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미학의 유래와 의의
Ⅱ. 한국전통의 미학
1. ‘유가 미학’과 ‘도가 미학’의 종합으로서의 한국 전통 미학
2. 한국 전통 미학의 뿌리
Ⅲ. 탈춤의 미학
Ⅳ. 서예의 미학
1. 플라톤
2. 소크라테스
3. 프로타고라스
4. 아리스토텔레스
5. 성아우구스티누스
6. 토마스 아퀴나스
7. 피치노
8. 알베르티
9. 헤겔
10. 흄
11. 칸트
1) 레오나르드 다빈치
2) 바뙤
Ⅴ. 역사소설의 미학
1. 강렬성·불변성
2. 무시간성
3. 윤리적 이분법
4. 장식성
참고문헌
Ⅱ. 한국전통의 미학
1. ‘유가 미학’과 ‘도가 미학’의 종합으로서의 한국 전통 미학
2. 한국 전통 미학의 뿌리
Ⅲ. 탈춤의 미학
Ⅳ. 서예의 미학
1. 플라톤
2. 소크라테스
3. 프로타고라스
4. 아리스토텔레스
5. 성아우구스티누스
6. 토마스 아퀴나스
7. 피치노
8. 알베르티
9. 헤겔
10. 흄
11. 칸트
1) 레오나르드 다빈치
2) 바뙤
Ⅴ. 역사소설의 미학
1. 강렬성·불변성
2. 무시간성
3. 윤리적 이분법
4. 장식성
참고문헌
본문내용
귀에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어도 연주자의 손은 그대로 농현을 하고 있다.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시간적 여백’에서도, 우리는 ‘소리 아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 전통 음악의 백미는 바로 이 곳, ‘소리 없는 여백’에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전통 음악은 중국이나 일본과 똑같은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과는 다른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3분박과 농현 기법이라고 보고 있다. 이 둘은 모두 ‘시간적 여백의 미학’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그 ‘시간적 여백’은 글자그대로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서화담이 지적한 바와 같이 ‘무형으로 음악을 하는 것’이고 ‘소리 없는 것을 듣는 것’이며 ‘현의 현을 써서 연주하는 것’이자 ‘음의 음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악(樂)의 체(體)만 있고 용(用)은 버린’(在體去用) 경지인 것이다.
우리의 춤에서도 이런 ‘비어있으나 비어있지 않은 여백의 미학’은 똑같이 적용된다. 동양화가 ‘공간의 여백’을 특징으로 하고, 전통 음악이 ‘시간의 여백’을 특징으로 한다면, 우리 춤은 ‘시간과 공간의 여백’을 아우르는 것이다. 춤사위가 진행되다가 숨죽이듯 멈춰서는 그 순간, 마치 춤사위의 시간적 진행도 공간적 움직임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멈춤 속에서는 이미 단순한 몸놀림으로는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경지가 들어가 있다. 서화담의 말을 빌면 ‘고요 속에 움직임을 함축시킨 것’(靜其含動)이다.
이 ‘멈춤 없는 멈춤’의 순간이야말로 연희자가 단순한 춤사위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를 온 몸으로 체화(體化)하고 정신으로 합일(合一)하는 순간이다. 또한 이 순간은 연희자의 가슴 깊은 곳에서 춤사위를 통해 풀려 나오던 내적 생명력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순간 사람들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추임새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무현금의 미학’, ‘대음희성의 미학’의 체득(體得)이고 실천이 아니겠는가? 비어있지만 하지 않음이 없는 경지, 이것이 노자 미학의 경계가 아니겠는가?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는(無爲而無不爲)” 경지, “그것을 하려고 하기에 하지 않음으로써 하는(爲之而無爲而爲)” 이런 경지의 미학은 우리의 전통 예술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위적인 음 곧, 5음(五音) 12율에 입각한 질서정연한 음악을 거부하며, 절대적인 음 곧, 대음(大音)를 높이는 도가의 미학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철학적이어서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또한 유가의 미학은 너무도 현실 중심적이다. 이러한 양극(兩極)에 머물지 않고 두 입장을 아우르는 미학이 우리의 미학이다. 이러한 우리의 전통 미학관은 이율곡이 사암(思菴) 박순(朴淳: 1523-1589)의 거문고에 써주었다는 아래의 사암금명(思菴琴銘)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둥당둥 거문고 소리 맑디맑은 옛 소리
한 번 울림이 귀를 깨우치고 두 번 울림이 마음을 맑게 하네.
무현금(無絃琴)은 너무 맑고, 번곡(繁曲)은 지나치게 번잡하구나.
