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머리말
2.의자왕(義慈王)
3.백제와 동아시아 주변국가들
1)백제와 신라
2)신라의 대응
3)당(唐)의 대응
4)의자왕의 외교정책
5)당과의 대립외교
4.백제의 멸망(滅亡)
5.백제 멸망속의 또 다른 인물
1)예식진(祢寔進), 그는 누구인가?
2)백제 멸망과 예식진
6.맺음말
2.의자왕(義慈王)
3.백제와 동아시아 주변국가들
1)백제와 신라
2)신라의 대응
3)당(唐)의 대응
4)의자왕의 외교정책
5)당과의 대립외교
4.백제의 멸망(滅亡)
5.백제 멸망속의 또 다른 인물
1)예식진(祢寔進), 그는 누구인가?
2)백제 멸망과 예식진
6.맺음말
본문내용
'대성 팔족'(大姓八族) 외에도 예식진과 예군이 대표하는 예씨(氏) 종족집단이 웅진을 거점으로 대대로 좌평 직을 세습하면서 백제 지배층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확인케 했다는 점에서 그 발견에 의미가 크다. 그렇다면 이 묘지명에 등장하는 예식진은 누구이며, 그가 백제 멸망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1)예식진(寔進), 그는 누구인가?
백제는 부여, 사, 진, 해, 협, 목, 국, 백씨 등 백제 8대성이 백제의 최고 지배층이라고 역사서에 적혀있다. 그러나 대대로 좌평을 지냈다는 예씨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비는 예씨가 대당좌위위대장군이란 정삼품의 고위직을 지낸 백제의 유력 가문임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웅진성에서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와 함께 항복하였다.”-<신당서 소정방전>의 기록을 통해 예식진과 예식이 동일인물 임을 추정할 수 있다. 즉, 예식진은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과 함께 있었던 웅진의 예식 장군임을 알 수 있다.
예식진(寔進, 615년 ~ 672년)은 원래 백제 웅천(熊川.현재의 충남 공주) 사람으로서 관직이 당나라 조정의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인 '좌위위대장군(左威衛大將軍)'에 올랐고, 할아버지는 좌평 예다(藝多), 아버지는 좌평 사선(思善)이었다. 46세 때인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포로가 돼 당시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長安)으로 끌려 간다.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을 비롯한 58명의 백제 왕족.고관.장수 등이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황제에게 항복의 예를 갖추었고 그들중 '예식(예<示변에 爾>植)'이라는 인물이 포함돼 있었다는 '구당서(舊唐書)', '책부원구(冊府元龜)' 등의 기록으로보아 예식진이 바로 예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백제와 고구려를 잇달아 멸망케 한 당 고종 통치시기인 서기 672년(咸亨 3년) 5월25일 현재의 산둥성 옌타이(煙臺)시 룽커우(龍口)인 내주(來州) 황현(黃縣)에서 58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황제의 명령에 따라 그해 11월21일 유해가 시안으로 운구돼 고관들이 묻히는 고양원(高陽原)에 안장됐다
2)백제 멸망과 예식진
구당서 소정방 열전에서 "그(의자왕)의 대장(大將)인 예식이 또한 의자를 데리고 와서 항복하니 태자 륭(隆)과 여러 성주(城主) 전원을 함께 (본국인 당으로) 보냈다"고 묘사하고 있으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7월)18일에 의자가 태자 및 웅진 방령(熊津方領) 등이 웅진성에서 (사비로) 와서 항복했다"고 적혀있다.
