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당쟁(사림정치, 붕당정치, 조선)의 정의
Ⅲ. 당쟁(사림정치, 붕당정치, 조선)의 발생
Ⅳ. 당쟁(사림정치, 붕당정치, 조선)과 조선정치상황
Ⅴ. 당쟁(사림정치, 붕당정치, 조선)에 대한 인식
1. 당대에도 많은 이론이 나옴
2. 당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Ⅵ. 당쟁(사림정치, 붕당정치, 조선)의 폐해
Ⅶ. 당쟁(사림정치, 붕당정치, 조선)과 지연
Ⅷ. 당쟁(붕당정치)과 공론주도 및 폐모살제
Ⅸ. 당쟁(붕당정치)과 현대정치의 비교
Ⅹ. 결론 및 시사점
참고문헌
Ⅱ. 당쟁(사림정치, 붕당정치, 조선)의 정의
Ⅲ. 당쟁(사림정치, 붕당정치, 조선)의 발생
Ⅳ. 당쟁(사림정치, 붕당정치, 조선)과 조선정치상황
Ⅴ. 당쟁(사림정치, 붕당정치, 조선)에 대한 인식
1. 당대에도 많은 이론이 나옴
2. 당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Ⅵ. 당쟁(사림정치, 붕당정치, 조선)의 폐해
Ⅶ. 당쟁(사림정치, 붕당정치, 조선)과 지연
Ⅷ. 당쟁(붕당정치)과 공론주도 및 폐모살제
Ⅸ. 당쟁(붕당정치)과 현대정치의 비교
Ⅹ. 결론 및 시사점
참고문헌
본문내용
가 그치지 않는다면 조정에 벼슬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 조신(朝臣)들이 서로 공격하니 공론(公論)이 막히고 역당으로 지목하게 되니 선악을 분변(分辨)할 수가 없다. … 공경백관(公卿百官)들은 모두 세록(世祿)의 신하로서 국가에 보답할 도리와 인척간에 화목할 의리는 생각하지 않고 한 조정안에서 공격만을 일삼으니……나라가 장차 어찌되겠는가. 지금 새롭게 중창할 시기를 맞이하여 어찌 구악(舊惡)을 고치고 신정(新政)에 힘쓸 생각이 없겠는가. 유배된 사람들은 금오(金吾)로 하여금 그 경중을 헤아려 대신(大臣)과 함께 등대(登對)소석(疏釋)하도록 하고, 전조(銓曹)는 탕평(蕩平)의 정신으로 수용토록 하라. 지금 나의 이 말은 위로는 종사(宗社)를 위하고 아래로는 조정(朝廷)을 진정하려는 것이니 혹시 이를 의심하거나 기회로 생각하여 소(疏를) 올려 경알(傾軋)한다면 종신토록 금고(禁錮)하여 더불어 동국(同國)할 뜻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여러 신하들이……당습(黨習)을 제거하고 공평(公平)에 돌아가도록 힘쓴다면 어찌 나라를 위할 뿐이겠는가”.
붕당정치로 인한 인재 등용의 문(門)의 차단에 대한 폐해에 대하여 역설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권고하고 있는 글이다. 그럼 붕당정치가 사회에 끼친 영향과 폐단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붕당정치가 끼친 영향에는 성리학의 분파가 있다.
붕당의 정통성은 학적 맥락과 깊이 연관되었다. 붕당을 조성한 사림들은 성리학자들이었고, 그들이 진붕(眞朋)을 자처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에 철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성리학 자체가 이(理)와 기(氣), 보편과 특수, 원론과 현실, 주관과 객관의 문제로 인하여 다양한 해석이 불가피하였고, 학문적 분파가 불가피하였다. 학문적 분파는 붕당의 성립과 더불어 나타났다. 즉, 인간의 도덕적 측면에 보다 관심을 두는 이황과 조식의 주리파와, 경험적 현실 세계를 존종하는 이이와 성혼의 주기파가 그것이다.
주리파는 영남학파라고도 하는데, 주로 동인들이 여기에 속하였고, 주기파는 기호학파라고도 하는데, 주로 서인들이 여기에 속했다. 동인은 다시 분파하여, 이황을 따르는 퇴계 학파와 조식을 쫓는 남명 학파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남인을, 후자는 북인을 형성하였다. 지역적으로 전자는 낙동강 동쪽, 후자는 낙동강 서쪽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서인도 이이를 추종하는 율곡 학파와 성혼을 따르는 우계 학파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주로 노론, 후자는 주로 소론을 구성하였다.