내가 이 금(琴)을 연주하면 누가 마음으로 감상해줄까.
사양(師襄)을 생각하매 푸른 바다에 구름이 깊구나.
곧, ‘무현금은 너무나 맑고 번곡은 지나치게 번잡하다’는 것은 양극을 벗어나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미학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두 미학의 전통이 잘 조화된 것이 우리의 춤과 음악이다. 이어지는 춤사위나 음은 인위적인 질서를 따라가되, 시ㆍ공간적인 여백에서 우리 전통 예술 미학의 백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예술의 궁극적 미학은 ‘무현금의 미학’, ‘대음희성의 미학’에 맞추어져야 한다. 이런 ‘여백의 미학’에 대한 자각과 체득(體得)이 없이는, 화공(畵工), 악공(樂工), 기녀(妓女)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 동양의 전통적인 미학관이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이 현대적인 의미에서 신분제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미학의 정수(精髓)는 우리가 살려나가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동양 예술 미학의 두 전통인 유가의 ‘역의 미학’과 도가의 ‘무현금/대음희성의 미학’을 아우르며 독특한 미학을 지니고 있다. 이제껏 이러한 미학은 몇몇 눈이 트이고 귀가 뚫린 사람들이나 알아보고 듣는 것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미학은 양반사대부들만의 전용물이 아니라 판소리, 살풀이 등 모든 음악에서 통용될 수 있는 전통예술미학으로 정립해가야 한다.
이제는 전통 예술의 신비적인 아우라(aura)를 벗기고 누구에게나 설명 가능하고 이해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전통 미학을 이론화하고 예술철학, 미학, 문화철학으로 정립해야 한다. 5000년을 이어온 이런 우리의 전통 미학이야말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이나 중국과도 다른 우리의 미학이며, 이런 바탕 위에서 우리의 고유한 춤, 소리, 장단의 멋과 맛을 이어 온 것이다. 우리만의 미학은 3분박, 농현 기법, 춤사위의 여백 속에 이미 농축되어 있다. 예를 들어, 농현 기법이 가장 ‘우리적인 것’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중국과 북한에서 각기 다르게 개량된 해금(奚琴)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중국에서 개량된 해금의 경우 (1) 두 줄 사이에 갇혀있던 활대를 개방하여 서양의 바이올린과 같이 자유롭게 하고, (2) 지판에 현을 손가락으로 압착하여 활대로 마찰하는 연주 기법으로 변형하고, (3) 쇠줄이 4개로 되어있다. 이를 통해서 바이올린이 연주할 수 있는 모든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되어있다. 결국 ‘해금의 바이올린화(化)’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똑같은 해금을 전혀 다르게 개량해낸다. 북한에서는 음역을 확대하기 위해서 저음을 담당하는 대해금에서부터 중해금, 소해금의 3가지로 개량하고, 울림통도 크게 하여 음량도 늘렸다. 또한 앞의 (1), (2), (3)도 똑같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개량의 이면에는 중국과는 다른 점이 숨겨져 있다. 곧 농현 기법을 완만히 할 수 있도록 ‘지판을 용수철로 움직이게’ 한 것이다. 이 부분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옮긴다.
줄은 굵기가 서로 다른 4개의 금속 줄로 되어있어 종래의 해금에 비하여 넓은 음역에서
물론 그 ‘시간적 여백’은 글자그대로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서화담이 지적한 바와 같이 ‘무형으로 음악을 하는 것’이고 ‘소리 없는 것을 듣는 것’이며 ‘현의 현을 써서 연주하는 것’이자 ‘음의 음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악(樂)의 체(體)만 있고 용(用)은 버린’(在體去用) 경지인 것이다.
우리의 춤에서도 이런 ‘비어있으나 비어있지 않은 여백의 미학’은 똑같이 적용된다. 동양화가 ‘공간의 여백’을 특징으로 하고, 전통 음악이 ‘시간의 여백’을 특징으로 한다면, 우리 춤은 ‘시간과 공간의 여백’을 아우르는 것이다. 춤사위가 진행되다가 숨죽이듯 멈춰서는 그 순간, 마치 춤사위의 시간적 진행도 공간적 움직임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멈춤 속에서는 이미 단순한 몸놀림으로는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경지가 들어가 있다. 서화담의 말을 빌면 ‘고요 속에 움직임을 함축시킨 것’(靜其含動)이다.
