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조선 붕당정치(당쟁, 사림정치)의 개념
Ⅲ. 조선 붕당정치(당쟁, 사림정치)의 시대적 배경
Ⅳ. 조선 붕당정치(당쟁, 사림정치)와 공론
Ⅴ. 조선 붕당정치(당쟁, 사림정치)의 실상
Ⅵ. 조선 붕당정치(당쟁, 사림정치)에 대한 부정적 견해
Ⅶ. 조선 붕당정치(당쟁, 사림정치) 연구의 제고 방안
Ⅷ. 결론
참고문헌
Ⅱ. 조선 붕당정치(당쟁, 사림정치)의 개념
Ⅲ. 조선 붕당정치(당쟁, 사림정치)의 시대적 배경
Ⅳ. 조선 붕당정치(당쟁, 사림정치)와 공론
Ⅴ. 조선 붕당정치(당쟁, 사림정치)의 실상
Ⅵ. 조선 붕당정치(당쟁, 사림정치)에 대한 부정적 견해
Ⅶ. 조선 붕당정치(당쟁, 사림정치) 연구의 제고 방안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되는 것이다. 설사 광생이 한 짓으로 지나침이 있더라도 그렇게 대할 수 없는데 하물며 정직한 기운이 청송보다 더 고고한 절개이겠는가.
태학이 수선과 공의, 그리고 국가 원기의 소재처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 유생들의 상소를 통한 조정 논의의 참여행위를 당시 선조는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유생들의 이이에 대한 시비의 논박과 그로 인한 붕당적 양상의 전개는 이러한 정치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성균관 진사 조광현이귀 등은 공론을 전제로 행해지는 초야의 사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즉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서인이 논의하지 않는데, 조정에 공론이 없으므로 초야의 사론이 제기되는 것이며 또한 사론이 격렬해지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로 인해 포의의 공론이라고 자처하면서 당시의 현인을 모함하는, 이를테면 기묘사화 당시의 유생 황이옥과 같은 무리가 대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상소를 제기한 것은, ‘동문지사’사이에서도 논란이 거듭된 바라고 전제하면서, 결국 부의가 들끓고 괴론이 백출하는 현 상황에서 상소하지 않더라도 소요는 마찬가지이며 스승이 무고당한 진상을 밝혀야 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이이가 공론의 성격과 그 공론형성의 참여범위에 대해 언급한 다음과 같은 견해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공론이란 나라의 원기입니다. 공론이 조정에 있으면 그 나라가 다스려지고 공론이 여항에 있으면 그 나라가 어지러워지며, 만약 위아래에 모두 공론이 없으면 그 나라가 망합니다.…금일의 조정에 공론이 신장되지 않고 있으므로 여항에서 과연 시비를 의논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은 선비로 자처하는데 있어 진실로 잘못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지 않고서 본래 그 정치를 논의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윗사람으로서 자신에 대해 의논하는 것을 싫어하여 금절한다면 주진의 멸망을 재촉한 유법과 같습니다. 나라에 공론이 없으면 망하는데 어찌 금절할 수 있습니까.
즉 공론이 나라의 원기여서 나라에 공론이 없으면 망하지만 이것이 조정에 있지 않고 여항의 ‘중외지사’인 포의에게 있게 되면 어지러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이는 관직에 있지 않으면서 조정의 정사에 참여하는 것은 선비로서 잘못된 일이기는 하지만, 조정에 공론이 없을 때 공론제기의 방식으로 여기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이이와 그의 문인들은 한편으로 공론을 전제로 한 조정 정사의 참여층이 중외에까지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또 한편으로 조정 내에 공론 자체가 없을 경우에 중외유생층의 공론제기를 불가피한 현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끝으로 동서 붕당의 대립이 노골화되면서 한편으로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이 정사를 주도하는 과정과, 또 한편으로 이 옥사가 일단락된 뒤 ‘건저사’를 통해 동인이 정국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유생들의 조정 정사에 대한 시사논의는 일반화되어 갔다. 당시 이러한 정치상황을 지중추부사 황정욱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초야의 여러 선비들이 다투어 소장을 올리는데 말이 격렬하고 윤기가 없으며 재량할 줄 모릅니다. 정치가 초야에 있는 것은 국가의 미사가 아닙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유생들의 상소는 시행할만한 일이 있더라도 유중해 두고 내리지 말며 단지 체념으로 채용만 하소서.
