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 1
2. 풍납토성(風納土城) ··············1
1) 『삼국사기(三國史記)』속의 풍납토성과 하남위례성이라 볼 수 있는 이유 2
2) 발굴을 통해 살펴본 풍납토성의 왕성 ······ 4
3) 도성제(都城制)의 운영 ················5
3. 몽촌토성(夢村土城) ················6
4.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비교 ·············8
5. 풍납토성과 한성백제사 ··············· 9
1) 풍납토성과 원삼국시대론 ············· 9
2) 일본학계에서 왜곡한 풍납토성 ············· 10
3) 풍납토성의 역사적 의의 ··················11
6. 맺음말 ······················· 12
《참고문헌》······················· 13
2. 풍납토성(風納土城) ··············1
1) 『삼국사기(三國史記)』속의 풍납토성과 하남위례성이라 볼 수 있는 이유 2
2) 발굴을 통해 살펴본 풍납토성의 왕성 ······ 4
3) 도성제(都城制)의 운영 ················5
3. 몽촌토성(夢村土城) ················6
4.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비교 ·············8
5. 풍납토성과 한성백제사 ··············· 9
1) 풍납토성과 원삼국시대론 ············· 9
2) 일본학계에서 왜곡한 풍납토성 ············· 10
3) 풍납토성의 역사적 의의 ··················11
6. 맺음말 ······················· 12
《참고문헌》······················· 13
본문내용
고 있다. 이 시기가 바로 백제한성시대의 시작이다.
1997년에 발굴한 주거지에서 출토된 목탄과 1999년에 발굴한 풍납토성 동벽에서 수습된 목탄과 목재 등 9점의 시료에 대한 방사성탄소(C)연대측정을 실시하였는데 대체로 기원전·후 시기로 측정되었다. 또한 풍납토성 성벽에서 출토된 토기를 열발광연대(TL) 측정결과 B.C. 70~A.D 70년으로 측정되었다. 이에 대한 보정연대가 기원을 전후한 연대로 측정되었다. 이는 문헌기록상의 한성백제 건국연대와도 부합되고 있다.
이로써 풍납토성의 축성 시기는 기원 전후부터 200년 이전에 이미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풍납토성은 기원(紀元)을 전후한 시기에 성벽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늦어도 200년 이전에 모든 성벽의 축조가 완료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99년 이후 경당연립 재건축 부지에서 발굴조사된 폭 16m의 대형 건물지와 ‘대부’ 명이 새겨진 토기편, 말뼈 등이 다량 출토된 제사유구 등은 풍납토성이 백제한성시대의 왕성임을 확실시 해 주고 있다. 이때 이미 풍납동에 상당한 규모의 사회집단이 즉, 국가가 존재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기원전·후 시기에 이미 대단히 많은 인구가 밀집하여 사회조직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인력을 동원하여 거대한 왕성을 축조하고 궁궐을 경영한다는 것은 전제국가의 통치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백제가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기원전·후 시기에 국가로 성립하였음을 확신케 해준다.
6. 맺음말
현재 백제 산성으로 간주되는 곳은 한성, 웅진, 사비 시대를 포함해서 1,000개소에 달할 정도로 많은 예가 알려져 있으나 발굴조사를 거친 것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초축시기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는 것들도 많다. 하지만 도성을 서울에서 공주·부여로 옮긴 데에서 드러나듯 고구려의 군사적인 압박에 대항하여만 했던 백제사의 전개과정을 볼 때 수많은 산성이 만들어졌음은 분명하다. 이 점에서 인접한 신라와 가야가 고분축조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양상과는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한성시대의 백제는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고구려나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해야했고, 자연스럽게 도성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풍납토성은 단순히 방위를 위한 군사 건축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수 주민의 주거지인 복합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유물을 발견해서 그 당시의 정황을 알 수 있게 된 것도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풍납토성의 발굴은 『삼국사기』초기 기록에 근거한 발표자의 한국고대사의 새로운 체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한동안 이병도 박사의 주장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계에서 너무나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어 통설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다. 단적인 예로, 1980년대에 풍납토성을 처음 발굴한 김원룡이라는 자는 풍납토성을 단순한 방위용 성이 아닌 많은 일반민들이 같이 살았던 ‘반민반군적 읍성’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사성’으로 본 이병도 박사의 설이 옳다고 생각해 1973년에 발간 된 『한국고고학개설』에서 삼국 초기 역사를 ‘원삼국시대’로 규정하면서 백제 초기의 역사는 사라져 버리고, 개정판(1986)에서는 백제가 300년 무렵에야 비로소 실질적 왕권국가를 세웠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역사왜곡은 물론 풍납토성을 보전할 수 있는 기회마저도 잃는 한계를 보여준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한, 일본학계에서의 풍납토성 일대를 대방군의 영역으로 칭하는 등의 왜곡도 보였다. 하지만, 이런 풍납토성의 발굴은 이런 왜곡을 바로잡는 것에 대한 근거를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통설의 기세를 꺾고 그 문제점을 들어냄을 통해 차후에 고고학만의 성과가 아니라 역사를 바로잡는 데에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또한, 『삼국사기』초기 기록에 근거한 사료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게 된 점이 긍정적이라 하겠다. 교수님께서도 최근 금석문 발굴 및 연구를 통해 과거에 통설로 여겨졌던 것들이 바뀌는 현상이 부지기수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유물 발굴을 통해 역사를 제대로 알아가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 아닐까 싶다.
