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한시속의 삶과 의식<<책속의 이규보 요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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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이규보(李奎報)의 시와 진출의식

1) 삶과 의식

2) 진출의지

3)적극적 세계관

4) 시에 대한 애정

본문내용

한 풍속이 점점 이루어져 사문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네.
이백과 두보가 다시 나지 않으니 누구와 함께 진위를 분별하리.
나는 무너진 터를 쌓으려 하는데 누구도 조그만 힘을 보태지 않네.
시경 삼백 편을 왼들 어느 곳에 풍자하여 보익하겠는가.
내 혼자서 할 수는 있겠지만 남들은 반드시 비웃으리라.
作詩尤所難 語意得雙美 含蓄意苟深 咀嚼味愈粹 意立語不圓 澁莫行其意 就中所可後 雕刻華艶耳 華艶豈必排 頗亦費精思 攬華遺其實 所以失詩旨 邇來作者輩 不思風雅義 外飾假丹靑 求中一時嗜 意本得於天 難可率爾致 自得之難 因之事綺靡 以此眩諸人 欲掩意所 此俗已成 斯文垂墮地 李杜不復生 誰與辨眞僞 我欲築頹基 無人助一 誦詩三百篇 何處補諷刺 自行亦云可 孤唱人必 (東國李相國文集, 446-447쪽)
이 시에서는 시 짓는 법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있는데 시로 쓴 시론이라 하겠다.
시에서 뜻이 가장 중요하고 그것은 기(氣)의 우열에 좌우되는 것이며, 기는 타고나는 것으로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인의 타고난 기의 우열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글을 다듬는 기교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 시의 처음 석 줄에는 뜻이 함축적이어야 하고 여기에 말이 원숙하게 어울려야 한다고 하여 뜻을 중시한 점에서는 백운소설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뜻과 말이 함께 아름다워야 한다고 한 것은 다르다. 다음 다섯 줄에는 문장을 꾸미는 것이 뜻을 세우는 것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으로 이는 백운소설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다. 그리고 당시의 문장을 꾸미는 풍조를 나무라기도 했다. 그 다음 넉 줄은 뜻은 천역적으로 얻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는 뜻이 기에서 나오고 기는 타고나는 것이라고 백운소설에 부연 설명되어 있다. 끝의 넉 줄은 이백과 두보라면 이런 풍조의 잘못을 고칠 수 있겠지만 자기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하고, 그렇지만 본 뜻도 모르고 시경을 외우기만 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은 남이 비웃더라도 뜻을 위주로 한 시, 기가 빼어나서 함축 있는 의미를 지닌 시를 짓겠다고 했다.
시 짓는 버릇(詩癖)
나이 이미 칠십을 넘었으며 지위 또한 삼공에 올랐으니
이제는 문장을 버릴 만도 한데 어찌하여 아직도 그만두지 못하는가.
아침에는 귀뚜라미처럼 노래하고 저녁이면 솔개같이 읊노라.
떼어버릴 수 없는 시마가 있어 아침저녁으로 남몰래 따르며
한번 몸에 붙자 잠시도 놓아주지 않아 나를 이 지경이 이르게 했네.
날마다 심간을 깎아서 몇 편의 시를 짜내니
기름과 진액이 다시는 몸에 남아있지 않네.
앙상한 뼈에 괴롭게 읊조리는 이러한 내 모습이 참으로 우습구나.
또한 사람을 놀라게 할 말로 천년 뒤에 물려줄 만한 시 못 지었으니
손바닥 어루만지며 혼자 크게 웃다가 웃음을 멈추고 다시 짓는다.
살거나 죽거나 오직 시를 짓는 내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려우리.
年已涉縱心 位亦登台司 始可放雕篆 胡爲不能辭 朝吟類 暮嘯如鳶 無奈有魔者 夙夜潛相隨 一着不暫捨 使我至於斯 日日剝心肝 汁出幾篇詩 滋膏與脂液 不復留膚肌 骨立苦吟 此狀良可嗤 亦無驚人語 足爲千載貽 撫掌自大笑 笑罷復吟之 生死必由是 此病醫難醫
(東國李相國文集, 453쪽)
이 시는 70살 되던 해 지은 시로 평생 동안 시를 짓다보니 버릇이 되어, 진출을 바라지 않아도 될 만한 나이와 지위에 올랐는데도 시 짓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심간을 깎아 시를 짓는 자신의 모습을 탄식한 것이다.
처음 석 줄은 늙고 높은 지위에 올라 문장을 버릴 만도 하지만 귀뚜라미와 솔개같이 노래한다고 하여 자신의 시 짓는 버릇을 소개했다. 가운데 넉 줄은 이 버릇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시를 짓게 하는 귀신에 씌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날마다 마음과 정력을 다 써서 시를 짓는다고 하였다. 끝의 넉 줄은 노년에 이르도록 시를 지었지만 훌륭한 작품도 남기지 못한 채 아직도 괴롭게 시를 짓는 자신의 모습을 자조적으로 표현하고 의원도 이 병을 고치지 못 할 것이라고 했다. 이로써 그의 시에 대한 애정이 거의 병적인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그는 시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지녔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처음에 진출의 수단으로 시작했던 시 짓기가 생활의 기록이나 삶의 위안으로 자리 잡았고, 마침내 삶의 동반자와 같은 시마로 그의 내면에 깃들었음을 알 수 있다.
◇◆
이규보는 고려 중기 무신집권 시절에 활동했던 문인 관료였다. 그는 지방의 한미한 귀족출신으로서 문학적 재능을 발판으로 하여, 당시의 무신정권에 등용되어 새로운 문신 계층의 등장이라는 시대적 요구와 입신양명이라는 개인적 성취를 이룩하기 위하여 벼슬길에 진출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의 시에 나타난 진출의식은 단순한 출세의식이 아니라 도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관직을 원한 것이라고 하겠다. 민족적 자주성이나 백성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민본적 의식을 바탕으로 한 적극적 세계관을 펼치기 위하여 벼슬길에 나섰던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과거에 여러 번 실패하고 마흔이 될 때까지 변변한 벼슬을 갖지 못한 그의 내면에는 벼슬길에 나아가려는 진출의식이 간절했고, 이러한 의식이 드러난 시가 상당히 많다.
둘째, 그의 시들 중에는 국가와 백성의 어려움을 절감하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적극적 세계관을 드러낸 작품이 많이 있다.
셋째, 그는 시를 생활의 기록이나 위안으로 생각하였고 참신하고 독창적인 뜻을 중시하였는데, 스스로 평생 동안 그러한 시를 쓰고자 노력하였다.
끝으로 그의 시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해보면 먼저 그의 적극적 세계관에 대한 역사적 한계다. 그의 적극적 자세는 결국 집권 무신정권에 대한 아부이며 그의 출세는 무신정권의 사인적(使人的) 차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과 신의(新意)를 내세웠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규보는 고려조를 대표할 만한 뛰어난 문인이다. 적극적인 세계관으로 국가적 현실과 개인적 운명을 열어간, 고려중기의 새로운 유형으로 등장한 사대부 문인의 선두 주자이며, 한시문학에 더 없는 애정을 가지고 그 가치를 고양하여 국가 민족에 이바지하려 했던 전형적인 문인 관료라 할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 작품 속에서 적극적인 진출의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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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12.18
  • 저작시기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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