붕당정치가 역사에 끼친 악영향 중 하나는 바로 세도정치로의 정치형태의 변화를 낳았다는 것이다. 붕당간의 대립이 권력의 장악에만 집착하게 되면서 공권력의 위축과 사익(私益)의 확대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 같은 현상은, 학연에 토대한 정통성의 유지보다는 외척의 개입으로 정치의 실권 장악이 주요 목표가 되었기 때문에 통제되었다. 붕당간의 대립이 심해지는 속에서 국왕은 외척에 의지하고자 하였다.
현종 때 김우명(金佑明)이 국구(國舅)로서 실권을 장악한 바 있지만, 외척의 본격적인 정치 간여는 김석주(金錫)때부터였다. 김우명의 조카인 김석주는 경신환국을 주도하면서 병권을 손아귀에 넣고 정국을 자의로 조정하였다. 그 후, 숙종의 외척으로서 광산 김씨의 김만기(金萬基)와 김만중(金萬重), 그리고 여홍 민씨의 민유중(閔維重)과 민정중(閔鼎重)이 중요 요직을 차지한 바 있으며, 민유중의 아들 민진원(閔鎭遠)은 영조 때 노론의 거두로 활약하였다. 여기서 외척가문의 벌열정치(閥閱政治)가 생겨났고 이 정치형태는 우리 나라 역사상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세도정치라는 정치형태가 발생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Ⅶ. 당쟁(사림정치, 붕당정치, 조선)과 지연
한국의 고대에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이 각립(角立)되어 있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다고는 하지만 만주 땅을 잃어버린 꼴이 되었다. 그리고 신라 말에는 다시 신라후고구려후백제로 분립되었다. 신라는 영남세력(嶺南勢力), 후고구려는 기호세력(畿湖勢力), 후백제는 호남세력(湖南勢力)이 기반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분립상태는 오랜 역사를 가진 셈이다. 완전히 다른 나라의 체질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후삼국은 다시 기호세력인 고려에 의하여 재통일되었다. 고려는 정신적으로 기호계인 후고구려를 계승하고 실제적으로는 신라를 계승하였다. 이 때 신라는 고려에 귀순했지만 후백제는 고려에 저항하다가 멸망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는 기호계의 국가로서 신라의 영남세력은 받아들였으나 호남세력은 정권에서 철저히 소외시켰다. 고려 태조 왕건이 자손들에게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에 “차령(車嶺)이남 공주강(公州江) 밖앗 사람은 산형지세가 개성을 향해서 등을 지고 있으니 인심도 또한 그럴 것이다. 이곳 사람들을 관리로 쓰지 말라”고 못 밖은 것이다. 그리하여 왕건의 해군기지가 있던 나주 사람 일부를 제외하고는 호남세력이 정권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다. 이 때부터 정권은 천여 년 동안 기호세력의 차지가 되었고 영남세력은 야당으로 참여하는 형국이 되었다.
고려의 집권층은 크게 왕건을 따라 다니면서 전공을 세운 공신계열, 왕건을 지지한 중부지방의 호족(豪族)세력, 고려에 귀부(歸附)한 신라귀족(진골6두품)세력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중국의 중앙집권적 문치주의를 배우기 위하여 귀화한 중국인들을 일부 기용하였다. 이 중 영남세력은 일찍부터 중국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지식인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최치원최승로김부식 등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기회 있을 대마다 정권에 도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김부식은 윤언이에게, 고려말의 정몽주는 이방원에게 패배하였다.
이 점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김종직김일손은 한명회신숙주에게, 조광조(기호계이나 그의 제자들은 영남계가 많았음)김식은 남곤심정에게 패하였다. 선조대에 사림정치가 실시되면서 영남계의 동인이 우세하여 일시 정권을 잡은 적은 있었다. 그러나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파되어 영남 남인계(경상좌도)의 유성룡은 임진왜란의 책임을 지고 물러 났으며, 영남 북인계(경상우도)의 정인홍은 서인계의 인조반정으로 몰려났다. 그리하여 인조반정 이후에는 영남세력이
붕당정치로 인한 인재 등용의 문(門)의 차단에 대한 폐해에 대하여 역설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권고하고 있는 글이다. 그럼 붕당정치가 사회에 끼친 영향과 폐단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붕당정치가 끼친 영향에는 성리학의 분파가 있다.
붕당의 정통성은 학적 맥락과 깊이 연관되었다. 붕당을 조성한 사림들은 성리학자들이었고, 그들이 진붕(眞朋)을 자처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에 철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성리학 자체가 이(理)와 기(氣), 보편과 특수, 원론과 현실, 주관과 객관의 문제로 인하여 다양한 해석이 불가피하였고, 학문적 분파가 불가피하였다. 학문적 분파는 붕당의 성립과 더불어 나타났다. 즉, 인간의 도덕적 측면에 보다 관심을 두는 이황과 조식의 주리파와, 경험적 현실 세계를 존종하는 이이와 성혼의 주기파가 그것이다.
