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불교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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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 불교 조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은 상태로 법당의 주존불로 봉안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상의 내부에는 두텁고 날카로운 철못이 단을 이루며 촘촘히 박혀 있는데, 이것은 틀잡이용 철못으로 주조할 때 겉틀과 안틀이 서로 붙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철못을 많이 사용할수록 불상의 두께가 일정해지는 장점이 있는 반면, 기포가 많이 생겨 주조 후 표면이 매끄럽지 못하게 되는 단점도 함께 지니고 있다. 적당한 야의 철못 사용이 철불 주조 성공률의 관건이자, 기술이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소조불은 삼국시대부터 꾸준히 만들어졌지만 내구성이 얏하기 때문에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현존하는 것도 대부분 소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의 소조여래좌상이 고려시대의 목조 건축물로 유명한 부석사 무량수전에 남아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은 현존하는 소조불로는 가장 크고 또한 아름답다. 일반적으로 무량수전에는 아미타여래가 주존으로 봉안되는데, 이 불상이 모셔져 있는 전각이 무량수전이기에 불상도 아미타불로 추정하고 잇다. 그러나 이 불상이 석가여래의 극적인 성도 순간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맺고 있고, 무량수전의 건립보다 불상이 200여 년 이상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건물의 명칭만으로 아미타여래라고 단정짓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머리엔 나발이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어 매우 울퉁불퉁하다. 머리 위에 상투처럼 올라온 윤곽이 뚜렷하며, 머리와 육계의 경계 부분 중앙에 원형의 계주장식이 있다.
이 계주는 통일 신라 후기 불상에서부터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여, 고려시대가 되면 일반화되는 형식이다. 따라서 이 계주는 불상의 제작 연대를 판가름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풍만한 얼굴에 눈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가고 입은 꼭 다물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구 귀도 활처럼 길게 휘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당당한 결가부좌의 자세에는 부처의 위엄이 서려 있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있는 대의에는 도드라진 옷 주름을 일률적으로 새겼으나 얇게 몸에 밀착되어 몸의 굴곡이 완연히 드러난다. 불상의 뒤로는 불꽃무늬와 당초무늬가 화려하게 맞새김된 목조 광배를 갖추고 있다. 이처럼 부석사 소조불은 석굴암 본존불 이후부터 유행한 편단우견 착의법을 하고 항마촉지인을 한 여래좌상의 전통을 그대로 까르고 있으면서도, 석굴암 본존보다 훨씬 잘룩한 허리 표현으로 인해 상전체에 긴장감이 감돈다. 또한 높고 뚜렷하게 솟은 육계, 중앙 계주의 표현, 길쭉한 얼굴 유연성이 뛰어난 소조불임에도 불구하고 딱딱한 느낌을 주는 옷주름 등에서 새로운 양식이 도래하였음을 보여준다.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충남 논산국 은진면 관촉사에는 높은 보관을 쓴 석조보살입상이 있다.
고려시대 전반 충청도 지역에서는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이나 개태시 석조삼존불입상과 같이 거대한 불상을 만드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 불상도 그중하나이다.
관촉사에 대해서는 [신중동국여지승람]과[관촉사사적비]에 자세하게 적혀 있어 창건 연대나 배경을 알 수 있다. 즉, 승 혜명을 비롯한 100여 명이 고려 광종 21년(970)부터목종9년(1006)까지 약37년간 관촉사를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이 불상도 관촉사가 건립될 때 함께 만들어졌다. 머리 위에 높은 원통형 보관을 썼는데, 그 위에 다시 이층의 사각형 보개가 올려져 있다. 이 이층 보개는 옛날 왕이 썼던 면류관을 연상시킨다. 현재는 없어졌으나 보관 정면에 금동으로 만든 여래입상이 있었다고 한다. 얼굴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참외형이며, 둥그런 양미간 가운데는 커다란 백호가 마간의 선을 따라 눈이 길게 표현되어 위엄 있어 보인다.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구품인을 맺고 있으며, 오른손에 철제연화가지를 잡고 있다. 옷주름은 몸에 밀착하여 U자꼴로 흘러내리고, 천의도 두툼한 띠로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별로도 조각하지 않고 자연 암반을 그대로 이용하였는데. 이시기의 다른 대형 석불들도 그 크기 때문인지 별도의 대좌를 만들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 많다.
관촉사 보살입상은 일반 사람들에게 은진이라는 지명이 붙여진 ‘은진미륵’ 으로 더 유명하다. 그러나 이 보살상은 미륵이 아니라 관음보살이다. 보관에 있었던 화불과 아미타구품인을 맺은 수인이 이를 증명해준다.
한송사 석조보살좌상
지금의 강원도 지역은 통일신라시대 이후부터 명주 지방으로 불리며, 독특한 문화를 형성해왔던 곳이다. 고려시대가 되면 이 지역 문화의 독창성은 절정에 다다르게 되며, 그런 배경 속에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작품이 높은 원통형 보관을 쓴 보살상이다. 한송사 석조보살좌상 역시 월정사 팔각구층탑 앞 보살상, 강릉 신복사터 보살상과 더불어 명주 지역 불상 양식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보살상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한일 회담 이후 문화재 반환 협정에 의해 되돌아오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던 상이다.
머리에는 매우 특이한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고, 이마에 커다란 백호 자국이 남아 있다. 통통하게 살찐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고 목에는 커다란 목걸이를 착용하였다. 양 어께를 여러번 휘감은 천의는 그 끝자락을 왼쪽 어깨에서 매듭지었는데, 이는 다른 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징적인 요소이다. 수인은 두손의 검지만을 곧게펴 서로 교차하여 무언가를 가르키고 있는데, 그 의미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전체적으로 둥글고 아주 부드러운 느낌이 강한데, 이는 대리석이라는 돌의 질감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당시 명주 지역 불상의 특징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통일신라 후기에 처음 등장한 뒤 고려 초기까지 유행했던 철불은 고려적인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되고 정치문물 제도가 완비되는 고려 중기에 이르러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이를 대신하여 대형의 금동불이 다시 무대에 등장하고 목조불상이나 건칠불이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다. 이 같은 현상은 당시 귀족적인 문화 분위기 속에서 제작 공정이 까다로운 철불보다 좀더 다루기 쉽고 정교한 조각이 가능한 소재가 불상의 재료로 선호되었기 때문이다. 중앙집권체제의 완성으로 든든해진 재정적 후원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이러한 추세 속에도 특정지역에서는 여전히 철불에 대한 선호도가

키워드

고려,   불교,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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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4페이지
  • 등록일2010.05.13
  • 저작시기2005.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1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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