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도입
2) 분석-1
3) 분석-2
3) 결론
2) 분석-1
3) 분석-2
3) 결론
본문내용
부터 환랑을 겪게하여 능하지 못한 것을 잘 하게 키워주었고, 또 나를 일찍부터 활 쏘고 말 달리는 전쟁일에 익숙하게 하였고 또 다른 나라(청)에 들어가 있게 하여 그 세와 산천과 도로사정을 잘 알게 하였고 또 나를 저 나라(청)에 오래 있게 하여 두려워 하는 마음이 없게 하였다\"
\"나는 10년을 기한으로 삼았으니 하늘이 10년만 더 살게 해 준다면 이기든 지든간에 한 번 시도할 것이다. 만약 10내에 이루지 못하면 뜻과 기운이 점점 쇠약해서 다시는 가망이 없
을 것이오\"
\"저 오랑캐는 반드시 망할 형세다. 먼저번 칸(청나라 황제) 때는 매우 번성하였으나 지금은 점점 소모되었고 인재도 없고 군비도 소홀히 하고 중국의 일을 모방하려 하니 이것이 오랑캐가 점점 쇠하고 미약해진다는 것이다. 오랑캐의 정세는 내가 오랫동안 살펴 보았도다. 정예한 포수병 10만을 양성하여 사랑하기를 자식과 같이 하면 모두 용감히 죽을 수 있는 병
사로 만들 수 있다. 그런 뒤에 그 틈을 기다려 곧장 쳐들어가면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리
하여 곧장 만주벌판으로 나아가면 중원의 호걸들이 어찌 메아리처럼 웅하는 자가 없겠는가? 오랑캐는 군비를 제대로 하지 않아 요동과 만주지역에 활을 잡고 말을 탄 자가 전혀 없으
니 무인지경과 다름없다. 또 우리나라의 포로가 몇 만명이나 되니 어찌 돕는 자가 없겠는가? 지금은 하지 않음을 걱정해야지 그 이루기 어려움을 걱정할 때는 아닌 듯 하오.\"
효종은 흔히 북벌론의 대명사로 많이 알려져 있죠
북벌론이라는 자체가 현재 국민들의 구미에 맞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얼마나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북벌론으로서의 명분과 국력부강이라는 실제와는 엄연한 차이가 있죠
저는 개인적으로 효종에 대해 몇가지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의 과오중 하나는 무리한 북벌 추진입니다
호란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여서 무리하게 북벌을 추진했다는 자체가
문제가 있습니다.북학파인 박지원이 허생전 말미에서 허생이 효종 당시
어영대장 이완을 만나는 자리에서 허생은 이러한 점을 통렬히 지적합니다.
그 당시의 상황은 국력의 충실이 더욱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두번째는 소위 서인계 산림을 정권으로 불러드린 장본인이라는 점입니다
당시 산림의 양 거두인 송시열, 송준길을 정권으로 불러드려 자신의 북벌론에
대한 정치적 뒷받침을 하게 하였습니다. 송시열이 현종, 숙종조의 당쟁에
중심점에 있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선비들이 죽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효종의 안목을 한번쯤 의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효종이 송시열을 정계로 초빙한 것은 자신의 왕위 승계에 치명적 결함이 있는
것을 보충하기 위해 한 것이고 무리하게 북벌론을 핀 것도 효종의 이러한
컴플렉스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죠. 원래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들이
생존해 있는 것에도 불구하고 두번째 아들인 봉림대군에게 승계되었으니 조선이
유교국가라는 것을 감안할 때 엄청난 결함이죠
효종의 이러한 컴플렉스는 김홍욱이 억울하게 죽은 강빈의 신원을 상소하자 그를
장살한 것에서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명분을 중요시하는 당시 산림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자 효종은
이들을 포용하는 수단으로 송시열 등 산림을 정계로 초빙한 것이죠
소현세자가 볼모로 청나라에 잡혀갔을 때 외부 문물 표용의 의지가 강했고 (결국
그것 때문에 죽었지만) 당시 청나라 정가에서 그가 인기가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봉림대군보다는 그의 역량이 더 크다고 판단합니다
ㅡ북학론의 입장을 띠는 소현세자와 박지원의 북학론이 상통함.
봉림대군이 아니라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우리나라는 더 발전했을 것.