이 두 기록을 대비할 때, 예식은 백제 멸망 당시 웅진성을 지키는 장관 겸 장군인 웅진방 령으로서 의자왕을 잡아 나당 연합군에 바쳤음을 추정 할 수 있다. 즉, 웅진성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예식진’이라는 장수가 반역하면서 의자왕을 체포해서 나당연합군에 투항하게 되고 수많은 백제 고위층들이 치욕적으로 당나라에 끌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인해 삼국의 균형이 깨지면서 동북아시아의 패권은 중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6.맺음말
의자왕은 40세가 넘어 즉위했다. 그는 오랜 기간 태자로서 신라, 고구려와의 전쟁과 외교에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나름대로 어느 정도 수준의 식견에 도달한, 말하자면 준비된 왕 이였다. 그래서 의자왕은 즉위 초부터 신라에 대한 정복에 나섰다. 그는 왕으로 재임한 20년 동안 신라에 10번이나 대규모의 정벌을 시도했던 정복군주였다. 그런데 대규모의 정벌에 나선다는 것은 의욕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선 대규모의 군사를 일으키려면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가경제가 상당히 안정되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정벌을 떠난 중에 국내에서의 반란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통치 체제가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
특히 정복전쟁에서 패하게 되면 정권의 몰락을 가져오기 쉽다. 중국을 통일했던 막강한 수나라도 무리하게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실패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따라서 의자왕 통치 시절의 백제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였고, 의자왕의 내치는 적대국인 시라로부터 강국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전쟁은 오로지 칼과 화살로 싸우는 원시적인 전쟁이었기에 백성의 숫자가 곧 국력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백제 멸망당시 백제 인구가 600만 이었다는 사실은 신라에 비해 국력이 훨씬 강한 나라였다는 것을 짐작케 해준다. 만일 의자왕이 알려진 대로 사치와 향락에 빠진데다 무능하기까지 한 왕 이였다면 백제 멸망 시에 인구가 600만 명이나 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의자왕의 백제는 10번이나 신라 정벌에 나설 정도로 부강한 나라였고, 멸망 당시에도 신라의 국력을 훨씬 앞지르고 있던 막강한 국가였는데 어찌하여 멸망하게 되었을까? 이를 의자왕의 사치와 향략으로 빚어진 백제 기강의 약화에 모두 책임 지을 순 없다. 의자왕을 무능한 왕으로만 보기 보다는 의자왕의 통치 속에 부강했던 백제도, 세계 최강인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세계 최강인 당과 대립노선을 취한 의자왕의 선택이 백제 멸망의 결정적 원인이라 볼 수 있다. 게다가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세계 최강인 당나라와 적대적 관계가 된 상태에서 당나라를 견제할 고구려의 힘이 너무 약해져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참고 문헌
▷단행본
이도학 저, 『살아있는 백제사』, 서울 : 휴머니스트, 2003.
양종국 저, 『백제 멸망의 진실』, 서울 : 주류성, 2004.
이기동 저, 『백제의 역사』, 서울 : 주류성, 2006.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편,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공주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7.
▷논문
김주성, 「백제의 역사 : 제8장 백제의 멸망」, 『백제의 역사』,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371-401 (31쪽), 1995.
김주성, 「제4회 백제연구 국제학술대회 특집 : 의자왕대 (義慈王代) 정치세력의 동향과 백제멸망」, 『백제연구』, Vol.19 [1988],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263-276 (14쪽)
김수태, 「백제의 멸망과 당 (唐)」, 『백제연구』, Vol.22 [1991],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49-176 (28쪽)
1)예식진(寔進), 그는 누구인가?
백제는 부여, 사, 진, 해, 협, 목, 국, 백씨 등 백제 8대성이 백제의 최고 지배층이라고 역사서에 적혀있다. 그러나 대대로 좌평을 지냈다는 예씨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비는 예씨가 대당좌위위대장군이란 정삼품의 고위직을 지낸 백제의 유력 가문임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웅진성에서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와 함께 항복하였다.”-<신당서 소정방전>의 기록을 통해 예식진과 예식이 동일인물 임을 추정할 수 있다. 즉, 예식진은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과 함께 있었던 웅진의 예식 장군임을 알 수 있다.
예식진(寔進, 615년 ~ 672년)은 원래 백제 웅천(熊川.현재의 충남 공주) 사람으로서 관직이 당나라 조정의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인 '좌위위대장군(左威衛大將軍)'에 올랐고, 할아버지는 좌평 예다(藝多), 아버지는 좌평 사선(思善)이었다. 46세 때인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포로가 돼 당시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長安)으로 끌려 간다.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을 비롯한 58명의 백제 왕족.고관.장수 등이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황제에게 항복의 예를 갖추었고 그들중 '예식(예<示변에 爾>植)'이라는 인물이 포함돼 있었다는 '구당서(舊唐書)', '책부원구(冊府元龜)' 등의 기록으로보아 예식진이 바로 예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백제와 고구려를 잇달아 멸망케 한 당 고종 통치시기인 서기 672년(咸亨 3년) 5월25일 현재의 산둥성 옌타이(煙臺)시 룽커우(龍口)인 내주(來州) 황현(黃縣)에서 58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황제의 명령에 따라 그해 11월21일 유해가 시안으로 운구돼 고관들이 묻히는 고양원(高陽原)에 안장됐다
2)백제 멸망과 예식진
구당서 소정방 열전에서 "그(의자왕)의 대장(大將)인 예식이 또한 의자를 데리고 와서 항복하니 태자 륭(隆)과 여러 성주(城主) 전원을 함께 (본국인 당으로) 보냈다"고 묘사하고 있으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7월)18일에 의자가 태자 및 웅진 방령(熊津方領) 등이 웅진성에서 (사비로) 와서 항복했다"고 적혀있다.
