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출생
-성장기
-당시 시대상황
-봉기의 시작과 끝
-봉기 그후..
-성장기
-당시 시대상황
-봉기의 시작과 끝
-봉기 그후..
본문내용
세를 받을 수 없었던 점
4) 개간한 황무지에 과세한 점
5) 미개간한 황무지에 땔감을 과세한 점
6) 만석보에 과세한 점
7) 팔왕보에 과세한 점
이 와중에 이용태는 한가지 특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난민 중에 동학교도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용태로 하여금 민란의 원인이 동학에 있으며 동학교도들이 주도 했다는 선입견을 갖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이용태는 민란과 관계 없이 동학교도들을 모두 잡으드리게 했으며, 당사자가 없으면 처자와 아녀자까지도 모두 잡아 들였다. 당시 목격자인 최영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군중들이 해산하고 농사에 복귀한 뒤 10일도 못되어 안핵사 이용태는 역졸 8백을 거느리고 고부에 들이닥쳐 새로 부임한 군수 박원명에게 민란의 주모자들을 찾아내라고 위협하며 역졸을 고부 군내에 풀어 마을을 뒤지고 다니며 부녀자를 강음하고 재산을 약탈하며, 백성들을 마구 구타하고 굴비 꿰듯 사람을 엮어갔다.”
전봉준은 당시의 2차 민란에 대해 말하기를 “장흥부사 이용태가 안핵사로 본읍에 와서 기포한 인민을 동학이라 통칭하고 열명하여 포착하며 그집을 태우며 당사자가 없으면 처자를 잡아 살육을 행하는 고로 다시 기포했다.” 라고 했다.
형국이 이렇게 돌아가자 전봉준은 물론이요, 동학교도들이 이리를 내쫓았더니 호랑이를 맞이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이용태는 만경평야의 곡창지대를 바탕으로 얼마든지 재산의 부정축재를 가능한것을 알았다. 결국 이는 2번째 거사를 유도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병갑을 기습한 것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이용태가 거느리고 있는 군대는 어느 정도 정규훈련을 받았고 또 병기도 우월했기 때문이다. 결국 전봉준은 무장의 동학도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손화중에게 민란에 가세해 줄것을 요청하였고 태인에 기반을 두고 있던 김개남에게도 부탁을 하였다. 이들은 거사일자를 1894년 3월21일로 정했다. 이날은 교주인 최시형의 탄생일 이기도 했다. 이들의 첫 전투는 황톳재에서 시작되는데 이 전투는 갑오농민혁명에서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1차 봉기에서는 단순한 민란의 성격이 강했으나 2차 봉기는 동학이라는 종교적 성격이 가미 되기 시작되었다. 황톳재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것에 조정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조정에서 볼때는 이들은 정신은 종교로 무장되어 있었으며 정권에 대한 도전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을 연상시켜 불안을 더욱 가중 시켰다. 조정에서는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민란을 평정토록 하였다. 홍계훈은 경군 1백명을 이끌고 1894년 4월 4일에 인천을 출발, 6일에 군산항에 도착하여 전주로 향했다. 이 틈에 전봉준은 창의문을 발표하여 자신이 거병하게 된 입장을 밝혔다.
“소위 공경 이하 방백수령들은 국가의 위난을 생각지도 아니하고 다만 자기가 살찌는 일에만 간절하여 과거 시험의 문을 돈벌이로 볼 뿐이며 응시의 장은 매매하는 저자와 같다. 허다한 하뢰는 국고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개인의 사복을 채우고 만 것이며 국가에는 오래 쌓인
4) 개간한 황무지에 과세한 점
5) 미개간한 황무지에 땔감을 과세한 점
6) 만석보에 과세한 점
7) 팔왕보에 과세한 점
이 와중에 이용태는 한가지 특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난민 중에 동학교도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용태로 하여금 민란의 원인이 동학에 있으며 동학교도들이 주도 했다는 선입견을 갖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이용태는 민란과 관계 없이 동학교도들을 모두 잡으드리게 했으며, 당사자가 없으면 처자와 아녀자까지도 모두 잡아 들였다. 당시 목격자인 최영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군중들이 해산하고 농사에 복귀한 뒤 10일도 못되어 안핵사 이용태는 역졸 8백을 거느리고 고부에 들이닥쳐 새로 부임한 군수 박원명에게 민란의 주모자들을 찾아내라고 위협하며 역졸을 고부 군내에 풀어 마을을 뒤지고 다니며 부녀자를 강음하고 재산을 약탈하며, 백성들을 마구 구타하고 굴비 꿰듯 사람을 엮어갔다.”
전봉준은 당시의 2차 민란에 대해 말하기를 “장흥부사 이용태가 안핵사로 본읍에 와서 기포한 인민을 동학이라 통칭하고 열명하여 포착하며 그집을 태우며 당사자가 없으면 처자를 잡아 살육을 행하는 고로 다시 기포했다.” 라고 했다.
형국이 이렇게 돌아가자 전봉준은 물론이요, 동학교도들이 이리를 내쫓았더니 호랑이를 맞이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이용태는 만경평야의 곡창지대를 바탕으로 얼마든지 재산의 부정축재를 가능한것을 알았다. 결국 이는 2번째 거사를 유도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병갑을 기습한 것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이용태가 거느리고 있는 군대는 어느 정도 정규훈련을 받았고 또 병기도 우월했기 때문이다. 결국 전봉준은 무장의 동학도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손화중에게 민란에 가세해 줄것을 요청하였고 태인에 기반을 두고 있던 김개남에게도 부탁을 하였다. 이들은 거사일자를 1894년 3월21일로 정했다. 이날은 교주인 최시형의 탄생일 이기도 했다. 이들의 첫 전투는 황톳재에서 시작되는데 이 전투는 갑오농민혁명에서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1차 봉기에서는 단순한 민란의 성격이 강했으나 2차 봉기는 동학이라는 종교적 성격이 가미 되기 시작되었다. 황톳재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것에 조정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조정에서 볼때는 이들은 정신은 종교로 무장되어 있었으며 정권에 대한 도전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을 연상시켜 불안을 더욱 가중 시켰다. 조정에서는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민란을 평정토록 하였다. 홍계훈은 경군 1백명을 이끌고 1894년 4월 4일에 인천을 출발, 6일에 군산항에 도착하여 전주로 향했다. 이 틈에 전봉준은 창의문을 발표하여 자신이 거병하게 된 입장을 밝혔다.
“소위 공경 이하 방백수령들은 국가의 위난을 생각지도 아니하고 다만 자기가 살찌는 일에만 간절하여 과거 시험의 문을 돈벌이로 볼 뿐이며 응시의 장은 매매하는 저자와 같다. 허다한 하뢰는 국고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개인의 사복을 채우고 만 것이며 국가에는 오래 쌓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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