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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서 이괄의 반군을 패퇴 시켰다. 이괄은 퇴위 도중 내부 의 리반자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이 난의 배경은 이괄이 공이 컸음에도 2등 공신 밖 에 되지 못하고 더군다나 평양감사 겸 부원수로 외지에 부임한 것에 대해 앙심을 품어 난을 일으켰었다.
* 난의 순서
① 임진왜란
선조 25년(1592)
② 정유재란
선조 30년(1597) : 원균을 대신해 다시 기용된 이순신은 명랑해전에서 적선을 대파하 고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어 どよとみ가 죽고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에 의해 왜군은 다시 격퇴되었고 철군하였다. 이 철군으로 해서 7년간의 왜란은 끝을 맺었다.
③ 정묘호란
인조 5년(1627) 누루하치가 후금을 세우고(1616), 광해군은 명이 쇠퇴하고 여진(후금) 이 강해지자 신중한 중립외교로 대응한다. 이에 광해군의 개혁정치와 중립외교는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들에게는 후금에 대한 정책이 명을 배신하는 것이라 하여 크게 반발하여 대북 세력을 제거하고 인조반정에 의하여 서인정권이 들어선다. 서인은 대의명분을 내세 워 친명배금 정책을 폈다. 인조반정에서 론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 으나 기익헌에 의하여 난은 평정이 된다. 이괄의 난의 주모자중의 한 명인 한명련이 처형 당하자 그 아들인 한온 등이 후금으로 도망하여 인조반정의 부당성과 조선정벌을 요청하 였다. 이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구실을 삼아 인조 5년(1627) 제 1차 침입 을 하였다. 이에 강홍립의 협상에 의하여 조공을 조건으로 형제의 매약을 체결하여 정묘 호란은 종결이 되었다.
④ 병자호란
인조 14년(1636) 청(후금) 은 정묘호란 후 국력이 강해지자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하자 조정은 이를 거절 청은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1627).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 성으로 피신하여 45일간 대항하였으나 결국 최명길(주화론자) 의 주장에 의하여 청과 강 화를 맺는다. 이것이 삼전도의 굴복이다. 이 결과 조선은 명과 단교를 하고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청에 대하여 신하로서 예를 지키고 청이 명을 공격할때 원병을 파견할 것을 약속 하였다. 이리하여 소현세자, 봉림대군의 두 왕자가 볼모로 청에 잡혀가고 척화파의 강경론 자인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3학사는 잡혀가 처형을 당했다.
* 북벌론
병자호란때 볼모로 갔다가 돌아온 봉림대군(효종) 은 조선이 당한 치욕을 씻고 국가의 정기를 세우기 위해 북벌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현종 이후 조선의 약한 국력의 현실적인 한계를 인식하여 점차 북벌론의 계획은 수그러들었다. 북벌이 한창중인 때에 Russia가 흑룡강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에 청군은 정벌군을 파견하면서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흑룡강 전투에서 청조선의 련합군은 Russia를 물리쳤다(나선정벌).
* 5군영의 설치
명칭
기능
훈련도감 : 선조 27년(1594)
삼수병 설치(포수, 사수, 살수) : 삼수병은 모두 장번급료병 으로 속오법에 따라 조직.
총융청 : 인조 2년(1624)
경기수비.
수어청 : 인조 4년(16260
남한산성 수비.
어영청 : 효종 2년(1652)
서울방비.(북벌담당)
금위영 : 숙종 8년(1682)
궁중수비
※ 장번급료병 : 대개 군사는 번을 하는 차례가 정해져 있어 16개월 또는 8개월에 한 달씩 복무 하였다. 장번이란 번 차례 없이 계속 번을 드는 것을 의미하며 급료병이란 급료를 받는다는 뜻이다. 조선 초에는 장번은 있 었지민 소수였는데, 훈련도감의 장번급료병은 5000명에 달했다.
