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구지역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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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용산구지역조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용산구 지역조사


- 용산구는
◎용산구 소개

- 용산구 역사
“초기 백제로부터 시작된 역사의 도시 용산”
우리나라 최초의 위성도시
개항기의 용산
근대의 용산
도약하는 용산

◎연혁

- 용산구 지역 특성

◎용산의 하루

◎용산구의 문화재
< 국가지정문화재 >
< 시지정문화재 >
< 향토지정문화재 >
< 국립중앙박물관 >
< 문화,생활시설 >

- 용산구 내 사회복지시설

- 용산구 내 학교현황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 용산구 동별 인구
◎용산구의 인구
◎동별인구현황

-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 현황

본문내용

. 제의 목적은 마을의 재액을 소멸하고 길복을 기원하는데 있습니다. 제일은 매년 음력 4월 1일, 7월 1일에 치제하는데 매 3년마다 4월 1일은 대규모의 당제를 지내고 이어 당굿을 합니다.
김유신장군사당
보광동 168번지 언덕위에 있는 당은 대지 182평에 3평 내외의 제당과 5평여 크기의 제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당 안에는 15점의 신상이 있으며, 그 앞에 제단이 있습니다. 또 대문 옆에는 김유신장군 명화전(明化殿) 연혁비(沿革碑)가 있습니다. 당은 원래 강변에 있었으나 1941년 경원선(京元線) 철도가 개통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며, 신상은 김유신장군을 주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그 밖에 산신 삼불제석등 모두 열다섯 분의 신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김유신장군을 모시는 것은 옛날 고구려를 공격할 때 이 쪽의 물이 얕아서 배수의 진을 치고 전쟁을 하였는데 전쟁에 이긴 후 김유신장군이 동민들을 잘 돌보아 주었기 때문에 모셨다고 합니다. 제일은 음력 정월 초하루 아침 8시경에 유례식으로 간단하게 치제(致祭)한 후 집에서 차례를 모신 다음, 다시 모여 저녁때까지 굿을 벌입니다.
이태원부군당
이 당은 이태원동 189번지 언덕에 위치해 있으며 귀목등 신목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부군당으로 부르나 현판은 부군묘라고 되어 있고 주민들일부도 부군묘라고 부릅니다. 당의 구조는 대지 약 500여평 정도의 단청전각입니다. 당 입구에는 이태원동부군묘 관리위원회라고 쓴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입구 왼쪽에는 화주청이 있는데 제물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대문앞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당은 목재와 시멘트를 사용해서 20평 가까운 큰 규모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 앞에는 30여평의 마당이 있고, 이곳에서 굿이 진행됩니다. 당의 유래는 단기 3952년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면 서기 1629년(광해군 11년)에 해당됩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 당의 역사는 지금부터 약 370여년으로 추산됩니다. 일부 주민은 이 당의 역사가 천년정도 된다고도 합니다. 지금부터 약 60여년 전에는 당이 지금의 외인주택 삼거리에 있었으나 일제가 그곳에 훈련소를 설치함에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합니다. 옮기기 전에는 약 5평 정도의 한옥이었으나 옮긴 후 한칸짜리 목조 건물로 유지해 오다가 1967년 개축하였습니다. 신상은 당내 모두 12점의 신상이 모셔져 있는데, 즉 부군님, 별상님, 대감님, 제석님, 호구님, 산신님, 장군님, 군웅님, 가망님, 기마장군님, 걸립님, 창부님 등입니다. 이중 부군님은 이곳 부군당의 주신으로 마을 수호신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내외분의 좌상이 전면 중앙에 있습니다. 대부분 부군할아버지 부군할머니라고 호칭합니다. 부군상은 수염이 길고 태가 큰 흑립을 썼으며 할머니는 원삼 족두리에 큰 거울을 들고 있습니다. 별상님은 두신(痘神)으로, 당시 천연두를 두려워하여 별신으로 모셨는데 두손을 가운데로 모으고 의자에 앉아 있으며 좌우에 각각 한 사람씩 시녀가 서있습니다.
