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풍수지리
1. 풍수지리의 개요
2. 풍수지리적 관점 (삶의 공간과 지속가능성을 전제로 한 입지성)에서...
3. 전통적 풍수지리론의 성격
4. 전통적 풍수지리론의 입지론적 의미
5. 풍수지리의 역사
6. 풍수지리의 전래
7. 풍수지리의 분류
8. 한국풍수의 성격과 흐름
9. 풍수기본도
10. 풍수지리의 구성요소
II. 풍수지리에 의한 도시입지 및 도시공간구성의 예
1. 장풍국과 득수국의 도읍
2. 식민지의 수도 경성
3. 전주의 풍수
4. 구례운조루(求禮雲鳥樓)
5. 안동화회마을
6. 경주 양동마을
Ⅲ.풍수지리의 영향
Ⅳ. 참고문헌
1. 풍수지리의 개요
2. 풍수지리적 관점 (삶의 공간과 지속가능성을 전제로 한 입지성)에서...
3. 전통적 풍수지리론의 성격
4. 전통적 풍수지리론의 입지론적 의미
5. 풍수지리의 역사
6. 풍수지리의 전래
7. 풍수지리의 분류
8. 한국풍수의 성격과 흐름
9. 풍수기본도
10. 풍수지리의 구성요소
II. 풍수지리에 의한 도시입지 및 도시공간구성의 예
1. 장풍국과 득수국의 도읍
2. 식민지의 수도 경성
3. 전주의 풍수
4. 구례운조루(求禮雲鳥樓)
5. 안동화회마을
6. 경주 양동마을
Ⅲ.풍수지리의 영향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처음부터 산등성이에다 집을 짓는 방법을 택했다. 거기에는 물론 물(勿)자 지맥을 통하여 인물이 난다는 풍수설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대종가는 산등성이의 높고 넓은 터위에 위치하고, 파(派)종가들湧 좀 더 낮은 자리에 터를 잡았으며, 외거(外居) 노비들이 사는 가랍집들은 또 그보다도 낮은 터에 자리잡았다. 그것은 곧 양동마을의 주거 택지(擇地)에 물(勿)자라는 자연의 질서외에도 유교 사회의 엄격한 신분제도와 관련된 인위적 질서가 공간적으로 반영된 것을 의미한다.
비록 물(勿)자 능선을 따라 집들이 들어섰지만, 양동마을에서는 집이 숲을 없앴다기 보다는 오히려 집이 숲속을 찾아들었다고 느낄 정도로 자연훼손을 최대한 줄여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안산인 성주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여느 마을 앞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 흔한 묘지 하나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깨끗하다'는 뜻의 물(勿)자와 '어질고 훌륭한 산'이라는 뜻의 성주산을 오래도록 보전하고픈 주민들의 삶터에 대한 애착심이 그런 좋은 결과를 낳았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다.
하지만 양동마을인들 어찌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 일제때 양동은 마을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맞은 적이 있다. 일제가 1938년에 경주와 포항을 잇는 동해남부선 부설계획을 세우면서, 양동의 주산과 안산 사이를 흐르는 양동천을 따라 철도가 지나가도록 설계한 것이다.
마을 터가 반 동강날 지경이었으니 온 마을이 발칵 뒤집힌 것은 물론이다. 전전긍긍하던 끝에나온 묘안이 바로 물(勿)자의 자연지세에 만약 철로를 놓아 아랫부분에 획하나를 더 보태게 되면 피 혈(血)자가 되어 마을에 큰 재난이 일어날 것이 불보듯 뻔하다는 주장이었다.
어쨌든 마을 안으로 철도가 통과하는 것을 결사반대하는 주민들의 단합된 힘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듯 했고 그 결과, 마침내 일제도 어쩔 수 없이 현재처럼 철도가 마을 앞에서 우회해 빠져나가도록 원래의 노선 설계를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만약 그 양동천을 통과하는 철도부설계획을 막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양동은 민속마을은 고사하고 거의 폐촌이나 다름없게 변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물(勿)자형의 길지를 지켜낸 양동 조상들의 피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지금의 후손들도 조상들의 삶터를 사랑했던 바로 그 마음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8년에 양동 사람들은 또 하나의 대역사(役事)를 말끔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일제때 지어진 후 그동안 마을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던 남향의 양동초등학교 건물을 동향으로 바꿔 앉힌 것이다. 두가지의 풍수적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동네는 전체적으로 서향을 취하고 있는데, 학교 건물이 남향하고 있어 궁극적으로는 혈(血)자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둘째, 예로부터 양동마을은 경주에서 북류해 오는 형산강 물을 맞이하는 북쪽 제1관문인데, 학교건물이 그토록 아름답게 굽이쳐 오는 길격(吉格)의 조수(朝水)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마을앞을 가리고 있어 마땅히 그 좌향을 바꾸어 신축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양동마을이 갖고 있는 상징성, 그리고 그 장소적 뿌리를 전승시키고자하는 노력은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유치하고 불합리한 것으로 보일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자체가 바로 지역주민의 정신과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하다. 양동은 외부 관찰자의 객관적, 분석적인 눈에 비치는 그런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그 자체 장소성과 상징성, 그리고 지역주민의 지리정신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 숨쉬고 있는 생명력 있는 공간 인것이다.
