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동서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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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국과 동서문명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ㅡ 고대 그리스 제국과 문화

ㅡ 로마 제국의 형성과 발전

ㅡ 진한제국과 황제지배체제의 형성

본문내용

황제는 B.C. 214년, 현재의 광동과 광서 및 베트남 북부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남월에 군대를 파견하여 진의 지배하에 복속시켰다.
다음으로는 여산릉(驪山陵)과 아방궁(阿房宮)을 건설했다. 아방궁은 B.C. 212년 효공 이래의 수도였던 함양이 좁다는 이유로 새로운 궁전의 조영을 개시하였다. 아방궁이란 그 전전부분인데, 그 지명을 취한 임시호칭인데, 준공되기 전에 진이 멸망해버렸기 때문에 정식명칭은 없다. 그 규모는 동서 약 690m, 남북 약 115m로서 1만 명이 앉을 수 있는 거대한 궁이었다. 아방궁이 지상의 궁전이라면 지하궁전으로서 시황제의 즉위와 동시에 착공된 것이 여산릉이다. 소위 시황제의 능이다.
만리장성과 치도의 건설 등은 통일중국의 유지와 미래를 위한 사업이었지만, 아방궁과 여산릉은 확실히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약간의 사치적인 성격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들이 약 10년이라는 단기간에 대규모로 진행됨에 따라 엄청난 국력의 소모가 있었음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막대한 비용은 농민에 대한 중과세로 나타났고, 노동력은 의무적으로 강제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여산릉과 아방궁의 건설에 죄수 70만이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다른 토목공사까지 합치면 연인원 300만 정도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당시 진의 호구수는 4백만 호, 2천만 명 정도였다고 추산되므로, 약 15% 정도의 인원이 동원되었고, 더욱이 노동가능한 연령층이 동원된 것을 감안하면 1호당 1명꼴로 징발된 셈이다. 이세황제는 이러한 토목공사를 계승하였으며, 가혹한 법치와 함께 과도한 중세와 징발에 따른 농민의 부담은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진에 대한 반항의 기치를 든 것은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라는 두 빈농이었다. 이세황제 원년(B.C. 209)에 회수에서 가까운 대택향에서 두 사람은 북변을 수비하기 위해 징발된 농민 900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가혹한 진의 통치에 대한 반항에서 비롯된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이다. 두 사람은 모두 초나라 출신이었으므로 초나라를 확장한다는 의미의 장초를 국호로 삼아, 사방에 봉기 참여를 호소하였다. 과중한 노역과 가혹한 법치에 시달리고 있던 농민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를 살해하고 이에 호응하였다. 이 중 강소성 패현에서 병사를 일으킨 유방과 강소성 소주 부근 오중에서 거병한 항우가 가장 유력하였다.
그러나 진승과 오광의 봉기는 주력군이 진군의 반격을 받아 패배함으로써 불과 반 년 만에 살해되고 그들이 세웠던 농민정권은 붕괴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봉기는 각지의 반진 봉기를 유발하여, 마침내 B.C. 206년 진은 멸망했다. 또한 단기간이지만 왕조를 수립한 진승의 행동은 이후 유방에 의한 한왕조의 성립의 선구가 되었다. 진승의 장초정권이 멸망하자 항우와 유방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항우는 초나라에서 대대로 장군을 지냈던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신장이 8척(184㎝)이고 괴력을 지녔다고 한다. 유방도 초나라 출신이기는 하지만 농민 출신이었다. 어릴 때 유협이 되어 떠돌아 다니다가 향리에 돌아와 치안을 담당하는 정장을 지냈지만, 후에 군도의 수령이 되었다.
항우와 유방은 초의 회왕을 맹주로 하고 먼저 진의 수도인 함양에 입성하는 사람이 진의 본거지인 관중의 왕이 되기로 약속하였다. 항우는 진의 주력군을 격파하면서 진격하였지만, 유방은 진왕실의 내분을 틈타 먼저 함양에 도착하였다. 유방은 진의 궁전이나 창고에 봉인을 하여 이를 보전하는 데 주력했고, 또한 진의 가혹한 법치에 시달렸던 사람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법삼장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법삼장이란 진의 법률은 모두 폐지하고,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 상해입힌 자와 도둑질을 한 자는 각각 정도에 따라 처벌한다는 원칙이자 약속이었다. 유방보다 1개월 늦게 함곡관에 도착한 항우는 4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자웅을 겨루려고 하였다. 열세인 상황에서 유방은 항우의 진영으로 나아가 홍문에서 회견하였다. 이를 역사상 유명한 홍문지회라고 하는데, 항우는 결국 자신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유방을 죽일 기회를 놓치게 되었고, 이후 함양으로 진격하여 진 왕조를 멸망시켰다.
- 한나라의 건국과 발전 -
진(秦) 말기에 진승, 오광이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키자 각지에서 무장들이 봉기하였다.한고조 유방도 이러한 무장 중 하나였다. 유방은 원래 농가태생으로 장년에 진의 하급관리
가 되었으며 진시황릉의 공사에 인부 호송 책임을 담당했었다. 각지에서 군웅이 봉기하자
유방도 패땅에서 패공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그후 항양(항우의 숙부), 항우와 연합세력을 구축하여 진나라를 타도하였는데 항우의 군대가 진의 주력부대와 전투를 벌이는 사이 유방은 항우보다 먼저 수도 함양을 함락시키고 진왕 자영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이보다 조금 늦게 함양에 이른 항우는 홍문에서 유방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아방궁을 불태웠으며 팽성에 도읍하여 서초패왕이라 칭하였다. 유방은 BC 206년 항우로부터 한왕으로 봉해졌으나, 그 후 4년 동안 항우와의 쟁패전에서 장양, 한신 등의 도움을 받아 해하에서 항우를
대파하고 천하통일을 이루었다. BC 202년 유방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장안에 도읍하였다.(BC 202년) 한 왕조의 통치조직은 대체로 진을 이어받은 군현제가 중심이었으나 한 왕조 건설에 공이 큰 공신들은 제후왕과 열후로 봉해졌다. 이것이 이른 바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합시킨 군국제이다. 하지만 유방 생전에 공신들이 모두 멸망함으로써 제후왕은 모두 유씨가 봉해지게 된다. 그후 제후황은 한왕일족 출신자에 한정된다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다.
5대 문제는 여씨 외척세력을 모두 축출해내고 백성을 위한 통치에 힘써 사마천으로부터 인제라는 평가를 들었다. 6대 경제 때에 이르러서는 내정이 안정되어 국고가 풍족해졌으며 조착을 등용하여 제후권력을 통제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이로 인해 오초7국의 난이 일어났으며 난이 평정된 이후에는 제후왕의 세력을 삭감하였다. 7대 무제 때에는 제후왕의 통치 권력이 완전히 없어지고 군국제는 군현제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
7대 무제는 수많은 북벌을 단행하여 한제국의 영역을 최대로 넓혔다. 수많은 원정 끝에 흉노세력을 고비사막으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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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12.29
  • 저작시기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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