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 드골의 생애
2 . 프랑스 제 3공화국
3 . 프랑스 제 4공화국
4 . 프랑스 제 5공화국 정치
5 . 프랑스 제 5공화국 경제
6 . 프랑스 제 5공화국 사회
7 . 프랑스 제 5공화국 대외정책
8 . 1968년 5월 학생운동
9 . 드골리즘에 대한 평가
10 . 참고문헌
11 . 질문과 답변
2 . 프랑스 제 3공화국
3 . 프랑스 제 4공화국
4 . 프랑스 제 5공화국 정치
5 . 프랑스 제 5공화국 경제
6 . 프랑스 제 5공화국 사회
7 . 프랑스 제 5공화국 대외정책
8 . 1968년 5월 학생운동
9 . 드골리즘에 대한 평가
10 . 참고문헌
11 . 질문과 답변
본문내용
좋아했다. 지방순회를 자주 하면서 실정을 청취하고 자신의 정책을 직접 알려 국민들의 신뢰감을 증폭시켰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드골의 정치적 신념
UNR(신공화국연합)의 서기장은 당원들에게 “드골 장군이 직접 우리들에게 명령하지 않더라도 우리들은 장군을 받든다. 장군은 우리들의 것이 아니지만 우리들은 장군의 것이다”라는 신조를 피력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말을 그의 회고록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원래 나는 프랑스의 옹호자이며 결코 한 계급이나 한 당파의 옹호자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봉사를 받기 위해서 나에게 봉사하는 당파를 나는 가지지 않는다. 한 국가는 단 한 사람의 지도자를 받들며 그 인물 속에서 본질적인 것을 찾아서 추대하도록 해야 한다. 즉 국민의 운명을 관리하는 인물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드골은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서 한 사람의 거인이 통치하고 국민은 당파를 초월해서 그를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의 신념으로 하였다. 이런 그의 신념에 따라 제5공화국은 헌법으로 대통령의 권한이 엄청나게 강화되었다. 사실상 드골은 중요한 외교 문제나 정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소수 측근자의 의견을 듣는 수도 있으나 내각수반이나 담당 장관까지도 무시당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의회에 있어서는 야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1962년까지도 그들의 반대는 거의 무시당해 왔다. 드골에게는 자기와 국민과의 사이에 장관이니 국민의회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모두 귀찮은 존재로 보이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따라서 ‘제5공화제’를 위장한 ‘왕제’라고 비난한 것은 어느 의미에서 보아 이유 있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면 의회와 정당의 부패를 공격한 드골은 이것을 대신해서 무엇을 내놓았는가. 드골은 주권자인 국민과 직결할 수 있는 국민투표야말로 보다 확실한 민주주의의 형태라고 주장하고 이것을 위험시하는 정당을 비난하고 있다. 그의 회고록에서 『의회제는 민주주의의 유일한 형식도 아니며 그 순수한 형식도 아니다』고 하여 국민투표로 국민과 직결한 강력한 대통령제를 주장하였다. 그는『국민투표를 위험하다고 보는 정당의 태도처럼 민주주의를 그릇 파악하고 있는 것이 없다. 기성정당들은 공화국이란 단지 자기들의 재산이기를 바라며 주권자로서의 국민은 그들의 권리와 자유의사까지도 정당들이 지명한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기 위해서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정당은 본능적으로 국가가 정부화 되기를 바라며 그것을 더욱 교묘하게 조종할 수 있고 관직과 권력을 용이하게 빼앗을 수 있기를 원하고 있다』라고도 지적했다.
