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배체제의 기본질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같이 주대의 종법원리를 매개로 하여 성립한 봉건제도는 기본적으로 혈연관계가 사회적 산분질서를 구성하는 가장
중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러므로 토지를 매개로 보호와 봉사의 계약관계 의에 성립된 서양중세의 봉건제도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2.
주왕실은 제후(諸侯)의 혼인에 관한 원칙으로 동성불혼(同姓不婚)의 원칙을 적용하였던 것같다. 동성불혼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근친결혼(近親結婚)을 제어하는데 목적을 두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동성불혼의 원칙은 예기(禮記)와 갑골문의 해독에 의해 주(周)대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어째든 주왕실이 동성불혼의 원칙을 강조한 사실은 다수의 이성(異姓)제후를 희성(姬姓)의 제후가(諸侯家)와 통혼(通婚)하게 하여 주왕실의 일가로 포섭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로 주왕실은 주왕조를 일가에서 천하로 변모시킬 수 있었다.
3.
종법제도는 원래 부족사회내에서 씨족조직이 발전, 변화되어 체계를 갖춘 종족제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즉 종족은 총(總)본가인 대종을 중심으로 단결하며 그 지파는 소종으로서 대종에게 예속된다. 또한 대종의 상속은 적(嫡)장자에게 우선권이 주어지고 상속자 이외에는 적출(嫡出), 서출(庶出)을 불문하고 모두 별자로 불려지며 각각 소종을 이루게 된다. 이 때 소종의
가격(家格)은 저하되면서 종국적으로는 하급지배층을 양산하는 결과가 된다. 서주(西周)시대에는 이러한 종법제도가 주왕실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적용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종법제에 입각한 혈연중심적 봉건제도는
서주 초에 봉건된 71국(國)중에서 희성제후국이 53개국(70%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사실로서도 확인된다.
4.
은(殷)대에 있어서 그 왕실은 기층을 이룬 여러 족(族)의 연합체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조는 복잡할 수 밖에 없었다. 원래 독립적인 다수의 읍제국가가 연합함으로서 왕조를 구성하는 때의 그것은 불가피한 형태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읍락국가의 군(群)의 무리에서 성장하여 은을 대체한 서주왕조에 있어서 채택하였던 왕실의 구조는 이미 명료하게 달라진 것이었다. 그 왕의 계승법에서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적장자에 상속된 일선적인 왕통에 의존하는 지배체제를 이념으로 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현실적으로는 그 복속제후의 각 읍제국가의 내부에 있어서는 낡은 족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왕조 체제의 침투를 저지하려고 하는 힘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모두 왕과 제후를 결합시키는 이념으로서의 종법개념이 주대에 결쳐 국가지배체제의 기본질서로서 주왕실체제의 요청으로 그 질서의 읍락국가
내부에의 침투와 존속을 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Ⅲ. 소결론
지금까지 종법제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봉건제도와 관련하여 주왕실의 통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 지를 살펴 보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자신의 피를 나눈 사람이 왕이고 자신이 제후라면 왕에 대한 반란의 가능성은 이전의 어떤 다른 사회통치제도보다 적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세대가 지나갈수록 혈연 관계가 약해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며, 이에 따라 왕과 제후의 관계가 이전보다 멀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렇지만 그 관계가 혈연적공감대가 분열되기 전까지는 왕의 통치체제를 뒷받침하는 매우 효과적인 제도였을 것이다.
6 주의 봉건제도
은의 제후국에 불과하던 서방의 주족이 눈부시게 성장, 마침내 은을 멸하고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은의 지배기에 황하 중하류 지역에 그치던 중국적 세계는 북중국 전역으로 확대, 동아시아 최고의 문명권을 이루었다. 중국 위주의 천하관과 화이의 관념이 시작되었고, 천명사상, 혈연 중심의 예문화 등 중국문화의 뼈대가 마련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주족의 시조는 후직이다. 그의 어머니 강원은 들에서 바윙에 새겨진 신의 발자국을 밟은 후, 이상한 기운을 느껴 그를 잉태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삼과 콩을 재배하기를 좋아했는데, 놀랄 만큼 결실이 좋아서 사람들은 그로부터 농사의 기술을 배웠다.