이 ‘멈춤 없는 멈춤’의 순간이야말로 연희자가 단순한 춤사위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를 온 몸으로 체화(體化)하고 정신으로 합일(合一)하는 순간이다. 또한 이 순간은 연희자의 가슴 깊은 곳에서 춤사위를 통해 풀려 나오던 내적 생명력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순간 사람들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추임새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무현금의 미학’, ‘대음희성의 미학’의 체득(體得)이고 실천이 아니겠는가? 비어있지만 하지 않음이 없는 경지, 이것이 노자 미학의 경계가 아니겠는가?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는(無爲而無不爲)” 경지, “그것을 하려고 하기에 하지 않음으로써 하는(爲之而無爲而爲)” 이런 경지의 미학은 우리의 전통 예술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위적인 음 곧, 5음(五音) 12율에 입각한 질서정연한 음악을 거부하며, 절대적인 음 곧, 대음(大音)를 높이는 도가의 미학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철학적이어서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또한 유가의 미학은 너무도 현실 중심적이다. 이러한 양극(兩極)에 머물지 않고 두 입장을 아우르는 미학이 우리의 미학이다. 이러한 우리의 전통 미학관은 이율곡이 사암(思菴) 박순(朴淳: 1523-1589)의 거문고에 써주었다는 아래의 사암금명(思菴琴銘)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둥당둥 거문고 소리 맑디맑은 옛 소리
한 번 울림이 귀를 깨우치고 두 번 울림이 마음을 맑게 하네.
무현금(無絃琴)은 너무 맑고, 번곡(繁曲)은 지나치게 번잡하구나.
내가 이 금(琴)을 연주하면 누가 마음으로 감상해줄까.
사양(師襄)을 생각하매 푸른 바다에 구름이 깊구나.
곧, ‘무현금은 너무나 맑고 번곡은 지나치게 번잡하다’는 것은 양극을 벗어나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미학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두 미학의 전통이 잘 조화된 것이 우리의 춤과 음악이다. 이어지는 춤사위나 음은 인위적인 질서를 따라가되, 시ㆍ공간적인 여백에서 우리 전통 예술 미학의 백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예술의 궁극적 미학은 ‘무현금의 미학’, ‘대음희성의 미학’에 맞추어져야 한다. 이런 ‘여백의 미학’에 대한 자각과 체득(體得)이 없이는, 화공(畵工), 악공(樂工), 기녀(妓女)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 동양의 전통적인 미학관이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이 현대적인 의미에서 신분제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미학의 정수(精髓)는 우리가 살려나가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동양 예술 미학의 두 전통인 유가의 ‘역의 미학’과 도가의 ‘무현금/대음희성의 미학’을 아우르며 독특한 미학을 지니고 있다. 이제껏 이러한 미학은 몇몇 눈이 트이고 귀가 뚫린 사람들이나 알아보고 듣는 것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미학은 양반사대부들만의 전용물이 아니라 판소리, 살풀이 등 모든 음악에서 통용될 수 있는 전통예술미학으로 정립해가야 한다.
이제는 전통 예술의 신비적인 아우라(aura)를 벗기고 누구에게나 설명 가능하고 이해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전통 미학을 이론화하고 예술철학, 미학, 문화철학으로 정립해야 한다. 5000년을 이어온 이런 우리의 전통 미학이야말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이나 중국과도 다른 우리의 미학이며, 이런 바탕 위에서 우리의 고유한 춤, 소리, 장단의 멋과 맛을 이어 온 것이다. 우리만의 미학은 3분박, 농현 기법, 춤사위의 여백 속에 이미 농축되어 있다. 예를 들어, 농현 기법이 가장 ‘우리적인 것’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중국과 북한에서 각기 다르게 개량된 해금(奚琴)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중국에서 개량된 해금의 경우 (1) 두 줄 사이에 갇혀있던 활대를 개방하여 서양의 바이올린과 같이 자유롭게 하고, (2) 지판에 현을 손가락으로 압착하여 활대로 마찰하는 연주 기법으로 변형하고, (3) 쇠줄이 4개로 되어있다. 이를 통해서 바이올린이 연주할 수 있는 모든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되어있다. 결국 ‘해금의 바이올린화(化)’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똑같은 해금을 전혀 다르게 개량해낸다. 북한에서는 음역을 확대하기 위해서 저음을 담당하는 대해금에서부터 중해금, 소해금의 3가지로 개량하고, 울림통도 크게 하여 음량도 늘렸다. 또한 앞의 (1), (2), (3)도 똑같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개량의 이면에는 중국과는 다른 점이 숨겨져 있다. 곧 농현 기법을 완만히 할 수 있도록 ‘지판을 용수철로 움직이게’ 한 것이다. 이 부분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옮긴다.
줄은 굵기가 서로 다른 4개의 금속 줄로 되어있어 종래의 해금에 비하여 넓은 음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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