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머리말
Ⅱ.동학의 시대적 배경
Ⅲ.동학농민전쟁의 전개과정
Ⅳ.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의의
Ⅴ.맺음말
Ⅱ.동학의 시대적 배경
Ⅲ.동학농민전쟁의 전개과정
Ⅳ.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의의
Ⅴ.맺음말
본문내용
학교단은 소극적인 저항에서 벗어나 합법적인 운동을 통해 동학을 공인받고자 했다. 이를 위해 동학교단은 정부로부터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신원을 받음으로써 동학 고인과 포교 자유를 동시에 억기 위해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했다. 먼저 교조신원운동은 조정에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여 공인을 받고자 한 집단적 시위로 나타났다. 교조신원운동은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는 요구(동학포교의 자유를 인정해 달라는 요구와 같은 뜻)와 동학교도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아가는 각 고을 수령의 부당한 행위를 막아줄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교조신원운동은 1892년 10월 공주취회(公州聚會)에서 비롯되었는데, 약 1,000여 명의 교도들이 집결하여 충청감사에게 동학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의송단자(議送單子)를 올려 감사에게서 긍정적 답변을 얻어냈다. 이에 고무된 동학교단 지도부는 1892년 11월 전라도 삼례(參禮)에서 동학교단 지도부가 직접 참여하는 대대적인 집회를 열었고, 전라감사 이경직에게서 동학교도에 대한 부당한 수탈을 금하도록 조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한편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신설과 동학의 공인과 포교 자유의 문제는 중앙 조정의 권한에 속한다는 충청감사와 전라감사의 입장 표명에 따라 동학교도들은 삼례집회 직후인 11월 말부터 서울에 올라가 국왕에게 집단적으로 호소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계획은 해를 바꿔 1893년 2월 9일 이뤄졌다. 그날 40명의 동학 지도자들은 광화문 앞에 엎드려 동학을 공인해 줄 것과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고 3일 밤낮을 호소했다. 그 뿐만 아니라 14일부터는 외국인들을 배척하는 내용을 담은 괘서(掛書)가 교회와 외국공사관, 외국인의 집 담에 나붙기 시작하면서 장안에는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외국인 배척을 내용으로 한 괘서사건의 주도 세력에 대한 견해는 여러 가지이지만 최근 자료에 의하면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출신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주도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광화문 복소와 괘서사건은 외국세력의 간섭과 조정의 강경탄압책으로 실패하고 말았으며 복소를 주도한 동학 지도자들은 모두 체포되거나 수배되었다.
이에 동학교단 지도자들은 당시 동학의 최고지도자 최시형을 찾아가 대응책을 마련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이에 최시형은 전국의 동학교도들에게 통문을 띄워 1893년 3월 10일 최제우가 처형된 날을 기해, 동학 본부가 있는 보은으로 모일 것을 지시했다. 이렇게 하여 보은취회(報恩聚會)가 열리게 되었다. 보은취회는 3월 10일부터 4월 2일 해산하기까지 20여 일 넘게 지속되었다.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 수는 2만 7,000여 명에 이르렀고, 이들은 나라를 혼란시키는 외국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반외세의 깃발을 내건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 보은취회에 호응하기 위해 또 다른 집회가 전라도 금구 원평(院坪)에서 열렸다. 이 집회를 금구취회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집회를 통해 장차 동학농민전쟁을 주도할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지도부가 성정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이 교조신원운동은 동학농민전쟁의 전 단계에 일어난 집단시위운동으로서 동학농민전쟁의 전 단계 투쟁으로서 장차 동학농민전쟁을 주도할 지도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대내 대외적 모순의 심화로 신음하던 민중들의 동향이 폭발 직전의 혁명적 정세에 도달했다는 점, 동학과 일반 민중이 급격하게 결합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겠다.
2.제1차 동학농민전쟁
제1차 동학농민전쟁은 1894년 1월 10일 일어난 고부민란을 계기로 촉발되었다. 고부민란은 1월 10일 전봉준 김도삼 정익서 등의 주도로 고부 농민들이 봉기하여 온갖 폭정을 저지른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어버린 사건을 말한다. 고부민란은 몇 가지 측면에서 종전의 민란과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그 하나는 1892년과 1893년에 일어난 동학교단의 교조신원운동과 고부지방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된 1893년 11월 사발통문 모의계획과 깊이 연관되어 일련의 연속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1월 10일에 시작하여 3월 13일 완전 해산하기까지지 무려 두 달 동안 지속되는 장기 지속성을 보여준다. 또 전봉준을 비롯한 강력한 민요 지도부가 조직되고, 각 마을에서 참여한 농민들을 민군으로 조직하고 무장시키는 등 강력한 조직성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즉, 연속성, 장기 지속성, 조직성의 측면에서 다른 민란과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본격적인 동학농민전쟁은 고부민란을 주도한 전봉준 등 지도부가 고부민란을 수습하고 진정시키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李容泰)의 가혹한 탄압에서 비롯됐다. 이를 견디지 못한 동학농민군은 3월 13일 무장으로 피신했다가, 무장대접주 손화중의 도움을 받아 3월 21일 전면적으로 봉기하면서 제1차 동학농민전쟁이 시작되었다. 전라도 무장에서 전면적으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창의문을 발표하고 3월 23일경 고부를 점령했으며, 3월 25일경에는 백산(白山)으로 이동하여 각지에서 참가한 농민군으로 진영을 확대 개편했다. 또 호남창의대장소라는 이름으로 격문을 발표하여 민중들의 봉기와 호응을 촉구했고, 4대 명의(名義)와 행동강령 12개조를 발표하여 군율을 정했다. 4월 7일 새벽에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격파한 뒤에는 전라도 서남 해안으로 기수를 돌려 정읍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 등으로 차례로 점령했으며, 4월 23일 장성 황룡촌에서는 홍계훈(洪啓薰)이 이끄는 경군(京軍)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4월 27일에는 호남의 수부인 전주성을 점령하고 5월 7일에는 경군과 전주화약을 체결하여 이튿날 자진 해산했다. 이 전주화약을 계기로 동학농민군들은 자신들의 고을로 돌아가 폐정개혁을 단행했다.