주족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 부근, 비옥한 관중평원에서 농업의 기틀을 닦으면서 성장했다. 이곳은 농경에 적당할 뿐 아니라 천연의 요새이며, 또한 감숙방면으로부터 서방문화가 중국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경로이다. 전국을 통일한 진도 이곳에서 성장했다. 후직의 10대손인 고공단보 때에 기산 아래 주원(기주)에 정착했다. 이곳은 예부터 주의 청동기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곳으로, 주의 명칭도 이로부터 유래한다.
고공단보의 아들 계력 때 주의 국력은 크게 성장, 은의 경계를 사기에 이르렀다. 계력은 은 왕실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그의 아들 문왕은 유명한 태공망 여상의 보필 속에 비약적 발전을 거듭, 은은 서백의 칭호를 주고 이를 회유하려 했다. 문왕 때에 은 정벌의 계획은 이미 수립되었으며, 그의 아들 무왕에 이르러 이 계획은 실현되었다.
마침 은의 주왕이 동방의 대정벌에 나섰다. 기회를 포착한 무왕은 목야의 결전에서 은의 대군을 격파했다. 전쟁에서 패한 주왕은 궁전을 불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흔히 주왕은 아름다운 달기와의 사랑에 빠져 국정을 소흘히 했다고 전해지는데, 은의 계속된 무력정벌과 지배층의 화려한 생활이 은의 국력을 피폐하게 했다. 순장이나 갑골문에 등장하는 각종의 형벌이 말해주듯이, 은 왕실의 잔혹한 지배는 백성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또한 은나라 사람들은 술을 너무 좋아해서 멸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은을 정복한 주는 이를 경계, 음주를 특별히 통제했다.
무왕은 도읍을 호경으로 옮겨 주왕조를 개창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후 주왕실은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주의 지배력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왕이 갑자기 죽고 그의 어린 아들 성왕이 즉위하게 된 것이다. 이때 크게 활약, 주의 지배력을 공고히 한 사람이 무왕의 동생 주공 단이다.
주공은 동방의 거점인 낙읍(하남성 낙양 부근)을 제2의 수도로 건설하고, 은의 잔존세력의 반발을 평정했으며, 3년간의 대 동방원정을 감행하여 주를 명실상부한 중원의 지배자로 부상시켰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이 주대의 종법원리를 매개로 하여 성립한 봉건제도는 기본적으로 혈연관계가 사회적 산분질서를 구성하는 가장
중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러므로 토지를 매개로 보호와 봉사의 계약관계 의에 성립된 서양중세의 봉건제도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2.
주왕실은 제후(諸侯)의 혼인에 관한 원칙으로 동성불혼(同姓不婚)의 원칙을 적용하였던 것같다. 동성불혼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근친결혼(近親結婚)을 제어하는데 목적을 두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동성불혼의 원칙은 예기(禮記)와 갑골문의 해독에 의해 주(周)대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어째든 주왕실이 동성불혼의 원칙을 강조한 사실은 다수의 이성(異姓)제후를 희성(姬姓)의 제후가(諸侯家)와 통혼(通婚)하게 하여 주왕실의 일가로 포섭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로 주왕실은 주왕조를 일가에서 천하로 변모시킬 수 있었다.
3.
종법제도는 원래 부족사회내에서 씨족조직이 발전, 변화되어 체계를 갖춘 종족제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즉 종족은 총(總)본가인 대종을 중심으로 단결하며 그 지파는 소종으로서 대종에게 예속된다. 또한 대종의 상속은 적(嫡)장자에게 우선권이 주어지고 상속자 이외에는 적출(嫡出), 서출(庶出)을 불문하고 모두 별자로 불려지며 각각 소종을 이루게 된다. 이 때 소종의
가격(家格)은 저하되면서 종국적으로는 하급지배층을 양산하는 결과가 된다. 서주(西周)시대에는 이러한 종법제도가 주왕실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적용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종법제에 입각한 혈연중심적 봉건제도는
서주 초에 봉건된 71국(國)중에서 희성제후국이 53개국(70%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사실로서도 확인된다.
4.
