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와 나혜석 그리고 까뮤에 끌로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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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프리다 칼로와 나혜석 그리고 까뮤에 끌로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프리다 칼로.
- 그녀의 어린시절
- 평생의 고통을 가지게된 교통사고
- 디에고 리베라와 만남
- 위대한 미술가 프리다 칼로
- <참고자료 , 그림>
나혜석
- 어린 시절과 일본에서의 유학
- 시대와는 달랐던 그녀의 연애
- 외로웠던 마지막
- <참고자료 , 그림>
까뮤에 글로델
- 사랑받지 못한 어린시절
- 사랑했던 사람이자 적이 되어버린 로댕과의 만남
- 다시 한 번 버림받은 까뮤에 클로델
- <참고자료 , 그림>

본문내용

녀의 그림과 편지들로 만들어진 (나... 프리다 칼로)라는 책을 읽어보았는데 16살이라는 어린나이에도 그녀의 첫사랑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 에게 보낸 편지들은 그녀가 사랑에 얼마나 열정적이였고 성숙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편지 중간 중간에 그림을 그려 넣었기도 했고 \'사람들 몰래 키스 오케이?\' \'어느 때보다도 더 너를 사랑하는 아가씨\' 라는 추신문구를 써넣었는데 많지 않은 어린나이에도 매우 도도하고 당찬 성격임을 알 수 있게 했다. 사고 후에 알레한드로의 부모가 그를 독일로 유학을 보냄으로 그들의 사랑은 끝이 났지만 후에도 그들은 종종 편지를 주고받으며 친구의 인연을 지속해 나갔다.
<평생의 고통을 가지게 된 버스사고 >
열여덟 살 때 알레한드로와 하교 중에 일어난 버스사고는 그녀의 삶을 평생 동안 짓이겨 놓을 만큼의 매우 큰 사고였는데 열여덟 어린 소녀의 몸을 승객용 손잡이가 달려있던 긴 쇠파이프가 몸 한복판을 관통하였다. 그 파이프는 옆 가슴을 뚫고 들어와 골반을 통해 이어진 허벅지를 뚫고 나왔다 당시의 발달되지 않은 외과수술로 인해서 그녀는 평생 무려 32번이라는 대수술 받게 되었다. 이러한 불구의 몸으로 살았지만 그녀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독특한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사고 후 몇 달 동안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에 누운 채로 지내야 했는데 그때를 시작으로 그녀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침대에 누워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하며 그녀의 화가인생은 시작되었다. 프리다의 작품은 이러한 그녀의 고달픈 인생을 대변하듯 그녀가 살면서 겪어온 신체적 고통이 매우 많이 담겨있다. 그녀의 성격은 성숙하고 단호했으며 불같은 기질과 공격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침대에서 그림을 그리며 신문과 잡지를 통해 멕시코의 현실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뜨거운 혁명에 관심을 보였다. 이는 후에 그녀의 정치적인 성향을 보여주는데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퇴원 후 에도 그녀는 코르셋과 목발에 의의지해 걸었지만 다시 국립 예비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했다.
<디에고 리베라와의 만남>
1926년 그녀는 자신의 그림을 그 시대에 꽤 이름이 나있던 벽화 예술가였던 디에고 리베라 에게 자신의 그림평가를 부탁했다. 디에고 리베라는 멕시코 벽화운동의 거장이며 멕시코 역사를 그린 벽화 총 116점을 남긴 신화적인 존재 이다. 디에고는 멕시코 고유의 색감과 영감을 벽화로 제작하여 민중적이면서도 인디오적인 원시성을 과감하게 그려낸 화가이다.
멕시코의 전통과 대통령 궁에 그린 벽화는 멕시코의 현재와 과거를 모두 담고 있다.
아즈텍 고대 문명에서부터 인디언들의 모습, 빵과 자유와 땅을 외치는 혁명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멕시코의 400년 역사가 그대로 그려져 있다. 벽화는 문맹률이 높았던 멕시코 국민들이 가장 쉽게 사를 배울 수 있는 교육수단이 되었다.
이렇게 멕시코 벽화 미술의 거장이었던 디에고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디에고는 마침 1923년 멕시코 시티 국립 예비학교에서 교육부가 주문한 프레스코 벽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당당하고 확신에 찬 그녀의 모습을 보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1927년 그 와 함께 벽화운동을 추진했던 오로스코, 시케이로스와 함께 공산당 집행위원회에 선출되었고 신랄한 농담과 함께 대중을 매로 시켰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가 만나 사랑을 시작하게 된 때가 바로 이 때였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녀 또한 디에고에 대한 사람과 흠모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아직 젊은데다가 고통 속에서 터득한 그녀만의 지혜에 매우 빠져들게 되었다. 그 후에도 계속된 만남에 의해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1926년 21살 이라는 엄청난 나이차와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만큼 어울리지 않은 다는 말들을 극복하고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녀는 디에고와의 결혼생활을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일생동안 나는 두 번의 심각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첫 번째는 나를 부스러뜨린 천자입니다. 부서진 척추는 20년 동안 움직이지 않았고 두 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 와의 만남입니다.\" 이러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프리다와 여성편력이 매우 심했던 디에고 리베로와의 결혼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만은 않았다. 디에고는 매우 자유분방한 성적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예술과 혁명의 끈으로 부딪히는 위기를 극복하고 서로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면서 예술의 동반자로 지냈다. 그녀는 어릴 때의 끔찍한 교통사고로 인해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슬퍼했었는데 후에 디에고 의 아이를 3번이나 가졌으나 불행하게도 매번 고통스러운 유산을 겪어야 했다. 그녀는 임신과 출산에 대해 매우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그녀가 그린 (나의탄생 ,1932년) (떠있는 침대 ,1932년) 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출산에 욕심을 내고 아이를 원했는지를 알 수 가 있다.
그녀는 디에고 리베라를 자신보다 더욱 더 사랑했는데 이는 그녀를 더욱더 외로움과 끝없는 고독에 빠지게 하였다. 어느 날 그녀는 디에고가 그녀가 가장사랑하고 아꼈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부적절한 관계임을 알고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된다. 디에고의 다른 여자들과의 끈임 없는 외도와 수많은 상처를 이겨내던 프리다 였지만 여동생과 디에고의 관계는 어느 사람이나 그렇듯이 정말이지 이겨낼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남편의 외도로 인해 분노에 찬 프리다가 머리를 싹둑 자르고 양복을 입은 모습은 (짧은 머리 자화상)으로 표현된다.
그 후 프리다는 충격으로 인해 뉴욕으로 가서 생활을 하게 되는데 뉴욕에서 생활하는 동안 프리다는 큰 충격에 의해 방탕한 생활과 외로움 속에서 지내게 된다. 매일매일 술과 담배 게다가 성정체성에 혼란을 주는 동성애를 즐기기도 했다. 그런 생활 중 에도 그녀는 자신의 모국인 멕시코를 매우 그리워했다. 결국 다시 멕시코로 돌아와 디에고와는 이혼을 하게 된다. 디에고와 이혼 후에도 친구로서 동료로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몇 년 후 다시 재결합을 하게 된다. 그녀의 그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잔인하고 생명의 탐구와 상처 고독감을 나타낸다. 그것은 바로 프리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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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4.28
  • 저작시기20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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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05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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