동학농민군들이 전라도 각 고들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한 시기부터 이른바 집강소통치기라 부르며 이는 새 전라감사로 부임한 김학진과 전봉준이 담판을 벌이면서 가속화되어 몇 개 고을을 제외한 전라도 전역에 설치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
한편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신설과 동학의 공인과 포교 자유의 문제는 중앙 조정의 권한에 속한다는 충청감사와 전라감사의 입장 표명에 따라 동학교도들은 삼례집회 직후인 11월 말부터 서울에 올라가 국왕에게 집단적으로 호소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계획은 해를 바꿔 1893년 2월 9일 이뤄졌다. 그날 40명의 동학 지도자들은 광화문 앞에 엎드려 동학을 공인해 줄 것과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고 3일 밤낮을 호소했다. 그 뿐만 아니라 14일부터는 외국인들을 배척하는 내용을 담은 괘서(掛書)가 교회와 외국공사관, 외국인의 집 담에 나붙기 시작하면서 장안에는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외국인 배척을 내용으로 한 괘서사건의 주도 세력에 대한 견해는 여러 가지이지만 최근 자료에 의하면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출신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주도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광화문 복소와 괘서사건은 외국세력의 간섭과 조정의 강경탄압책으로 실패하고 말았으며 복소를 주도한 동학 지도자들은 모두 체포되거나 수배되었다.
이에 동학교단 지도자들은 당시 동학의 최고지도자 최시형을 찾아가 대응책을 마련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이에 최시형은 전국의 동학교도들에게 통문을 띄워 1893년 3월 10일 최제우가 처형된 날을 기해, 동학 본부가 있는 보은으로 모일 것을 지시했다. 이렇게 하여 보은취회(報恩聚會)가 열리게 되었다. 보은취회는 3월 10일부터 4월 2일 해산하기까지 20여 일 넘게 지속되었다.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 수는 2만 7,000여 명에 이르렀고, 이들은 나라를 혼란시키는 외국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반외세의 깃발을 내건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 보은취회에 호응하기 위해 또 다른 집회가 전라도 금구 원평(院坪)에서 열렸다. 이 집회를 금구취회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집회를 통해 장차 동학농민전쟁을 주도할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지도부가 성정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이 교조신원운동은 동학농민전쟁의 전 단계에 일어난 집단시위운동으로서 동학농민전쟁의 전 단계 투쟁으로서 장차 동학농민전쟁을 주도할 지도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대내 대외적 모순의 심화로 신음하던 민중들의 동향이 폭발 직전의 혁명적 정세에 도달했다는 점, 동학과 일반 민중이 급격하게 결합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겠다.
2.제1차 동학농민전쟁
제1차 동학농민전쟁은 1894년 1월 10일 일어난 고부민란을 계기로 촉발되었다. 고부민란은 1월 10일 전봉준 김도삼 정익서 등의 주도로 고부 농민들이 봉기하여 온갖 폭정을 저지른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어버린 사건을 말한다. 고부민란은 몇 가지 측면에서 종전의 민란과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그 하나는 1892년과 1893년에 일어난 동학교단의 교조신원운동과 고부지방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된 1893년 11월 사발통문 모의계획과 깊이 연관되어 일련의 연속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1월 10일에 시작하여 3월 13일 완전 해산하기까지지 무려 두 달 동안 지속되는 장기 지속성을 보여준다. 또 전봉준을 비롯한 강력한 민요 지도부가 조직되고, 각 마을에서 참여한 농민들을 민군으로 조직하고 무장시키는 등 강력한 조직성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즉, 연속성, 장기 지속성, 조직성의 측면에서 다른 민란과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본격적인 동학농민전쟁은 고부민란을 주도한 전봉준 등 지도부가 고부민란을 수습하고 진정시키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李容泰)의 가혹한 탄압에서 비롯됐다. 이를 견디지 못한 동학농민군은 3월 13일 무장으로 피신했다가, 무장대접주 손화중의 도움을 받아 3월 21일 전면적으로 봉기하면서 제1차 동학농민전쟁이 시작되었다. 전라도 무장에서 전면적으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창의문을 발표하고 3월 23일경 고부를 점령했으며, 3월 25일경에는 백산(白山)으로 이동하여 각지에서 참가한 농민군으로 진영을 확대 개편했다. 또 호남창의대장소라는 이름으로 격문을 발표하여 민중들의 봉기와 호응을 촉구했고, 4대 명의(名義)와 행동강령 12개조를 발표하여 군율을 정했다. 4월 7일 새벽에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격파한 뒤에는 전라도 서남 해안으로 기수를 돌려 정읍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 등으로 차례로 점령했으며, 4월 23일 장성 황룡촌에서는 홍계훈(洪啓薰)이 이끄는 경군(京軍)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4월 27일에는 호남의 수부인 전주성을 점령하고 5월 7일에는 경군과 전주화약을 체결하여 이튿날 자진 해산했다. 이 전주화약을 계기로 동학농민군들은 자신들의 고을로 돌아가 폐정개혁을 단행했다.
동학농민군들이 전라도 각 고들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한 시기부터 이른바 집강소통치기라 부르며 이는 새 전라감사로 부임한 김학진과 전봉준이 담판을 벌이면서 가속화되어 몇 개 고을을 제외한 전라도 전역에 설치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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