은(殷)대에 있어서 그 왕실은 기층을 이룬 여러 족(族)의 연합체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조는 복잡할 수 밖에 없었다. 원래 독립적인 다수의 읍제국가가 연합함으로서 왕조를 구성하는 때의 그것은 불가피한 형태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읍락국가의 군(群)의 무리에서 성장하여 은을 대체한 서주왕조에 있어서 채택하였던 왕실의 구조는 이미 명료하게 달라진 것이었다. 그 왕의 계승법에서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적장자에 상속된 일선적인 왕통에 의존하는 지배체제를 이념으로 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현실적으로는 그 복속제후의 각 읍제국가의 내부에 있어서는 낡은 족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왕조 체제의 침투를 저지하려고 하는 힘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모두 왕과 제후를 결합시키는 이념으로서의 종법개념이 주대에 결쳐 국가지배체제의 기본질서로서 주왕실체제의 요청으로 그 질서의 읍락국가
내부에의 침투와 존속을 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Ⅲ. 소결론
지금까지 종법제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봉건제도와 관련하여 주왕실의 통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 지를 살펴 보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자신의 피를 나눈 사람이 왕이고 자신이 제후라면 왕에 대한 반란의 가능성은 이전의 어떤 다른 사회통치제도보다 적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세대가 지나갈수록 혈연 관계가 약해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며, 이에 따라 왕과 제후의 관계가 이전보다 멀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렇지만 그 관계가 혈연적공감대가 분열되기 전까지는 왕의 통치체제를 뒷받침하는 매우 효과적인 제도였을 것이다.
6 주의 봉건제도
은의 제후국에 불과하던 서방의 주족이 눈부시게 성장, 마침내 은을 멸하고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은의 지배기에 황하 중하류 지역에 그치던 중국적 세계는 북중국 전역으로 확대, 동아시아 최고의 문명권을 이루었다. 중국 위주의 천하관과 화이의 관념이 시작되었고, 천명사상, 혈연 중심의 예문화 등 중국문화의 뼈대가 마련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주족의 시조는 후직이다. 그의 어머니 강원은 들에서 바윙에 새겨진 신의 발자국을 밟은 후, 이상한 기운을 느껴 그를 잉태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삼과 콩을 재배하기를 좋아했는데, 놀랄 만큼 결실이 좋아서 사람들은 그로부터 농사의 기술을 배웠다.
주족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 부근, 비옥한 관중평원에서 농업의 기틀을 닦으면서 성장했다. 이곳은 농경에 적당할 뿐 아니라 천연의 요새이며, 또한 감숙방면으로부터 서방문화가 중국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경로이다. 전국을 통일한 진도 이곳에서 성장했다. 후직의 10대손인 고공단보 때에 기산 아래 주원(기주)에 정착했다. 이곳은 예부터 주의 청동기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곳으로, 주의 명칭도 이로부터 유래한다.
고공단보의 아들 계력 때 주의 국력은 크게 성장, 은의 경계를 사기에 이르렀다. 계력은 은 왕실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그의 아들 문왕은 유명한 태공망 여상의 보필 속에 비약적 발전을 거듭, 은은 서백의 칭호를 주고 이를 회유하려 했다. 문왕 때에 은 정벌의 계획은 이미 수립되었으며, 그의 아들 무왕에 이르러 이 계획은 실현되었다.
마침 은의 주왕이 동방의 대정벌에 나섰다. 기회를 포착한 무왕은 목야의 결전에서 은의 대군을 격파했다. 전쟁에서 패한 주왕은 궁전을 불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흔히 주왕은 아름다운 달기와의 사랑에 빠져 국정을 소흘히 했다고 전해지는데, 은의 계속된 무력정벌과 지배층의 화려한 생활이 은의 국력을 피폐하게 했다. 순장이나 갑골문에 등장하는 각종의 형벌이 말해주듯이, 은 왕실의 잔혹한 지배는 백성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또한 은나라 사람들은 술을 너무 좋아해서 멸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은을 정복한 주는 이를 경계, 음주를 특별히 통제했다.
무왕은 도읍을 호경으로 옮겨 주왕조를 개창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후 주왕실은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주의 지배력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왕이 갑자기 죽고 그의 어린 아들 성왕이 즉위하게 된 것이다. 이때 크게 활약, 주의 지배력을 공고히 한 사람이 무왕의 동생 주공 단이다.
주공은 동방의 거점인 낙읍(하남성 낙양 부근)을 제2의 수도로 건설하고, 은의 잔존세력의 반발을 평정했으며, 3년간의 대 동방원정을 감행하여 주를 명실상부한 중원의 지배자로 부상시켰다. 그러나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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