* 당쟁의 주도권
선조
동인
광해군
대북
인조
서인
효종
숙종
서인남인
경종
노론 → 소론
영조
노론
정조
노론
* 당쟁의 격화
제 1차 복제문제(예송논쟁) : 숙종 즉위년(1674)
효종의 모후 조대비의 상복문제. 서인(송시 열) : 기년설(1년), 남인(윤휴): 대공설(3년) → 서인집권
제 2차 복제문제 : 숙종
효종의 인선대비의 상복문제. 서인 : 대공설 (9개월), 남인 : 기년설(1년) → 남인집권
경신대출척 : 숙종 6년(1680)
서인이 남인인 허적을 모함하여 남인 축출 → 서인집권
기사환국 : 숙종 15년(1680)
장희빈의 소생인 균의 세자책봉을 둘러싸고 송시열 등이 반대하다 쫓겨남 → 남인집권
갑술옥사 : 숙종 20년(1694)
남인인 민암 등이 민비 복위 문제로 서인을 무고하다 도리어 축출 → 소론 득세
신임사화 : 경종
경종 즉위 후 노론이 집권했으나, 세자책봉 문제로 → 소론 집권
이인좌 난 : 영조
영조의 집권으로 노론이 중용되자 소론인 이인좌 등이 난을 일으킴
* 예송논쟁
1,2차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된 예론논쟁은 한낱 왕실의 장례절차 문제가 아니라 인조 이 래 권력을 독점해온 서인세력과 그에 대항해 권력교체를 추구해온 남인세력 사이의 정치 투쟁이 예론이라 할 수 있다. 1,2차 예송에서 일관되게 국왕의 특수지위보다 주자가례 의 규정을 상위에 두고자 한 것에는 국왕의 국정에 대한 전권 행사를 사실상 부정하는 의 미가 들어 있다. 반면에 남인측의 왕권강화론에는 항상 권력의 주변에만 머물고 집권 세력으로 등장 해보지 못한 소수세력의 처지가 담겨있다. 그러므로 남인은 왕권과의 결합 에 의하여 1,2차 논쟁에서 국왕의 절대적 권위를 일관되게 주장해온 것이다. 결국 예송 에서 남인이 승리했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 경신대출척
1680년 숙종 6년 그 동안 정국실세로 승승장구하던 남인세력이 일시에 축출되는 대파란 즉, 환국이 발생했다. 지난 1674년 현종 15년 예송에서 남인에게 패배, 송시열이 사약을 받는 등 고배를 들어온 서인세력이 남인세력을 완전히 대체, 정국은 일순간 명암이 뒤 바뀌었다. 남인들은 국왕이 자주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왕위를 넘보던 중, 최근 전시사령 부인 도제찰사부에 소속 되 있는 이천의 부대를 반란군으로 삼아 수 차례에 걸쳐 도상 훈 련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허적, 허견과 3복을 포함해 10여명이 사형을 당 했으며 40여명이 처벌됐다. 거의 남인세력은 완전히 축출되다 시피 했다. 이후 1684년 숙종 10년 집권 서인세력이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를 두고 로장파와 소장파 사이에 강 온파 즉,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
* 난의 순서
① 임진왜란
선조 25년(1592)
② 정유재란
선조 30년(1597) : 원균을 대신해 다시 기용된 이순신은 명랑해전에서 적선을 대파하 고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어 どよとみ가 죽고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에 의해 왜군은 다시 격퇴되었고 철군하였다. 이 철군으로 해서 7년간의 왜란은 끝을 맺었다.
③ 정묘호란
인조 5년(1627) 누루하치가 후금을 세우고(1616), 광해군은 명이 쇠퇴하고 여진(후금) 이 강해지자 신중한 중립외교로 대응한다. 이에 광해군의 개혁정치와 중립외교는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들에게는 후금에 대한 정책이 명을 배신하는 것이라 하여 크게 반발하여 대북 세력을 제거하고 인조반정에 의하여 서인정권이 들어선다. 서인은 대의명분을 내세 워 친명배금 정책을 폈다. 인조반정에서 론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 으나 기익헌에 의하여 난은 평정이 된다. 이괄의 난의 주모자중의 한 명인 한명련이 처형 당하자 그 아들인 한온 등이 후금으로 도망하여 인조반정의 부당성과 조선정벌을 요청하 였다. 이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구실을 삼아 인조 5년(1627) 제 1차 침입 을 하였다. 이에 강홍립의 협상에 의하여 조공을 조건으로 형제의 매약을 체결하여 정묘 호란은 종결이 되었다.
④ 병자호란
인조 14년(1636) 청(후금) 은 정묘호란 후 국력이 강해지자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하자 조정은 이를 거절 청은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1627).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 성으로 피신하여 45일간 대항하였으나 결국 최명길(주화론자) 의 주장에 의하여 청과 강 화를 맺는다. 이것이 삼전도의 굴복이다. 이 결과 조선은 명과 단교를 하고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청에 대하여 신하로서 예를 지키고 청이 명을 공격할때 원병을 파견할 것을 약속 하였다. 이리하여 소현세자, 봉림대군의 두 왕자가 볼모로 청에 잡혀가고 척화파의 강경론 자인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3학사는 잡혀가 처형을 당했다.