이 두 기록을 대비할 때, 예식은 백제 멸망 당시 웅진성을 지키는 장관 겸 장군인 웅진방 령으로서 의자왕을 잡아 나당 연합군에 바쳤음을 추정 할 수 있다. 즉, 웅진성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예식진’이라는 장수가 반역하면서 의자왕을 체포해서 나당연합군에 투항하게 되고 수많은 백제 고위층들이 치욕적으로 당나라에 끌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인해 삼국의 균형이 깨지면서 동북아시아의 패권은 중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6.맺음말
의자왕은 40세가 넘어 즉위했다. 그는 오랜 기간 태자로서 신라, 고구려와의 전쟁과 외교에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나름대로 어느 정도 수준의 식견에 도달한, 말하자면 준비된 왕 이였다. 그래서 의자왕은 즉위 초부터 신라에 대한 정복에 나섰다. 그는 왕으로 재임한 20년 동안 신라에 10번이나 대규모의 정벌을 시도했던 정복군주였다. 그런데 대규모의 정벌에 나선다는 것은 의욕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선 대규모의 군사를 일으키려면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가경제가 상당히 안정되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정벌을 떠난 중에 국내에서의 반란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통치 체제가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
특히 정복전쟁에서 패하게 되면 정권의 몰락을 가져오기 쉽다. 중국을 통일했던 막강한 수나라도 무리하게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실패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따라서 의자왕 통치 시절의 백제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였고, 의자왕의 내치는 적대국인 시라로부터 강국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전쟁은 오로지 칼과 화살로 싸우는 원시적인 전쟁이었기에 백성의 숫자가 곧 국력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백제 멸망당시 백제 인구가 600만 이었다는 사실은 신라에 비해 국력이 훨씬 강한 나라였다는 것을 짐작케 해준다. 만일 의자왕이 알려진 대로 사치와 향락에 빠진데다 무능하기까지 한 왕 이였다면 백제 멸망 시에 인구가 600만 명이나 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의자왕의 백제는 10번이나 신라 정벌에 나설 정도로 부강한 나라였고, 멸망 당시에도 신라의 국력을 훨씬 앞지르고 있던 막강한 국가였는데 어찌하여 멸망하게 되었을까? 이를 의자왕의 사치와 향략으로 빚어진 백제 기강의 약화에 모두 책임 지을 순 없다. 의자왕을 무능한 왕으로만 보기 보다는 의자왕의 통치 속에 부강했던 백제도, 세계 최강인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세계 최강인 당과 대립노선을 취한 의자왕의 선택이 백제 멸망의 결정적 원인이라 볼 수 있다. 게다가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세계 최강인 당나라와 적대적 관계가 된 상태에서 당나라를 견제할 고구려의 힘이 너무 약해져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참고 문헌
▷단행본
이도학 저, 『살아있는 백제사』, 서울 : 휴머니스트, 2003.
양종국 저, 『백제 멸망의 진실』, 서울 : 주류성, 2004.
이기동 저, 『백제의 역사』, 서울 : 주류성, 2006.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편,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공주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7.
▷논문
김주성, 「백제의 역사 : 제8장 백제의 멸망」, 『백제의 역사』,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371-401 (31쪽), 1995.
김주성, 「제4회 백제연구 국제학술대회 특집 : 의자왕대 (義慈王代) 정치세력의 동향과 백제멸망」, 『백제연구』, Vol.19 [1988],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263-276 (14쪽)
김수태, 「백제의 멸망과 당 (唐)」, 『백제연구』, Vol.22 [1991],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49-176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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