붕당정치가 본격화되면서 정치가 초야에 있을 정도로 붕당화된 유생들의 초야언론이 정사 논의에 적극적으로 관여해 갔던 것이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각지의 유생들이 의병의 형태로 전쟁에 참여하고, 임란 이후에는 전쟁수행 과정에 나타난 난맥상과 전후의 제반처리와 관련해 정치체제의 재편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붕당화된 정치세력의 갈등은 첨예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붕당이 재편되는 정국의 전환기마다 붕당화된 유생들의 초야언론이 제기되고 있었다. 선조 후반기의 정국은 한편으로 남인과 북인, 북인내의 대소북, 대북내의 육골북 등의 붕당이 대두하여 갈등이 초래되면서, 또 한편으로 초야언론이 각 붕당의 첨예한 대립 및 그로 인한 정계 주도권의 교체와 깊은 관련을 맺으면서 붕당화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광해군대에 들어가 나타날 사림 공론의 붕당화는 이와 같이 선조 후반기에 이미 그 단초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사림 공론 형성의 주된 담당층이 초야언론이라는 사실은 분명해졌으나, 이제 그 초야언론은 어느 당파가 추구하고자 하는 정치현안과 밀접히 관련됨으로써 어떻게 보면 공론의 성격에서 벗어난 일정한 한계를 내포하게 되었다.
Ⅴ. 조선 붕당정치(당쟁, 사림정치)의 실상
당쟁은 사림정치의 부산물이라 했다. 사림정치의 틀은 훌륭한 것이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상대 세력인 훈구세력이 무너지자 사림세력 내부에 분파가 생겼다. 처음에는 선배와 후배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외척 심의겸이 사림의 편을 들어 사림이 정권을 잡았으나 후배사림들은 선배사림들을 깨끗지 못하다고 공격했다. 심의겸과 그의 추종자들이 훈구의 때가 묻은 분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이준경이 죽을 때 예언한 것처럼 붕당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후배사림들은 스스로를 군자(君子)라 하고 선배사림을 소인(小人)이라 하여 배격하였다. 이것은 결국 선조 8년(1575)에 사림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이후 청년당인 동인이 우세하였다. 동인은 영남세력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인이 우세해지자 임진왜란의 책임문제를 둘러싸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렸다. 남인은 퇴계학통, 북인은 남명학통이 주류였다.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유성룡은 일본과 화친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의병을 일으킨 경상우도의 정인홍 등이 정권을 차지하였다. 전자를 남인이라 하였고 후자를 북인이라 하였다. 서인은 실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조작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하여 집권하였으나 학통이 다양하여 대북소북골북육북중북으로 핵분열 하였다. 또한 적장자가 아닌 광해군은 집권명분이 약하여 친형인 임해군과 적장자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서모인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등 인륜에 어긋나는 짓을 감행하였다. 권력을 위해서는 동기간도 죽이고 어머니도
태학이 수선과 공의, 그리고 국가 원기의 소재처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 유생들의 상소를 통한 조정 논의의 참여행위를 당시 선조는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유생들의 이이에 대한 시비의 논박과 그로 인한 붕당적 양상의 전개는 이러한 정치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성균관 진사 조광현이귀 등은 공론을 전제로 행해지는 초야의 사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즉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서인이 논의하지 않는데, 조정에 공론이 없으므로 초야의 사론이 제기되는 것이며 또한 사론이 격렬해지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로 인해 포의의 공론이라고 자처하면서 당시의 현인을 모함하는, 이를테면 기묘사화 당시의 유생 황이옥과 같은 무리가 대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상소를 제기한 것은, ‘동문지사’사이에서도 논란이 거듭된 바라고 전제하면서, 결국 부의가 들끓고 괴론이 백출하는 현 상황에서 상소하지 않더라도 소요는 마찬가지이며 스승이 무고당한 진상을 밝혀야 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이이가 공론의 성격과 그 공론형성의 참여범위에 대해 언급한 다음과 같은 견해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공론이란 나라의 원기입니다. 공론이 조정에 있으면 그 나라가 다스려지고 공론이 여항에 있으면 그 나라가 어지러워지며, 만약 위아래에 모두 공론이 없으면 그 나라가 망합니다.…금일의 조정에 공론이 신장되지 않고 있으므로 여항에서 과연 시비를 의논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은 선비로 자처하는데 있어 진실로 잘못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지 않고서 본래 그 정치를 논의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윗사람으로서 자신에 대해 의논하는 것을 싫어하여 금절한다면 주진의 멸망을 재촉한 유법과 같습니다. 나라에 공론이 없으면 망하는데 어찌 금절할 수 있습니까.