서양 열강에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김자점 역모사건으로 친청 세력을 모두 제거한 효종은 이완, 유혁연, 원두표 등의 무장을 중용하여 북벌을 위한 본격적인 군비 확충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런 집념 어린 군비 확충 작업은 번번이 재정적 어려움에 부딪쳐 중단되곤 하였다. 그리고 지나치게 군비 확충에만 주력한 나머지 민생을 곤란하게 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한편 효종의 이런 국방 강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벌의 기회는 좀처럼 포착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청나라의 세력이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다. 효종은 평생을 삼전도의 치욕을 되새기며 북벌에 집념하여 군비 확충에 전력을 쏟은 군주였으나 국제 정세가 호전되지 않았고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부족하여 때로는 군비보다도 현실적인 경제 재건을 주장하는 조신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결국 효종은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ㅡ북벌론의 허구성을 주장하는 박지원의 근거
d. 효종이후 조선의 정치적 상황
예송논쟁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나라를 다스리는 정책의 견해 차이가 아니라 효종의 장례와 대왕대비인 조 대비의 복상문제라는 사소하게 보이는 문제이었지만, 성리학을 치국이념으로 삼은 조선으로서는 성리학에 근거한 오례가 국가정책 이상의 중요성 있는 사안으로 남인 윤휴(白湖 尹휴 : 1617∼1680)의 3년설과 서인의 거두인 우암의 1년설의 대립, 이른바 \'1차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현종은 효종의 아들로써 병자호란 이후 효종이 볼모로 잡혀있던 시절에 중국 선양에서 태어 났으며 인조22년 조선으로 귀국. 효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어 효종이 재위 10년만에 죽자 1659년 즉위하였다. 당파싸움에 원인 및 발화점이 된 효종의 복상문제를 두고 남인은 3년설을 서인은 기년설(1년상)을 주장하였다. 이 때 현종이 기년설 주장을 들어주어 결국 서인이 집권하게 되었다.
하지만 남인파인 허적을 영의정에 유임시켜 남인의 재기 발판을 마련 해 주던 중 또 다시 1674년 어머니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왕실 상례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대립하였지만 이번에는 현종이 남인파의 손을 들어 주므로써, 서인 집권이 무너지고 남인이 집권하는 정권이 열렸지만 그 뒤에도 서인은 남인에 대한 안 좋은 소문를 퍼뜨리고 반란을 남인이 일으킨다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인파의 내분이 일어나도록 부채질하였다. 결국 현종은 벼슬에서
\"나는 10년을 기한으로 삼았으니 하늘이 10년만 더 살게 해 준다면 이기든 지든간에 한 번 시도할 것이다. 만약 10내에 이루지 못하면 뜻과 기운이 점점 쇠약해서 다시는 가망이 없
을 것이오\"
\"저 오랑캐는 반드시 망할 형세다. 먼저번 칸(청나라 황제) 때는 매우 번성하였으나 지금은 점점 소모되었고 인재도 없고 군비도 소홀히 하고 중국의 일을 모방하려 하니 이것이 오랑캐가 점점 쇠하고 미약해진다는 것이다. 오랑캐의 정세는 내가 오랫동안 살펴 보았도다. 정예한 포수병 10만을 양성하여 사랑하기를 자식과 같이 하면 모두 용감히 죽을 수 있는 병
사로 만들 수 있다. 그런 뒤에 그 틈을 기다려 곧장 쳐들어가면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리
하여 곧장 만주벌판으로 나아가면 중원의 호걸들이 어찌 메아리처럼 웅하는 자가 없겠는가? 오랑캐는 군비를 제대로 하지 않아 요동과 만주지역에 활을 잡고 말을 탄 자가 전혀 없으
니 무인지경과 다름없다. 또 우리나라의 포로가 몇 만명이나 되니 어찌 돕는 자가 없겠는가? 지금은 하지 않음을 걱정해야지 그 이루기 어려움을 걱정할 때는 아닌 듯 하오.\"
효종은 흔히 북벌론의 대명사로 많이 알려져 있죠
북벌론이라는 자체가 현재 국민들의 구미에 맞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얼마나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북벌론으로서의 명분과 국력부강이라는 실제와는 엄연한 차이가 있죠
저는 개인적으로 효종에 대해 몇가지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의 과오중 하나는 무리한 북벌 추진입니다
호란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여서 무리하게 북벌을 추진했다는 자체가
문제가 있습니다.북학파인 박지원이 허생전 말미에서 허생이 효종 당시
어영대장 이완을 만나는 자리에서 허생은 이러한 점을 통렬히 지적합니다.