Ⅲ.풍수지리의 영향
풍수지리란 자연지리 현상을 인간 생활에 편리하게 이용하여 인간의 발전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 또한 땅의 변화 현상을 이해하여 명당 길지를 찾아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을 짖거나 조상의 유골을 편안하게 모셔 지력(땅의 기운)에 의해서 거주자와 자손의 부귀영화와 행복을 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또는 생활의 편리를 위해서 자기가 생활할 터전을 찾는 데서부터 풍수지리의 발생동기이다.
풍수지리설은 우리 민족의 기층적 사상체계를 이루어 온 수 많은 사상들 중의 하나로, 그 내용의 성속 이나 진가를 막론하고 신라 이후의 역사상 우리 민족에 깊은 영향을 미친 관념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풍수란 땅의 형세를 인간의 길흉화복에 관련시켜 설명하는 동양적 자연관의 하나이다.
풍수에 의하면 땅은 생적동적의 존재로서 만물을 키우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 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인간에게 주는 혜택도 달라진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서는 지표의 하에 흐르는 지기라는 무형적인 힘과 인간 생활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풍수지리설이란 음양론과 오행설을 기반으로 주역의 체계를 주요한 논리구조로 삼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지리과학이다. 이것이 후세 효의 관념이나 샤머니즘과 결합되어 이기적인 속신으로 진전되기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일종의 토지관의 표출이라 할 수 있는데, 연구의 방향을 첫 번째는, 토지관의 표출인 풍수지리를 전라도 지방 마을중심(지리적 배치)으로 이 지방의 풍수의 특성사항을 알아봄으로써 마을의 공간특성을 알아보고, 두번째는, 세부적으로 들어가 마당에 대한 풍수고려사항이나, 방위 (집향)에 대한 고려사항을 알아봄으로써 지리적 및 지형적으로 고려된 집의 배치 향의 고려사항을 알아보고, 세 번째는, (방 하나하나는 조그만 (양적공간)이고 이를(음적공간)이 둘러싸고 있다고 한다. 다시 작은 (양)들이 모여 보다 큰 (양)이 된 채를 음적 공간이 둘러싸고 이를 다시 담장, 행랑으로 둘러쌈으로써 보다 더 큰 음과 양으로 확대되어 결국 음양의 변화를 이루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것은 방안에서는 방이 안이고 대청이 밖이나 다시 대청에서 볼 때는 마당이 밖이고 대청이 안인, 그런 안팎 구조 와도 관계되며 또 바깥사랑채와 안사랑채, 바깥주인과 안주인등등의 안과 밖의 구별과도 모두 같은 원리이다.)
처럼, 공간위주인 음양의 공간적인 의미적 풍수를 알아볼까 한다.
Ⅳ. 참고문헌
건축문화 풍수지리와 신도시
풍수지리와 현대건축 박시익 기문당 1992
비록 물(勿)자 능선을 따라 집들이 들어섰지만, 양동마을에서는 집이 숲을 없앴다기 보다는 오히려 집이 숲속을 찾아들었다고 느낄 정도로 자연훼손을 최대한 줄여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안산인 성주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여느 마을 앞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 흔한 묘지 하나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깨끗하다'는 뜻의 물(勿)자와 '어질고 훌륭한 산'이라는 뜻의 성주산을 오래도록 보전하고픈 주민들의 삶터에 대한 애착심이 그런 좋은 결과를 낳았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다.
하지만 양동마을인들 어찌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 일제때 양동은 마을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맞은 적이 있다. 일제가 1938년에 경주와 포항을 잇는 동해남부선 부설계획을 세우면서, 양동의 주산과 안산 사이를 흐르는 양동천을 따라 철도가 지나가도록 설계한 것이다.
마을 터가 반 동강날 지경이었으니 온 마을이 발칵 뒤집힌 것은 물론이다. 전전긍긍하던 끝에나온 묘안이 바로 물(勿)자의 자연지세에 만약 철로를 놓아 아랫부분에 획하나를 더 보태게 되면 피 혈(血)자가 되어 마을에 큰 재난이 일어날 것이 불보듯 뻔하다는 주장이었다.