동빙고부군당
옛날 동빙고동 나루터 근처로 동빙고동 62번지에 있습니다. 당은 30여평의 부지위에 4간 정도의 맞배지붕의 당집이 있으며, 200m 가량에 신목인 은행나무 한그루가 있습니다. 이 당의 유래는 그 역사가 약 400여 년이 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으며, 일설에는 구 한말 애국지사가 호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단군신을 모시는 신당을 세워 당시 주민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켰다고 합니다. 현재의 당은 1945년에 중수하였으며, 이때 초상화를 다시 제작하였는데 화승의 붓이 화폭에서 움직이지 않아 목욕 기도 후에야 붓이 움직여 현재의 초상화를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윗당은 마을의 산 꼭대기에 위치하고 아랫당은 산 중턱에 있었으나 윗당이 1950년 6 25때 훼손되고 1972년에 아랫당이 현 위치로 옮겨져 다시 지어졌습니다.본당내에 있는 현판의 내용에는 서기 1391년 경부터 있는 수호신이며 한강 연안의 방어신이며, 동민의 안정실서를 기원하는 곳으로 이 마을 17번지와 현 장소인 62번지에 건립하고 시조왕 등 영정을 모시고 매년 정월 초 1일 만신을 불러 굿을 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천동 부군당
산천동122번지 10호에 있는 산천동 부군당은 대지 약 20평에 건평 4∼5펴 정도의 한옥기와집으로 대문 오른쪽에 신목으로 보기는 어려운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서있습니다. 제당 안에는 앞쪽에 부군님 내외분의 상이 모셔져 있고 오른쪽벽에는 세분의 제석신이 모셔져 있습니다. 부군 내외상은 앉은 모습으로 부군상은 관복을 입고 두손으로 홀을 잡고 있는 모양입니다. 삼불제석신은 연꽃 위에 앉아 있는데 한분의 제석상은 뒤에 앉아 있습니다.
앞쪽 왼쪽에 있는 제석과 뒤에 있는 제석은 왼손을 반쯤 오무려서 내영인상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세 제석 모두 머리에 두광을 지니고 있으며 목에는 묵주를 걸고 있으며, 모두 회색 장삼을 입고 붉은색 바랑을 오른쪽 옆구리에 차고 있습니다. 제일은 매년 3월 초순 길일을 택해서 치제합니다. 1988년 전까지는 음력 11월에 치제했으나 날씨가 춥기 때문에 3월로 옮겼습니다.
한남동 부군당
한남동 부군당 부군님을 모시고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며 매년 정월 초하루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한남동 568의 85번지).
보광동 부군당
보광동 168번지 보광사와 함께 있으며 원래는 서낭당이었으나 제갈공명을 모시기 때문에 무후묘라고 부릅니다. 구조는 대지 150평의 공유지에 3칸짜리 목조 기와지붕으로 단청을 하였으며, 서낭목으로 도토리나무가 한그루 서 있습니다. 이 묘는 옛날 중국 상인이 한강으로 올라와 이곳을 지나면서 장안으로 들어 갔다고 합니다. 이곳을 지날 때 신인제갈공명을 모시게 된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신상은 중앙에 제갈공명이 모셔져 있고 오른쪽 벽에는 홍장군과 청장군이, 그리고 왼쪽 벽에는 당할머니와 산신이 모셔져 있으며 산신 뒤에는 시중을 드는 동자가 서 있습니다. 제갈공명은 붉은색 도포를 입고 앉아 붓을 들고 무엇을 쓰고 있는 모습이며 홍장군과 청장군은 묘를 지키는 수호신으로서 옷색깔로 홍 청장군으로 구분합니다. 당할머니는 연두색 원삼에 파랑색 치마를 입고 족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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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7.02
  • 저작시기20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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