이와 같이 드골은 간접적인 대변자를 중간에 두지 않고 국민대중이 표명한 의사가 직접 행정부에 반영되어 실행되는 것이야말로 보다 순수한 민주주의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후에 소환제, 보통선거, 국민투표제 등으로 발전을 보게 되었으며 드골은 국민투표를 교묘히 이용하여 특히 알제리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는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극우파의 망동을 제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62년의 헌법 개정에서 대통령을 선거인단에 의해 뽑는 간접선거제를 국민의 직접선거제로 바꾸어 대통령과 국민을 직결시켰다. 의회나 정당이 있기는 하나 대통령이 내각의 임명권과 해산권을 가지며 3군의 장이며 또 중요 국가정책에는 국민투표를 실시하며 긴급사태에는 비상권한을 가지기도 했다. 그 권한은 미국 대통령보다도 훨씬 크며 국민투표에 의해 선출된다는 점에서 겨우 민주주의라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드골주의는 그의 권위주의적 독재경향 때문에 파시즘과 상통하는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에는 공산당을 비롯한 반대당의 활동을 허용하고 있었고 알제리 전쟁 때에는 OAS 즉 군사비밀 조직을 가진 극우적 민주주의자들의 테러와 싸운 것을 비롯해 다른 파시즘 체제에서처럼 일당전제를 강요하기 위해서 대중적 백색 테러 조직체를 가지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그를 파시스트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5. 프랑스 제 5공화국의 경제
1963년 초에 오면 드골의 권력은 안전하게 된 것 같았다. 그는 적극적인 문화정책, 경제성장정책, 국제관계에서의 강경한 태도 등으로 국민을 통합하려 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프랑스정책자들을 괴롭혀 온 문제들이 해결됨으로써 크게 도움을 받았다. 3C문제 가운데서 계급대립의 문제는 아직도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카톨릭교회의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교회참석률의 저조, 기독교민주당의 쇠퇴, 카톨릭의 드골 지지는 교회의 영향력 문제를 둘러싼 국민 사이의 의견차이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음을 말해 주었다.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대한 국가보조금을 늘여 주기 위한 1959년의 \'드브레 법\'은 놀랍게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 5공화국에서는 권위주의적 대통령제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소외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드골은 또한 두 C의 문제를 둘러싼 국민적 분열도 크게 줄였다. 알제리사태의 해결로 식민주의의 문제가 끝났다. 그리고 냉전의 문제를 둘러싼 국민적 분열도 크게 완화되었다. 왜냐하면 드골은 러시아, 중국, 동유럽과 외교관계를 다시 수립하고, 나토로부터 프랑스의 독자성을 확인하고, 핵무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기동타격대를 조직하였기 때문이다. 핵무기보유는 식민지제국을 잃은 군대에 대한 보상으로 작용하였다. 계급대립도, 드골파가 전국선거에서 우세해 지고 경제가 성장하게 됨에 따라, 크게 완화되었다.
임금, 고용, 사회개혁과 같은 문제들이 여전히 중요한 정치문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처리함에 있어서 드골은 제 4공화국에서 물려받은 건전한 경제적 기반과 계속된 경제성장으로 도움을 받았다. 경제성장은 부분적으로 인구증가로 촉진되었다. 1945년의 인구는 4천만이었으나 1970년에는 5천 1백만으로 늘었다. 다수의 이민노동자가 북아프리카와 남유럽에서 왔다. 그에 따라 도시인구도 증가하였다.
경제발전은 1947-1952년의 \'모네계획\'을 시작으로 수립된 국가계획에 따라 계속되었다. 경제계획의 목표도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예를 들어 제3차 계획(1958-1961)은 유럽공동시장(EEC)에 가입하고 식민지시장을
드골의 정치적 신념
UNR(신공화국연합)의 서기장은 당원들에게 “드골 장군이 직접 우리들에게 명령하지 않더라도 우리들은 장군을 받든다. 장군은 우리들의 것이 아니지만 우리들은 장군의 것이다”라는 신조를 피력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말을 그의 회고록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원래 나는 프랑스의 옹호자이며 결코 한 계급이나 한 당파의 옹호자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봉사를 받기 위해서 나에게 봉사하는 당파를 나는 가지지 않는다. 한 국가는 단 한 사람의 지도자를 받들며 그 인물 속에서 본질적인 것을 찾아서 추대하도록 해야 한다. 즉 국민의 운명을 관리하는 인물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드골은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서 한 사람의 거인이 통치하고 국민은 당파를 초월해서 그를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의 신념으로 하였다. 이런 그의 신념에 따라 제5공화국은 헌법으로 대통령의 권한이 엄청나게 강화되었다. 사실상 드골은 중요한 외교 문제나 정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소수 측근자의 의견을 듣는 수도 있으나 내각수반이나 담당 장관까지도 무시당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의회에 있어서는 야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1962년까지도 그들의 반대는 거의 무시당해 왔다. 드골에게는 자기와 국민과의 사이에 장관이니 국민의회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모두 귀찮은 존재로 보이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따라서 ‘제5공화제’를 위장한 ‘왕제’라고 비난한 것은 어느 의미에서 보아 이유 있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면 의회와 정당의 부패를 공격한 드골은 이것을 대신해서 무엇을 내놓았는가. 드골은 주권자인 국민과 직결할 수 있는 국민투표야말로 보다 확실한 민주주의의 형태라고 주장하고 이것을 위험시하는 정당을 비난하고 있다. 그의 회고록에서 『의회제는 민주주의의 유일한 형식도 아니며 그 순수한 형식도 아니다』고 하여 국민투표로 국민과 직결한 강력한 대통령제를 주장하였다. 그는『국민투표를 위험하다고 보는 정당의 태도처럼 민주주의를 그릇 파악하고 있는 것이 없다. 기성정당들은 공화국이란 단지 자기들의 재산이기를 바라며 주권자로서의 국민은 그들의 권리와 자유의사까지도 정당들이 지명한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기 위해서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정당은 본능적으로 국가가 정부화 되기를 바라며 그것을 더욱 교묘하게 조종할 수 있고 관직과 권력을 용이하게 빼앗을 수 있기를 원하고 있다』라고도 지적했다.