주리파는 영남학파라고도 하는데, 주로 동인들이 여기에 속하였고, 주기파는 기호학파라고도 하는데, 주로 서인들이 여기에 속했다. 동인은 다시 분파하여, 이황을 따르는 퇴계 학파와 조식을 쫓는 남명 학파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남인을, 후자는 북인을 형성하였다. 지역적으로 전자는 낙동강 동쪽, 후자는 낙동강 서쪽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서인도 이이를 추종하는 율곡 학파와 성혼을 따르는 우계 학파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주로 노론, 후자는 주로 소론을 구성하였다.
붕당정치가 역사에 끼친 악영향 중 하나는 바로 세도정치로의 정치형태의 변화를 낳았다는 것이다. 붕당간의 대립이 권력의 장악에만 집착하게 되면서 공권력의 위축과 사익(私益)의 확대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 같은 현상은, 학연에 토대한 정통성의 유지보다는 외척의 개입으로 정치의 실권 장악이 주요 목표가 되었기 때문에 통제되었다. 붕당간의 대립이 심해지는 속에서 국왕은 외척에 의지하고자 하였다.
현종 때 김우명(金佑明)이 국구(國舅)로서 실권을 장악한 바 있지만, 외척의 본격적인 정치 간여는 김석주(金錫)때부터였다. 김우명의 조카인 김석주는 경신환국을 주도하면서 병권을 손아귀에 넣고 정국을 자의로 조정하였다. 그 후, 숙종의 외척으로서 광산 김씨의 김만기(金萬基)와 김만중(金萬重), 그리고 여홍 민씨의 민유중(閔維重)과 민정중(閔鼎重)이 중요 요직을 차지한 바 있으며, 민유중의 아들 민진원(閔鎭遠)은 영조 때 노론의 거두로 활약하였다. 여기서 외척가문의 벌열정치(閥閱政治)가 생겨났고 이 정치형태는 우리 나라 역사상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세도정치라는 정치형태가 발생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Ⅶ. 당쟁(사림정치, 붕당정치, 조선)과 지연
한국의 고대에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이 각립(角立)되어 있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다고는 하지만 만주 땅을 잃어버린 꼴이 되었다. 그리고 신라 말에는 다시 신라후고구려후백제로 분립되었다. 신라는 영남세력(嶺南勢力), 후고구려는 기호세력(畿湖勢力), 후백제는 호남세력(湖南勢力)이 기반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분립상태는 오랜 역사를 가진 셈이다. 완전히 다른 나라의 체질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후삼국은 다시 기호세력인 고려에 의하여 재통일되었다. 고려는 정신적으로 기호계인 후고구려를 계승하고 실제적으로는 신라를 계승하였다. 이 때 신라는 고려에 귀순했지만 후백제는 고려에 저항하다가 멸망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는 기호계의 국가로서 신라의 영남세력은 받아들였으나 호남세력은 정권에서 철저히 소외시켰다. 고려 태조 왕건이 자손들에게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에 “차령(車嶺)이남 공주강(公州江) 밖앗 사람은 산형지세가 개성을 향해서 등을 지고 있으니 인심도 또한 그럴 것이다. 이곳 사람들을 관리로 쓰지 말라”고 못 밖은 것이다. 그리하여 왕건의 해군기지가 있던 나주 사람 일부를 제외하고는 호남세력이 정권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다. 이 때부터 정권은 천여 년 동안 기호세력의 차지가 되었고 영남세력은 야당으로 참여하는 형국이 되었다.
고려의 집권층은 크게 왕건을 따라 다니면서 전공을 세운 공신계열, 왕건을 지지한 중부지방의 호족(豪族)세력, 고려에 귀부(歸附)한 신라귀족(진골6두품)세력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중국의 중앙집권적 문치주의를 배우기 위하여 귀화한 중국인들을 일부 기용하였다. 이 중 영남세력은 일찍부터 중국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지식인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최치원최승로김부식 등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기회 있을 대마다 정권에 도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김부식은 윤언이에게, 고려말의 정몽주는 이방원에게 패배하였다.
이 점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김종직김일손은 한명회신숙주에게, 조광조(기호계이나 그의 제자들은 영남계가 많았음)김식은 남곤심정에게 패하였다. 선조대에 사림정치가 실시되면서 영남계의 동인이 우세하여 일시 정권을 잡은 적은 있었다. 그러나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파되어 영남 남인계(경상좌도)의 유성룡은 임진왜란의 책임을 지고 물러 났으며, 영남 북인계(경상우도)의 정인홍은 서인계의 인조반정으로 몰려났다. 그리하여 인조반정 이후에는 영남세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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