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사건과 12.12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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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사건과 12.12사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0.26사건⊙
1. 주요인물
2. 사건개요
3. 사건내용

⊙12.12사태⊙
1. 주요인물
(1) 신군부 세력
(2) 기존세력
2. 사건개요
3. 사건내용

본문내용

로 연행한 인물
허화평 - 대령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육사17기
청와대 수석비서관
보안사에서 도감청을 지휘하면서 육본측의 움직임을 파악
정도영 - 대령 보안사 정보처장 육사 14기
허화평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면서 수도권 근위부대 지휘관들을 설득하는 역활
성환옥 - 대령 헌병지휘관 육사 14기
정승화 총장의 강제연행에 따른 총장공관 무력진압
이종민 - 중령 33헌병대장 육사 18기
성환옥 대령과 동일임무 수행
장세동 - 대령 수경사 30경비단장
안기부장
30경비단을 12.12사태의 지휘부로 활용케 함
김진영 - 대령 수경사 33경비단장
육참총장
수경사의 신군부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던 전차대대를 설득 회군시킨 인물
신윤희 - 중령 수경사 헌병부단장 육사18기
장태완 장군의 체포를 직접 실행
2. 기존세력
정승화 - 대장 육군참모총장 육사5기
1979년 12월 13일 자로 강제전역
김종환 - 대장 합참의장
1979년 12월 13일 자로 강제전역
윤성민 - 중장 육군본부 육군참모차장
1군사령관으로 강등
문홍구 - 중장 합동참모본부장
1979년 12월 26일 자로 보직해임
이건영 - 중장 3군사령관
1979년 12월 17일 자로 보직해임
김학원 - 중장 1군사령관
1979년 12월 23일 자로 보직해임
하소곤 - 소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보직해임
장태완 - 소장 수도경비사령관 육군종합학교
1979년 12월 13일 자로 강제전역
정병주 - 소장 특전사령관 육사9기
1979년 12월 13일 자로 강제전역
김진기 - 준장 육군본부 헌병감
1979년 12월 20일 자로 강제전역
윤흥기 - 준장 9공수여단장 육군종합학교
-사건개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이다. 10, 26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살해된 후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간에는 사건수사와 군인사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 등의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 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1월 중순 국방부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 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 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다. 한편, 총장의 연행에 저항할지도 모르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연회 도중 총장의 연행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 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진전은 당시의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도록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2, 12사태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93년 초까지 12, 12사태는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으나, 그 후 김영삼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사건내용-
1.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의 강제연행
실질적 육군 정식계통의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정승화 총장의 체포를 위하여 반란군측은 사전에 이학봉 중령(육사 18기 \'하나회\' 합수부 수사 제1국장)이 수일간 정총장의 동정을 살핀 후 3가지의 안(총장실에서 체포, 이동 중 노상에서 체포, 총장공관에서 체포)을 심의 한 결과 3안을 채택하여 12.12일에 총장공관에 우경윤대령, 성환옥대령, 허삼수 대령 등과 함께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33헌병대 1개중대병력을 불법으로 출동시켜 총장공관의 경비 헌병과 공관부 외곽 및 정문을 경비하는 해병경비대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이 과정에서 총기를 발사하면서 정총장을 강제 연행 하였다. 이 과정에서 반란군 측 보안사 합수부측 김대균, 한길성 소령과 박원철 원사 등 3명은 총장 부관실에 있는 이재천 총장수행부관과 김인선 총장경호장교 등에게 불법적으로 총기를 난사하여 중상을 입히는 등 아군에게 총기를 사용하는 불법을 저질렀다.
2. 진압군 측 주요 지휘관의 격리작전
반란군의 수괴인 전두환 소장은 반란에 장애가 되는 진압군 측 지휘관들을 예하 부대와 격리시키기 위하여 거사 당일인 12.12 저녁 6시30분까지 수도권 주요 대전복부대 핵심 지휘관인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육군소장과 특전사령관인 정병주 육군소장, 김진기 육본 헌병감등을 전두환의 자택인 연희동으로 저녁식사 초대로 유인하였으나 식사도중 정총장의 납치사건이 전해지면서 격리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3. 반란군측 지휘소 설치
전두환 소장은 직접 또는 노태우 9사단장과 허화평 비서실장으로 하여금 유사시 병력동원 등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세력인 유학성(국방부 군수차관보), 황영시(제1군단장), 차규헌(수도군단장), 박준병(제20사단장), 백운택(제71훈련단장), 박희도(제1공수여단장), 최세창(제3공수여단장), 장기오(제5공수여단장), 장세동(수경사 제30경비단장), 김진영(수경사 제33경비단장)등에게 진압군측 지휘관 유인시간인 거사당일 6시30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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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10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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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09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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