궁 속에서 빠져 나올 출구를 찾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되는 길이라고 말한다. 알베르토의 '자살'에 대한 정의는 이성에 바탕을 둔 계몽주의적 발상이다. 그러나 베르테르의 '자살'에 대한 정의는 이성보다는 상황과 감정에 따른 순간적인 행동으로써 앞서 말한 Sturm und Drang의 시대적 조류에 기초하고 있다. 이 외에도 베르테르와 알베르토의 대화를 보면 알베르토는 전형적인 계몽주의자이고 베르테르는 풍부한 감성을 지니고 감정적으로 사고하는 인물이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소위 산다는 것은 실은 '죽어가는 것'에 머무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된다.' 때로는 곁눈질과, 색안경을 통해 바라본 세계에서 삶의 다양한 일면을 보기도 한다.
소설의 내용은 베르테르가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괴로워 하다가 결국은 자살을 하게 된다는, 오늘날로 치면 신파 구조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18c유럽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함을 비관하여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의 소설은, 그야말로 놀랠 '노'자 였을 것이다. 이유인 즉, 앞서 말한 기독교적 윤리관으로는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죄악이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이런 인간 말종(?) 베르테르를 마음으로 동정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부분에서 발생한다. 베르테르는 왜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수세기에 걸쳐 이어져온 이 문제의 답은 사실상 '사랑'으로 판명되었다. 기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타령이다. 하지만 이건 어떤가? 베르테르는 한 여인을 '죽도록' 사랑했으나, 그'사랑'이 베르테르를 죽인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사랑의 고통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절망에 빠졌고, 그 절망에서 구원받기 위해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사랑 때문에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단 얘기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베르테르는 왜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성직자는 단 한사람도 따라 가지 않았다' 소설은 이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어쩌면 이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되지는 않을까. 자살의 부당함을 말하는 종교의 윤리 의식이나, 기독교로 치면 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의 권리에 관해서나, 온당하지 않은 권위주의가 그 기저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괴테가 비윤리적인 퇴행으로 금기 시 되었던 자살에 관한 보고서를 사람들 앞에 내 놓은 것이다. 종교계의 시선으로 이는 확실히 그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기독교 윤리 강령의 일탈로 비추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문학가가 반사회 운동가일 필요는 없어도, 지배 이데올로기의 노예여서는 안되는 것처럼, 베르테르를 죽음에 이르게 한 남상에는 절대적 권위에 대한 도전의 일면이 있었던지도 모르는 일이다. 같은 코드로, 베르테르라는 인물의 정열적이고 감성적인 성격과,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그의 죽음에 대한 혐의를 받아온 사랑이란, 누구도 의심치 않을 만한 확실한 알리바이가 되준 셈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이 불러일으킨 센세이션은 극단적으로 말해, 괴테 자신도 모르는 사이 행해진, 강력한 집단 최면술이었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내 스스로 내 삶을 결정짓고 싶어. 난 내 의지가 아닌 사고나 질병 따위로 내 삶을 마감하고 싶지 않아. 나는 내가 죽어야겠다고 결정한 바로 그 순간, 그대로 죽어버릴 거야.'
요즘 사회에 자살은 센세이션을 넘어선 고질적인 질환으로 분류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에 대한 각개 각층의 논의도 넘쳐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한번도 베르테르처럼 완벽하게, 처절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사랑을 시작하기 전부터 사랑이 끝날 때까지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보통은,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부셔서, 또는 제정신이 아니어서 죽음을 결심하는데 말이다. 그런 점에서 빌헬름에게 보내는 무수한 유언장과 사망신고서는 기이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는 애초에 죽기 위해 태어나는 불운을 짊어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필연적으로 스스로의 실존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고 처음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느꼈을 삶의 실존적 비극을 가슴아파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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