* 북벌론
병자호란때 볼모로 갔다가 돌아온 봉림대군(효종) 은 조선이 당한 치욕을 씻고 국가의 정기를 세우기 위해 북벌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현종 이후 조선의 약한 국력의 현실적인 한계를 인식하여 점차 북벌론의 계획은 수그러들었다. 북벌이 한창중인 때에 Russia가 흑룡강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에 청군은 정벌군을 파견하면서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흑룡강 전투에서 청조선의 련합군은 Russia를 물리쳤다(나선정벌).
* 5군영의 설치
명칭
기능
훈련도감 : 선조 27년(1594)
삼수병 설치(포수, 사수, 살수) : 삼수병은 모두 장번급료병 으로 속오법에 따라 조직.
총융청 : 인조 2년(1624)
경기수비.
수어청 : 인조 4년(16260
남한산성 수비.
어영청 : 효종 2년(1652)
서울방비.(북벌담당)
금위영 : 숙종 8년(1682)
궁중수비
※ 장번급료병 : 대개 군사는 번을 하는 차례가 정해져 있어 16개월 또는 8개월에 한 달씩 복무 하였다. 장번이란 번 차례 없이 계속 번을 드는 것을 의미하며 급료병이란 급료를 받는다는 뜻이다. 조선 초에는 장번은 있 었지민 소수였는데, 훈련도감의 장번급료병은 5000명에 달했다.
* 당쟁의 주도권
선조
동인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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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서인
효종
숙종
서인남인
경종
노론 → 소론
영조
노론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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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쟁의 격화
제 1차 복제문제(예송논쟁) : 숙종 즉위년(1674)
효종의 모후 조대비의 상복문제. 서인(송시 열) : 기년설(1년), 남인(윤휴): 대공설(3년) → 서인집권
제 2차 복제문제 : 숙종
효종의 인선대비의 상복문제. 서인 : 대공설 (9개월), 남인 : 기년설(1년) → 남인집권
경신대출척 : 숙종 6년(1680)
서인이 남인인 허적을 모함하여 남인 축출 → 서인집권
기사환국 : 숙종 15년(1680)
장희빈의 소생인 균의 세자책봉을 둘러싸고 송시열 등이 반대하다 쫓겨남 → 남인집권
갑술옥사 : 숙종 20년(1694)
남인인 민암 등이 민비 복위 문제로 서인을 무고하다 도리어 축출 → 소론 득세
신임사화 : 경종
경종 즉위 후 노론이 집권했으나, 세자책봉 문제로 → 소론 집권
이인좌 난 : 영조
영조의 집권으로 노론이 중용되자 소론인 이인좌 등이 난을 일으킴
* 예송논쟁
1,2차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된 예론논쟁은 한낱 왕실의 장례절차 문제가 아니라 인조 이 래 권력을 독점해온 서인세력과 그에 대항해 권력교체를 추구해온 남인세력 사이의 정치 투쟁이 예론이라 할 수 있다. 1,2차 예송에서 일관되게 국왕의 특수지위보다 주자가례 의 규정을 상위에 두고자 한 것에는 국왕의 국정에 대한 전권 행사를 사실상 부정하는 의 미가 들어 있다. 반면에 남인측의 왕권강화론에는 항상 권력의 주변에만 머물고 집권 세력으로 등장 해보지 못한 소수세력의 처지가 담겨있다. 그러므로 남인은 왕권과의 결합 에 의하여 1,2차 논쟁에서 국왕의 절대적 권위를 일관되게 주장해온 것이다. 결국 예송 에서 남인이 승리했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 경신대출척
1680년 숙종 6년 그 동안 정국실세로 승승장구하던 남인세력이 일시에 축출되는 대파란 즉, 환국이 발생했다. 지난 1674년 현종 15년 예송에서 남인에게 패배, 송시열이 사약을 받는 등 고배를 들어온 서인세력이 남인세력을 완전히 대체, 정국은 일순간 명암이 뒤 바뀌었다. 남인들은 국왕이 자주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왕위를 넘보던 중, 최근 전시사령 부인 도제찰사부에 소속 되 있는 이천의 부대를 반란군으로 삼아 수 차례에 걸쳐 도상 훈 련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허적, 허견과 3복을 포함해 10여명이 사형을 당 했으며 40여명이 처벌됐다. 거의 남인세력은 완전히 축출되다 시피 했다. 이후 1684년 숙종 10년 집권 서인세력이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를 두고 로장파와 소장파 사이에 강 온파 즉,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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