즉 공론이 나라의 원기여서 나라에 공론이 없으면 망하지만 이것이 조정에 있지 않고 여항의 ‘중외지사’인 포의에게 있게 되면 어지러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이는 관직에 있지 않으면서 조정의 정사에 참여하는 것은 선비로서 잘못된 일이기는 하지만, 조정에 공론이 없을 때 공론제기의 방식으로 여기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이이와 그의 문인들은 한편으로 공론을 전제로 한 조정 정사의 참여층이 중외에까지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또 한편으로 조정 내에 공론 자체가 없을 경우에 중외유생층의 공론제기를 불가피한 현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끝으로 동서 붕당의 대립이 노골화되면서 한편으로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이 정사를 주도하는 과정과, 또 한편으로 이 옥사가 일단락된 뒤 ‘건저사’를 통해 동인이 정국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유생들의 조정 정사에 대한 시사논의는 일반화되어 갔다. 당시 이러한 정치상황을 지중추부사 황정욱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초야의 여러 선비들이 다투어 소장을 올리는데 말이 격렬하고 윤기가 없으며 재량할 줄 모릅니다. 정치가 초야에 있는 것은 국가의 미사가 아닙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유생들의 상소는 시행할만한 일이 있더라도 유중해 두고 내리지 말며 단지 체념으로 채용만 하소서.
붕당정치가 본격화되면서 정치가 초야에 있을 정도로 붕당화된 유생들의 초야언론이 정사 논의에 적극적으로 관여해 갔던 것이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각지의 유생들이 의병의 형태로 전쟁에 참여하고, 임란 이후에는 전쟁수행 과정에 나타난 난맥상과 전후의 제반처리와 관련해 정치체제의 재편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붕당화된 정치세력의 갈등은 첨예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붕당이 재편되는 정국의 전환기마다 붕당화된 유생들의 초야언론이 제기되고 있었다. 선조 후반기의 정국은 한편으로 남인과 북인, 북인내의 대소북, 대북내의 육골북 등의 붕당이 대두하여 갈등이 초래되면서, 또 한편으로 초야언론이 각 붕당의 첨예한 대립 및 그로 인한 정계 주도권의 교체와 깊은 관련을 맺으면서 붕당화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광해군대에 들어가 나타날 사림 공론의 붕당화는 이와 같이 선조 후반기에 이미 그 단초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사림 공론 형성의 주된 담당층이 초야언론이라는 사실은 분명해졌으나, 이제 그 초야언론은 어느 당파가 추구하고자 하는 정치현안과 밀접히 관련됨으로써 어떻게 보면 공론의 성격에서 벗어난 일정한 한계를 내포하게 되었다.
Ⅴ. 조선 붕당정치(당쟁, 사림정치)의 실상
당쟁은 사림정치의 부산물이라 했다. 사림정치의 틀은 훌륭한 것이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상대 세력인 훈구세력이 무너지자 사림세력 내부에 분파가 생겼다. 처음에는 선배와 후배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외척 심의겸이 사림의 편을 들어 사림이 정권을 잡았으나 후배사림들은 선배사림들을 깨끗지 못하다고 공격했다. 심의겸과 그의 추종자들이 훈구의 때가 묻은 분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이준경이 죽을 때 예언한 것처럼 붕당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후배사림들은 스스로를 군자(君子)라 하고 선배사림을 소인(小人)이라 하여 배격하였다. 이것은 결국 선조 8년(1575)에 사림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이후 청년당인 동인이 우세하였다. 동인은 영남세력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인이 우세해지자 임진왜란의 책임문제를 둘러싸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렸다. 남인은 퇴계학통, 북인은 남명학통이 주류였다.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유성룡은 일본과 화친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의병을 일으킨 경상우도의 정인홍 등이 정권을 차지하였다. 전자를 남인이라 하였고 후자를 북인이라 하였다. 서인은 실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조작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하여 집권하였으나 학통이 다양하여 대북소북골북육북중북으로 핵분열 하였다. 또한 적장자가 아닌 광해군은 집권명분이 약하여 친형인 임해군과 적장자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서모인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등 인륜에 어긋나는 짓을 감행하였다. 권력을 위해서는 동기간도 죽이고 어머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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