《참고문헌》
1.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백제도성의 변천과 연구상의 문제점』, 제3회 문화재연구학술대회, 2002.
2. 김원룡, 『풍납리포함층조사보고』,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1967.
, 『한국고고학개설』, 일지사, 1973.
, <原三國時代에 대하여>『老古學誌』 11,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00.
3. 김태식, 『풍납토성 - 500년 백제를 깨우다』, 김영사, 2001.
4. 동양고고학연구소, 『풍납토성 내 백제왕경유적 발견 1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 논문집』, 2007.
5. 몽촌토성발굴조사단, 『정비·복원을 위한 몽촌토성 발굴조사보고서』, 1984.
6. 박순발, 『백제 토기 탐구』, 주류성, 2006.
7.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왕도와 방어체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8.
8. 서정석, 『백제산성연구』, 학연문화사, 2001.
, 『백제의 도성』, 학연문화사, 2003.
9. 성주탁, 『백제 성지 연구』, 서경, 2002.
10. 심정보, 『백제 산성의 이해』, 주류성, 2005.
11. 이도학, <백제 한성시기의 도성제에 관한 검토>『한국상고사학보』9, 1992
12. 이병도, <광주풍납리토성과 백제시대의 사성> 『진단학보』10, 1939.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13. , <풍납리토성과 백제시대의 蛇城>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501쪽.
14. 이형구, 『백제의 도성』, 주류성, 2004.
, 『서울풍납토성[백제왕성]실측조사연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97.
, 『풍납토성[백제왕성]연구 논문집』, 동양고고학연구소, 2000.
15. 전국역사교사모임(한국)·역사교육자협의회(일본), 『화해와 공존을 위한 첫 걸음-마주 보는 한일사 Ⅰ-선사시대~고려시대』, 사계절, 2006.
16. 차용걸, 『백제 지역의 고대산성』, 주류성, 2004.
17. 최몽룡, 『백제연구』19, 1988.
18.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백제 역사와 문화』, 2008.
1997년에 발굴한 주거지에서 출토된 목탄과 1999년에 발굴한 풍납토성 동벽에서 수습된 목탄과 목재 등 9점의 시료에 대한 방사성탄소(C)연대측정을 실시하였는데 대체로 기원전·후 시기로 측정되었다. 또한 풍납토성 성벽에서 출토된 토기를 열발광연대(TL) 측정결과 B.C. 70~A.D 70년으로 측정되었다. 이에 대한 보정연대가 기원을 전후한 연대로 측정되었다. 이는 문헌기록상의 한성백제 건국연대와도 부합되고 있다.
이로써 풍납토성의 축성 시기는 기원 전후부터 200년 이전에 이미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풍납토성은 기원(紀元)을 전후한 시기에 성벽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늦어도 200년 이전에 모든 성벽의 축조가 완료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99년 이후 경당연립 재건축 부지에서 발굴조사된 폭 16m의 대형 건물지와 ‘대부’ 명이 새겨진 토기편, 말뼈 등이 다량 출토된 제사유구 등은 풍납토성이 백제한성시대의 왕성임을 확실시 해 주고 있다. 이때 이미 풍납동에 상당한 규모의 사회집단이 즉, 국가가 존재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기원전·후 시기에 이미 대단히 많은 인구가 밀집하여 사회조직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인력을 동원하여 거대한 왕성을 축조하고 궁궐을 경영한다는 것은 전제국가의 통치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백제가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기원전·후 시기에 국가로 성립하였음을 확신케 해준다.
