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문제와 천황 및 천황제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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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며

1. 전쟁책임과 천황·천황제
2. 권위와 권력의 분립
3. 부유(浮游)하는 상징천황제
4. '천황이용론'으로서의 상징천황제

나오며

본문내용

이하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마찬가지이다.
. 여기서 '정치'라고 한 것은 천황의 방문에 즈음하여 중국 쪽에서 전쟁책임의 논의가 일 것을 염려해서였다. 유족회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던 이타가키 다다시(板垣正)도 반대 대열에 합류했다. 한편 방중 반대의 목소리는 좌파 쪽에도 나왔다. 공산당 역시 '천황의 정치적 이용'을 이유로 중국 방문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런 상황은 천황 내지 황실의 정치적 이용이라는 이슈에 관한 기존의 대립구도를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정부·여당 자민당·보수세력 대 야당·혁신 측"
) 앞의 논문, 「「皇室外交」に見る皇室と政治」, 222쪽.
이라는 도식보다는 보수세력이 찬반으로 양분되는 쪽이 더 격렬하게 비쳐졌다. 그때까지 1971년과 1975년, 히로히토 천황은 각각 유럽과 미국을 방문했는데, 그 때마다 좌파 쪽은 '천황의 정치 이용'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히로히토 천황이 유럽을 방문했을 때의 '뼈아픈 기억'도 방중 반대 보수파의 기세를 높였다. 즉 히틀러·무솔리니와 비견되면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Emperor Hirohito'가 전쟁의 해묵은 상처를 건드렸고, 이에 대한 유럽인들의 반발이 직접 행동으로 표출되었던 터였다
) 영국에서는 천황이 기념 식수한 나무가 뽑혔고, 네덜란드에서는 물병이 날아와 자동차 앞유리에 금이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朝日新聞』 1971년 10월 9일 석간, 앞의 논문, 「「皇室外交」に見る皇室と政治」, 213쪽에서 재인용).
. 때마침 중국에서도 1992년 2월 주일 중국대사가 기자회견 석상에서 "양국의 한 시기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명확한 태도 표명을 기대한다"는 발언을 흘렸으며, 민간 배상을 추진한다는 움직임도 전해졌다
) 앞의 책, 『일본정치의 아시아관』, 248쪽.
. 이상을 종합하면 "정치와는 무관계한 데서 발상되어 실현된 유럽 방문에서, 천황을 정치에 끌어들이지 않도록 고심했던 미국 방문을 거쳐, 중국 방문에 의해 황실은 정치적 논의의 한가운데에 내던져지게 되었"
) 앞의 논문, 「「皇室外交」に見る皇室と政治」, 223쪽.
다는 평가는 적확한 지적이다.
방중에 즈음하여 불거진 논란을 지켜본 한 외무성 출신 궁내청 관리는 '황실 외교'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친선을 넘어선 황실외교는 본래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명문에도 없는데도 천황과 황실에 정치적 의미를 갖는 공적 행위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국가이성을 잃게 하는 위험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중략] 이 문제에 관한 정부, 외무성의 자세는 매우 안이하다. 지난 번 두 폐하의 중국 방문에서 찬반 양론이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또 한 때 비공식적으로 검토된 두 폐하의 한국 방문은 그 이상으로 위험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당시 정권의 무리한 정치적 의도에 황실이 이용되었고 또 이용되려고 한 예이다. [중략] 외무성은 천황, 황실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천황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둘러싼 안팎의 격차를 생각할 때, 더욱 경계를 요하게 된다. [중략] 외국에서 본다면 천황은 여전히 대부분 '카이저'인 것이다.
) 武田龍夫, 『宮中物語 元式部官の回想』, 中公文庫版, 1997, 330∼331쪽. 앞의 논문, 「「皇室外交」に見る皇室と政治」, 227쪽에서 재인용.
나오며
이상에서 후소샤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천황·천황제는 과연 어떤 저의를 감추고 있으며, 그들이 반복해서 주장하는 권위로서의 천황제가 어떤 역사적 맥락을 갖는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전후 일본국헌법에 의해 비로소 그 제도적 틀이 확정된 상징천황제가 역사인식과 과거사문제의 이슈화에 휩쓸리면서 보수정치권과 어떤 관계를 형성해 왔는가에 대해서도 분석을 했다.
본고에 따르면 니시오를 위시한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역사교과서를 통해 히로히토 천황은 전쟁책임의 문제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손사래를 치고 있으며, 그 역사적 증거로서 중학생에게는 난해한 현실의 정치권력과 무관한 권위로서의 천황제라는 개념을 주입하려 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역사적 연원을 정확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전전과 전후를 관통하는 권위로서의 천황제상징천황제에 착목하는 것이 긴요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보다 깊은 천착이 필요하며, 미시마 유키오의 재해석이 시급하다는 과제도 공유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역사인식을 둘러싼 싸움에 지속적으로 관여도를 높여온, 바꿔 말하면 '이용'의 정도가 높아져 간 상징천황제의 족적을 짚어볼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 21세기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우리는 일본 수상인 모리 요시로(森喜朗)의 입에서 화석화된 '신의 나라'와 '국체', '교육칙어는 좋은 점도 있다'는 발언이 나왔다는 현실을 뼈아프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권위로서의 천황제상징천황제가 전쟁책임의 면죄부로 출현하고 자리잡게 된 배경으로는 패전 후 전후개혁과 전후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요컨대 '천황의 정치이용의 배제'라는 논리에 용해된 근대 이후 일본의 근본적 모순을 천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래와 같은 성찰은 아시아의 진정한 '역사 화해'를 위해 천황제와의 '정면대결'을 이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한다.
천황 히로히토가 죽음의 병상에 있던 1988년 10월, 대만의 반일 데모의 플랜카드에 「천황이 한 마디도 사죄하지 않는 것은 일본인의 수치」라고 쓰여 있던 사실은, 전쟁책임 의식을 결락·방치한 전후 일본의 민주화 노선의 본질을 적확히 꿰뚫고 있다. 본래 전쟁책임 의식과 국민주권의 확립은 불가분의 관계인데도, 민주화 추진의 담지자들은 민주화가 자동적으로 과거의 극복·속죄로 연결되는 것으로 막연히 생각한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게다가 전후 일본의 민주화라 하더라도 그것은 「황실전범」에서 신분차별·여성차별·장애자차별을 규정한 상징천황제와의 공존이었고, 이 일본사회의 차별의 근간에는 손가락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은 21세기를 향해 이 차별의 원천을 여전히 「천대에 만대에(기미가요의 한 구절, 인용자)」 보존하려는 것이다.
) 앞의 책, 『福澤諭吉のアジア認識』, 8∼9쪽.
  • 가격1,900
  • 페이지수24페이지
  • 등록일2010.05.17
  • 저작시기2005.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1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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