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조선시대의 정치적 사건 - 계유정란, 무오사화, 갑자사회, 기묘사화, 을사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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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조선건국의 의의와 배경

2. 왕자의 난, 계유정란의 의의
1) 1차 왕자의 난 (1398년, 태조 7년)
2) 2차 왕자의 난
3) 계유정난(1453년 단종1년)

3. 조선시대의 4대 사화와 사림과 훈구파의 정치적 배경
1) 무오사화(戊午士禍)
2) 갑자사화(甲子士禍)
3) 기묘사화(己卯士禍)
4) 을사사화(乙巳士禍)

4. 성리학이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

본문내용

이 되었으나,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세력에 의해 붕당이 형성되었다.
4. 성리학이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
불교의 이념으로 건국되었던 고려 왕조가 고려무인 이성계에게 몰락하게 되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성계는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기 위한 첫 번째 임무로써 극대화된 사회 모순과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고, 지방호족세력의 힘을 꺾으며, 중소지주층의 이익을 반영하는 방향에서 사회개혁을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이성계는 불교이념에 반하여, 성리학을 받아들여 그것을 당시의 중심적인 사상이었던 유교에 접목시켜 건국이념으로 삼았다. 이 성리학은 백성들에게 일정한 윤리와 예절 규범의 확실한 기준을 제공함으로써 조선 왕조가 발전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깊이 있는 동양 학문이 발전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성리학은 조선시대의 사회구조와 실시되었던 제도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성리학은 유교에 철학적 세계관을 부여하고 유교를 심성 수양의 도리로 확립한 새로운 학풍을 말한다. 중국에서의 성리학은 이미 당대부터 종래의 훈고학과는 다른 유교학풍을 세우려는 노력이 있었으며, 그 노력은 북송대에 이르러 성리학이라는 사상체계와 학문방법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후 남송의 주희에 의해 성리학의 집대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리학을 주자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명대의 왕수인의 학문·사상, 즉 양명학까지 성리학에 포함시킬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주자학만을 성리학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선 왕조는 성리학의 이념과 이론에 따라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다보니 관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유교 경전을 공부해야 했고, 백성들도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생활해야 했다. 유교에서는 왕과 신하, 그리고 백성 모두가 지켜야 할 도리가 정해져 있었다. 왕은 백성들을 위해 충직하고 현명한 신하의 바른말에 귀 기울여야 하고, 신하는 의로워야 하고 개인적인 욕심을 멀리해야 하고, 양반과 선비들은 바른 행실로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며, 백성들은 정직하고 부지런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성리학이 들어온 것은 고려 말기,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던 안향이 《주자전서》를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성균관의 유학자들에게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으로서 새로운 학풍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로서 이색, 정몽주, 길재, 정도전 등을 들 수 있다. 이색, 정몽주, 길재 등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는 데 그쳤고, 또 신왕조에 협력하지도 않았으나 정도전, 하륜, 권근 등의 성리학자는 불교의 폐단뿐만 아니라 교리 자체를 논리적으로 변척하는 동시에 이태조를 도와 법전의 제정과 기본정책의 결정을 통하여 유교를 국시로 삼는 조선조가 성립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정몽주의 학풍을 이은 길재는 의리학의 학통을 세웠고, 그 학통은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그리고 조광조로 이어지면서 기묘사화·을사사화 등의 희생을 겪었으나 도학의 의리정신은 면면히 계승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였으며, 송대의 성리학이 이 땅에 전래된 지 300년 가까이 되어서였다.
성리학이 조선시대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면 고려 말, 권문세족의 토지겸병과 지배층의 비리와 탐학이 조선 초 훈구세력의 권세로 인한 농민의 유량과 향촌사회를 불안정하게 했는데 이때 향촌에 있던 재족지주들이 정치사회개혁의 추진이념으로 성리학을 들고 나온 것 이다.
흔히 훈구파에 의한 부도덕한 정치를 질타하고 군주와 지배층의 도덕적 수양과 질서유지를 위한 이념으로 성리학적인 사회이념이 사림파의 개혁추진에 큰 공헌을 한 것 이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이황과 기대승의 4단7정 논쟁이 전개되는 등 활발한 탐구로 학문적 깊이가 심화되어 많은 유학자와 제자를 중심으로 인한 학파가 생기는데 학문적으로 조선시대의 황금기였다.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성리학은 그 나름대로의 학문적 사상적 탄력성을 잃어버리고 민생현안과 동떨어진 예송논쟁 등 지배층의 당파싸움에 이용되기 시작한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모내기의 확산 및 신분간의 상승 등 급변한 시대에 들어섬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은 더 이상 사회발전의 대안책과 거리가 멀게 벌열가문의 권력과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여 주자학이외의 사상과 학문을 배척하고 사회모순점을 해결하는 능력을 상실하는 등 특권층의 체제유지에 성리학이 변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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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7.03
  • 저작시기2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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