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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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태백산맥에 대한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역사적 사건 기술에 나타난 역사의식
-빨치산과 동학농민

3.결론

본문내용

지주로부터 벼나 그 밖의 식량을 빌려 먹는 자가 많고, 추수기에 이런 부채의 상환과 소작료를 물고 나면 식량이 얼마 남지 않으므로 매년 식량을 빌려먹는 자가 적지 않다. 이런 지경이었으니 빚 탕감을 위해 딸을 지주에게 바치는 일쯤 예사였고, 마누라를 탐하면 마누라까지 바쳤고, 그래서도 못 견디게 되면 야반도주를 해서 만주나 간도로 가거나 화전민이 되기도 했었지. 3)
해방 후 이러한 빈곤은 극에 달해 있었는데 일제 시대에 이루어진 자작농의 소작농화, 소작농의 화전민화. 화전민의 걸인화 등을 통해서 이미 절대 빈곤의 뿌리는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절대빈곤의 틈을 비집고 공산주의 사상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소작쟁의라는 작은 것부터 조직화된 집단투쟁까지 다양한 양상을 나타내었던 농민운동은 해방 후, 공산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해방 후에 결성되었던 농민이익보호 단체들의 거의 대부분이 사회주의적 경향을 보였다는 것을 그 근거로 들 수 있다. 염상진이 일제하에서 소작쟁의 운동을 한 것은 항일운동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해방 후 빨치산 투쟁의 친일반역자 척결과도 필연적으로 연결됨을 알 수 있으며 역사적인 근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즉 빨치산이 단순하게 사회주의 이념의 맹목적 추종이 아닌 민족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이러한 점에서 빨치산 투쟁은 동학농민 운동과 밀접한 연관성을 찾아 볼 수 있다. 『태백산맥』에서는 빨치산 투쟁의 순수성과 역사적 당위성을 획득하기 위해 동학농민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는 설정을 해 놓았다. 이러한 작가의 인식은 작품 도처에서 발견되는데 특히 농민들의 투쟁자세와 빨치산의 투쟁자세에서 그 둘을 견줄 수 있다.
‘세 끼에서 두 끼로, 두 끼에서 한 끼로, 한 끼에서 굶게 되는 형편에 처하더라도 우리에겐 인민을 강압해서 양식을 뺏을 권한은 없는 겁니다. 굶으면서 싸우다가 죽어 가는 것, 그것이 혁명전사의 순결이고 인민들에게 신뢰를 심는 길이고, 다음의 역사에서 혁명이 성취되게 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는 겁니다. 혁명은 적에게만 폭력인 것이지 인민에겐 끝없는 신뢰와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혁명전사는 외롭고 또 위대한 것입니다’ 4)
전봉준이 발표한 4대 행동 강령: (1)살생을 하지 말라, (2)충성과 효도를 다하고, 세상을 구제하여 국민을 편안하게 하라, (3)서양인과 일본인을 쫓아 없애고, 성스러운 도를 맑게 하라, (4)군대를 몰아 서울에 들어가서, 권귀를 다 멸하라.
그리고 빨치산 투쟁의 의로움과 동기의 당위성을 동학농민 운동과 연계시키고 있다.
갑오난 때나 지끔이나 앞으로 나서서 싸우고, 죽어가고 헌 살람덜이 워디 자기 혼자 잘살겄다고 그리 혔간디? 잘못된 시상 바로잡어 보다 잘살아보자고 헌 일 이제. 앞으로 나슨 사람덜이 믿을 것이 머시겄능가? 자기덜 몸띵이겠는가, 손에든 총이겄는가? 아니여, 아니여, 고런 것덜 아무것도 아니고, 뒤에 남은 사람덜 맘얼 믿는 것이여. 뒤에 있는 수수많은 사람덜 맘이 자기덜허고 똑같다고 믿는 그 맘으로 쌈도 허고, 죽기도 허는 것이여. 그 믿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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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6.16
  • 저작시기2003.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19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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