이와 같이 드골은 간접적인 대변자를 중간에 두지 않고 국민대중이 표명한 의사가 직접 행정부에 반영되어 실행되는 것이야말로 보다 순수한 민주주의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후에 소환제, 보통선거, 국민투표제 등으로 발전을 보게 되었으며 드골은 국민투표를 교묘히 이용하여 특히 알제리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는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극우파의 망동을 제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62년의 헌법 개정에서 대통령을 선거인단에 의해 뽑는 간접선거제를 국민의 직접선거제로 바꾸어 대통령과 국민을 직결시켰다. 의회나 정당이 있기는 하나 대통령이 내각의 임명권과 해산권을 가지며 3군의 장이며 또 중요 국가정책에는 국민투표를 실시하며 긴급사태에는 비상권한을 가지기도 했다. 그 권한은 미국 대통령보다도 훨씬 크며 국민투표에 의해 선출된다는 점에서 겨우 민주주의라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드골주의는 그의 권위주의적 독재경향 때문에 파시즘과 상통하는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에는 공산당을 비롯한 반대당의 활동을 허용하고 있었고 알제리 전쟁 때에는 OAS 즉 군사비밀 조직을 가진 극우적 민주주의자들의 테러와 싸운 것을 비롯해 다른 파시즘 체제에서처럼 일당전제를 강요하기 위해서 대중적 백색 테러 조직체를 가지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그를 파시스트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5. 프랑스 제 5공화국의 경제
1963년 초에 오면 드골의 권력은 안전하게 된 것 같았다. 그는 적극적인 문화정책, 경제성장정책, 국제관계에서의 강경한 태도 등으로 국민을 통합하려 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프랑스정책자들을 괴롭혀 온 문제들이 해결됨으로써 크게 도움을 받았다. 3C문제 가운데서 계급대립의 문제는 아직도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카톨릭교회의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교회참석률의 저조, 기독교민주당의 쇠퇴, 카톨릭의 드골 지지는 교회의 영향력 문제를 둘러싼 국민 사이의 의견차이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음을 말해 주었다.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대한 국가보조금을 늘여 주기 위한 1959년의 \'드브레 법\'은 놀랍게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 5공화국에서는 권위주의적 대통령제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소외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드골은 또한 두 C의 문제를 둘러싼 국민적 분열도 크게 줄였다. 알제리사태의 해결로 식민주의의 문제가 끝났다. 그리고 냉전의 문제를 둘러싼 국민적 분열도 크게 완화되었다. 왜냐하면 드골은 러시아, 중국, 동유럽과 외교관계를 다시 수립하고, 나토로부터 프랑스의 독자성을 확인하고, 핵무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기동타격대를 조직하였기 때문이다. 핵무기보유는 식민지제국을 잃은 군대에 대한 보상으로 작용하였다. 계급대립도, 드골파가 전국선거에서 우세해 지고 경제가 성장하게 됨에 따라, 크게 완화되었다.
임금, 고용, 사회개혁과 같은 문제들이 여전히 중요한 정치문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처리함에 있어서 드골은 제 4공화국에서 물려받은 건전한 경제적 기반과 계속된 경제성장으로 도움을 받았다. 경제성장은 부분적으로 인구증가로 촉진되었다. 1945년의 인구는 4천만이었으나 1970년에는 5천 1백만으로 늘었다. 다수의 이민노동자가 북아프리카와 남유럽에서 왔다. 그에 따라 도시인구도 증가하였다.
경제발전은 1947-1952년의 \'모네계획\'을 시작으로 수립된 국가계획에 따라 계속되었다. 경제계획의 목표도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예를 들어 제3차 계획(1958-1961)은 유럽공동시장(EEC)에 가입하고 식민지시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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