어쨌든 마을 안으로 철도가 통과하는 것을 결사반대하는 주민들의 단합된 힘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듯 했고 그 결과, 마침내 일제도 어쩔 수 없이 현재처럼 철도가 마을 앞에서 우회해 빠져나가도록 원래의 노선 설계를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만약 그 양동천을 통과하는 철도부설계획을 막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양동은 민속마을은 고사하고 거의 폐촌이나 다름없게 변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물(勿)자형의 길지를 지켜낸 양동 조상들의 피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지금의 후손들도 조상들의 삶터를 사랑했던 바로 그 마음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8년에 양동 사람들은 또 하나의 대역사(役事)를 말끔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일제때 지어진 후 그동안 마을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던 남향의 양동초등학교 건물을 동향으로 바꿔 앉힌 것이다. 두가지의 풍수적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동네는 전체적으로 서향을 취하고 있는데, 학교 건물이 남향하고 있어 궁극적으로는 혈(血)자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둘째, 예로부터 양동마을은 경주에서 북류해 오는 형산강 물을 맞이하는 북쪽 제1관문인데, 학교건물이 그토록 아름답게 굽이쳐 오는 길격(吉格)의 조수(朝水)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마을앞을 가리고 있어 마땅히 그 좌향을 바꾸어 신축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양동마을이 갖고 있는 상징성, 그리고 그 장소적 뿌리를 전승시키고자하는 노력은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유치하고 불합리한 것으로 보일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자체가 바로 지역주민의 정신과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하다. 양동은 외부 관찰자의 객관적, 분석적인 눈에 비치는 그런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그 자체 장소성과 상징성, 그리고 지역주민의 지리정신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 숨쉬고 있는 생명력 있는 공간 인것이다.
Ⅲ.풍수지리의 영향
풍수지리란 자연지리 현상을 인간 생활에 편리하게 이용하여 인간의 발전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 또한 땅의 변화 현상을 이해하여 명당 길지를 찾아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을 짖거나 조상의 유골을 편안하게 모셔 지력(땅의 기운)에 의해서 거주자와 자손의 부귀영화와 행복을 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또는 생활의 편리를 위해서 자기가 생활할 터전을 찾는 데서부터 풍수지리의 발생동기이다.
풍수지리설은 우리 민족의 기층적 사상체계를 이루어 온 수 많은 사상들 중의 하나로, 그 내용의 성속 이나 진가를 막론하고 신라 이후의 역사상 우리 민족에 깊은 영향을 미친 관념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풍수란 땅의 형세를 인간의 길흉화복에 관련시켜 설명하는 동양적 자연관의 하나이다.
풍수에 의하면 땅은 생적동적의 존재로서 만물을 키우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 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인간에게 주는 혜택도 달라진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서는 지표의 하에 흐르는 지기라는 무형적인 힘과 인간 생활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풍수지리설이란 음양론과 오행설을 기반으로 주역의 체계를 주요한 논리구조로 삼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지리과학이다. 이것이 후세 효의 관념이나 샤머니즘과 결합되어 이기적인 속신으로 진전되기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일종의 토지관의 표출이라 할 수 있는데, 연구의 방향을 첫 번째는, 토지관의 표출인 풍수지리를 전라도 지방 마을중심(지리적 배치)으로 이 지방의 풍수의 특성사항을 알아봄으로써 마을의 공간특성을 알아보고, 두번째는, 세부적으로 들어가 마당에 대한 풍수고려사항이나, 방위 (집향)에 대한 고려사항을 알아봄으로써 지리적 및 지형적으로 고려된 집의 배치 향의 고려사항을 알아보고, 세 번째는, (방 하나하나는 조그만 (양적공간)이고 이를(음적공간)이 둘러싸고 있다고 한다. 다시 작은 (양)들이 모여 보다 큰 (양)이 된 채를 음적 공간이 둘러싸고 이를 다시 담장, 행랑으로 둘러쌈으로써 보다 더 큰 음과 양으로 확대되어 결국 음양의 변화를 이루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것은 방안에서는 방이 안이고 대청이 밖이나 다시 대청에서 볼 때는 마당이 밖이고 대청이 안인, 그런 안팎 구조 와도 관계되며 또 바깥사랑채와 안사랑채, 바깥주인과 안주인등등의 안과 밖의 구별과도 모두 같은 원리이다.)
처럼, 공간위주인 음양의 공간적인 의미적 풍수를 알아볼까 한다.
Ⅳ. 참고문헌
건축문화 풍수지리와 신도시
풍수지리와 현대건축 박시익 기문당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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