6. 맺음말
현재 백제 산성으로 간주되는 곳은 한성, 웅진, 사비 시대를 포함해서 1,000개소에 달할 정도로 많은 예가 알려져 있으나 발굴조사를 거친 것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초축시기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는 것들도 많다. 하지만 도성을 서울에서 공주·부여로 옮긴 데에서 드러나듯 고구려의 군사적인 압박에 대항하여만 했던 백제사의 전개과정을 볼 때 수많은 산성이 만들어졌음은 분명하다. 이 점에서 인접한 신라와 가야가 고분축조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양상과는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한성시대의 백제는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고구려나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해야했고, 자연스럽게 도성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풍납토성은 단순히 방위를 위한 군사 건축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수 주민의 주거지인 복합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유물을 발견해서 그 당시의 정황을 알 수 있게 된 것도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풍납토성의 발굴은 『삼국사기』초기 기록에 근거한 발표자의 한국고대사의 새로운 체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한동안 이병도 박사의 주장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계에서 너무나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어 통설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다. 단적인 예로, 1980년대에 풍납토성을 처음 발굴한 김원룡이라는 자는 풍납토성을 단순한 방위용 성이 아닌 많은 일반민들이 같이 살았던 ‘반민반군적 읍성’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사성’으로 본 이병도 박사의 설이 옳다고 생각해 1973년에 발간 된 『한국고고학개설』에서 삼국 초기 역사를 ‘원삼국시대’로 규정하면서 백제 초기의 역사는 사라져 버리고, 개정판(1986)에서는 백제가 300년 무렵에야 비로소 실질적 왕권국가를 세웠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역사왜곡은 물론 풍납토성을 보전할 수 있는 기회마저도 잃는 한계를 보여준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한, 일본학계에서의 풍납토성 일대를 대방군의 영역으로 칭하는 등의 왜곡도 보였다. 하지만, 이런 풍납토성의 발굴은 이런 왜곡을 바로잡는 것에 대한 근거를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통설의 기세를 꺾고 그 문제점을 들어냄을 통해 차후에 고고학만의 성과가 아니라 역사를 바로잡는 데에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또한, 『삼국사기』초기 기록에 근거한 사료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게 된 점이 긍정적이라 하겠다. 교수님께서도 최근 금석문 발굴 및 연구를 통해 과거에 통설로 여겨졌던 것들이 바뀌는 현상이 부지기수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유물 발굴을 통해 역사를 제대로 알아가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 아닐까 싶다.
《참고문헌》
1.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백제도성의 변천과 연구상의 문제점』, 제3회 문화재연구학술대회, 2002.
2. 김원룡, 『풍납리포함층조사보고』,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1967.
, 『한국고고학개설』, 일지사, 1973.
, <原三國時代에 대하여>『老古學誌』 11,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00.
3. 김태식, 『풍납토성 - 500년 백제를 깨우다』, 김영사, 2001.
4. 동양고고학연구소, 『풍납토성 내 백제왕경유적 발견 1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 논문집』, 2007.
5. 몽촌토성발굴조사단, 『정비·복원을 위한 몽촌토성 발굴조사보고서』, 1984.
6. 박순발, 『백제 토기 탐구』, 주류성, 2006.
7.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왕도와 방어체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8.
8. 서정석, 『백제산성연구』, 학연문화사, 2001.
, 『백제의 도성』, 학연문화사, 2003.
9. 성주탁, 『백제 성지 연구』, 서경, 2002.
10. 심정보, 『백제 산성의 이해』, 주류성, 2005.
11. 이도학, <백제 한성시기의 도성제에 관한 검토>『한국상고사학보』9, 1992
12. 이병도, <광주풍납리토성과 백제시대의 사성> 『진단학보』10, 1939.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13. , <풍납리토성과 백제시대의 蛇城>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501쪽.
14. 이형구, 『백제의 도성』, 주류성, 2004.
, 『서울풍납토성[백제왕성]실측조사연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97.
, 『풍납토성[백제왕성]연구 논문집』, 동양고고학연구소, 2000.
15. 전국역사교사모임(한국)·역사교육자협의회(일본), 『화해와 공존을 위한 첫 걸음-마주 보는 한일사 Ⅰ-선사시대~고려시대』, 사계절, 2006.
16. 차용걸, 『백제 지역의 고대산성』, 주류성, 2004.
17. 최몽룡, 『백제연구』19, 1988.
18.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백제 역사와 문화』,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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