그 당시의 상황은 국력의 충실이 더욱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두번째는 소위 서인계 산림을 정권으로 불러드린 장본인이라는 점입니다
당시 산림의 양 거두인 송시열, 송준길을 정권으로 불러드려 자신의 북벌론에
대한 정치적 뒷받침을 하게 하였습니다. 송시열이 현종, 숙종조의 당쟁에
중심점에 있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선비들이 죽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효종의 안목을 한번쯤 의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효종이 송시열을 정계로 초빙한 것은 자신의 왕위 승계에 치명적 결함이 있는
것을 보충하기 위해 한 것이고 무리하게 북벌론을 핀 것도 효종의 이러한
컴플렉스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죠. 원래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들이
생존해 있는 것에도 불구하고 두번째 아들인 봉림대군에게 승계되었으니 조선이
유교국가라는 것을 감안할 때 엄청난 결함이죠
효종의 이러한 컴플렉스는 김홍욱이 억울하게 죽은 강빈의 신원을 상소하자 그를
장살한 것에서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명분을 중요시하는 당시 산림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자 효종은
이들을 포용하는 수단으로 송시열 등 산림을 정계로 초빙한 것이죠
소현세자가 볼모로 청나라에 잡혀갔을 때 외부 문물 표용의 의지가 강했고 (결국
그것 때문에 죽었지만) 당시 청나라 정가에서 그가 인기가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봉림대군보다는 그의 역량이 더 크다고 판단합니다
ㅡ북학론의 입장을 띠는 소현세자와 박지원의 북학론이 상통함.
봉림대군이 아니라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우리나라는 더 발전했을 것.
서양 열강에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김자점 역모사건으로 친청 세력을 모두 제거한 효종은 이완, 유혁연, 원두표 등의 무장을 중용하여 북벌을 위한 본격적인 군비 확충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런 집념 어린 군비 확충 작업은 번번이 재정적 어려움에 부딪쳐 중단되곤 하였다. 그리고 지나치게 군비 확충에만 주력한 나머지 민생을 곤란하게 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한편 효종의 이런 국방 강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벌의 기회는 좀처럼 포착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청나라의 세력이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다. 효종은 평생을 삼전도의 치욕을 되새기며 북벌에 집념하여 군비 확충에 전력을 쏟은 군주였으나 국제 정세가 호전되지 않았고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부족하여 때로는 군비보다도 현실적인 경제 재건을 주장하는 조신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결국 효종은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ㅡ북벌론의 허구성을 주장하는 박지원의 근거
d. 효종이후 조선의 정치적 상황
예송논쟁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나라를 다스리는 정책의 견해 차이가 아니라 효종의 장례와 대왕대비인 조 대비의 복상문제라는 사소하게 보이는 문제이었지만, 성리학을 치국이념으로 삼은 조선으로서는 성리학에 근거한 오례가 국가정책 이상의 중요성 있는 사안으로 남인 윤휴(白湖 尹휴 : 1617∼1680)의 3년설과 서인의 거두인 우암의 1년설의 대립, 이른바 \'1차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현종은 효종의 아들로써 병자호란 이후 효종이 볼모로 잡혀있던 시절에 중국 선양에서 태어 났으며 인조22년 조선으로 귀국. 효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어 효종이 재위 10년만에 죽자 1659년 즉위하였다. 당파싸움에 원인 및 발화점이 된 효종의 복상문제를 두고 남인은 3년설을 서인은 기년설(1년상)을 주장하였다. 이 때 현종이 기년설 주장을 들어주어 결국 서인이 집권하게 되었다.
하지만 남인파인 허적을 영의정에 유임시켜 남인의 재기 발판을 마련 해 주던 중 또 다시 1674년 어머니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왕실 상례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대립하였지만 이번에는 현종이 남인파의 손을 들어 주므로써, 서인 집권이 무너지고 남인이 집권하는 정권이 열렸지만 그 뒤에도 서인은 남인에 대한 안 좋은 소문를 퍼뜨리고 반란을 남인이 일으킨다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인파의 내분이 일어나도록 부채질하였다. 결국 현종은 벼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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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학기 국문학개론 출석대체시험 핵심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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