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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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성 프란체스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다음에는 가난한 삶에 대한 회고담을 담았다. 이야기마다 수사들에게는 간접적인 훈계처럼 보였다.
프란체스코는 이제 방식을 바꾸러 직접적인 훈계로 나아갔다. 수사들은 규율에서 명시한 신성한 가난에 따르지 않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신을 위해 교회나 초라한 집이나 다른 어떤 건물이라도 받지 말라는 것이었다. 또 교회나 다른 장소를 위해서든 설교나 자신들의 신체적 박해를 구실로 삼든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어떤 문서라도 담대하게 요청하지 않도록 모든 수사들에게 철저하게 순종하라고 말했다.
그는 초기 수사들이 “안팎으로 기운 겉옷 한 벌과 끈, 그리고 짧은 바지에 만족했다”고 언급하고,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나는 손수 일했고, 아직도 일하길 원하며, 모든 수사들은 정직한 노동에 전념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회고했다. 물론 수사들에게는 학문을 탐구하는 일처럼 다른 일을 하도록 허락했지만, 사실은 제2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 세대가 되면 수도회는 그들의 가난, 겸손,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심오한 학문만 많이 아는 사람들을 배출할 터였다. 프란체스코는 이제 방식을 바꾸어 직접적인 훈계로 나아갔다. 규율에 따라 매일 성무일도를 암송하라고 말했고, 철저히 순종할 것을 엄중히 명했다. 14세기의 한 필사본<성 프란체스코의 작은 꽃들>은 프란체스코가 극단적으로 자기 부정을 갈망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프란체스코가 레오수사에게 진정한 기쁨이란 무엇인가라고 쓰시오 라고 했을 때 레오수사는 참고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진정한 기쁨이고, 선행이며 영혼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기쁨과 같은 맥락인 것 같다.
이듬해 봄 프란체스코의 오핸 조언자인 우골리노 추기경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되었다. 그는 천 번째 업무로 관료 정치적 절차를 통해 프란체스코의 시성 승인 안을 밀어붙였으며, 1228년 7원 사망한 지 2년이 채 못 되어 프란체스코는 공식적인 성인이 되었다. 1230년 5월 프란체스코의 유해는 산 조르조 교회에서 새로운 바실리카, 즉 엘리아스 수사의 지휘 아래 건축된 산 프란체스코 바실리카로 옮겨졌다.
그레고리우스는 프란체스코에게 경의를 표하기에 적절한 크고 화려한 바실리카 건축을 하려했다. 제자들은 프란체스코가 지지하던 모든 것을 완전히 뒤바꾸는 것이라고 느꼈다. 한편 이 건축을 찬성하는 사람들이그레고리우스와 엘리아스 뿐만은 아니었다. 많은 수사들이 이를 자신들의 성스러운 창시자에게 어울리는 성당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상황들은 프란체스코가 예상했던 수도회 내부의 분열의 폭을 넓힐 뿐이었다. 그의 유언은 모든 수사들이 다시금 엄격한 가난에 전념하도록 하려는 시도였다. 이 유언을 그레고리우는 미래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좀 더 온전한 기준을 삼으라고 선언했다.
이후의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역사는 복잡하고 프란체스코의 염려처럼 흘러간다. 영성파라고 불렸던 엄격한 가난 옹호자들과 온건주의자들 사이의 불화가 깊어졌다. 1317년 영성파 들은 교회 당국을 너무 자극하는 바람에 이단자들로 몰려 파면 당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성인다운 인격을 가진 사람의 이상적인 목표를 따라가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극단주의적 과장을 부분적으로 피하고,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교황의 승인을 얻어, 수장을 두고 수도원으로 알려진 프란체스코회의 중심 조직에서 분리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엄수파로 더 잘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일부 엄수파 들은 수도회의 순수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문자 그래도 좀 더 프란체스코의 규율에 따라 살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교황은 그들 역시 독립적인 수도회로 인정해주었다. 우리는 이를 카푸친회 라고 부르며, 오늘날 묵상기도를 강조하는 수도회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프란체스코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는 매우 협소하다. 좀 더 넓게 보자면 프란체스코는 정원에 놓인 조각상의 모습으로 남아 있고 좀 더 진지하게는 현대의 평화와 생태 운동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프란체스코 개인의 깊은 신앙심이나 엄격한 가난에 대한 소면, 또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전적인 헌신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란체스코를 잘 못 이해하고 있다.
우리를 평화로 부르고, 우리를 기꺼이 참여시키려는 목적으로 피조물을 존중하려 했던 프란체스코는 그 자신의 시대에 인간의 가장 난처한 죄악들에 반대하여 말하고 행동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에게도 그러한 도전을 주는 동일한 사람인 것이다. 하느님이라는 화제가 어색하거나 엄격히 한정되어 있는 비종교적인 시대에, 프란체스코의 철저한 경건과 하느님 중독은 오히려 그가 행했던 모든 것을 멀어지게 만든다. 유물론적인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물건에 의해서,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경험에 의해서 인생의 의미와 척도가 계산되는 지금, 맨발에 누더기를 걸친 프란체스코가 우리를 검소함과 가난으로 부르고 있다.
프란체스코는 그와 동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감사와 겸손을 심어주려고 시도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렇게 할 것이며, 우리와 심지어는 우리를 교육해온 결함을 가진 제도를 향해서도 그러한 시도를 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 현대 사회가 프란체스코에 대한 많은 부분을 쓰레기통 같은 역사 속에 던져버리고 싶다 해도, 현대 사회에게 더 좋은 길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중세의 프란체스코다.
프란체스코의 삶은 나에게 많은 도전을 주었다. 맨 처음 나에게 다가온 것은 쓰러져가는 시골예배당에서 프란체스코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하신 말이다. ‘프란체스코야, 가서 내 집을 복구하라. 다 무너지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라는 말인데 이 말을 듣고 그는 성전을 복구하였다. 하지만 주님이 하신 이 말은 성전의 물질적인 복구만이 아닌 쓰러져가는 로마 가톨릭에 대한 복구를 명하신 것 같다. 프란체스코가 이 말을 들을 당시에는 많은 종교개혁 집단들이 생겨났다. 이런 것을 본다면 이 시기의 로마 가톨릭은 처음에 모습과는 다르게 변질되었고, 이런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무너져있는 나의 집을 복구하라고 프란체스코에게 명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란체스코의 일생은 산 다미아노 교회에서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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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3.30
  • 저작시기20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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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95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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