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성격
Ⅲ.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역사관
1. 기독교와 역사의 한계
2. 이스라엘에서부터의 역사관
3. 그리스도에 이르는 역사관
4. 바울의 역사관
5. 어거스틴의 역사관
6. 비데의 역사관
7. 단테의 역사관
8. 세속주의 역사관
9. 마르크스와 공산주의 역사관
Ⅳ. 그리스도교(기독교)의 경제윤리
Ⅴ.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제례(제사)
Ⅵ.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영적 침체
1. 영성 신학자 리차드 포스터의 견해
2. 목회자 릭워렌 목사의 견해
Ⅶ. 그리스도교(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막시즘)
Ⅷ. 그리스도교(기독교)와 이수정
Ⅸ. 결론
참고문헌
Ⅱ.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성격
Ⅲ.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역사관
1. 기독교와 역사의 한계
2. 이스라엘에서부터의 역사관
3. 그리스도에 이르는 역사관
4. 바울의 역사관
5. 어거스틴의 역사관
6. 비데의 역사관
7. 단테의 역사관
8. 세속주의 역사관
9. 마르크스와 공산주의 역사관
Ⅳ. 그리스도교(기독교)의 경제윤리
Ⅴ.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제례(제사)
Ⅵ.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영적 침체
1. 영성 신학자 리차드 포스터의 견해
2. 목회자 릭워렌 목사의 견해
Ⅶ. 그리스도교(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막시즘)
Ⅷ. 그리스도교(기독교)와 이수정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이수정
이수정은 1882년 9월 박영효 수신사 일행을 따라 일본에 건너갈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는 일본에 도착하자 일본 농학계의 대표적 인물인 쯔다 박사를 만났다. 쯔다박사는 1867년에 일본 최초의 농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그해에 감리교 선교사인 쏘퍼(Jurius Soper)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독실한 신앙을 구유하게 된 인물이었다.
이수정이가 그의 농학교에 갔을 때 강당 벽상에 걸려있는 족자에 눈이 쏠렸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한문으로 된 상상보훈의 글은 구구절절이 인간의 최대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금언명구임에 틀림없었다.
이수정은 수신사 일행이 돌아간 다음 그 어느 날에 산상보훈이 그리워 몽매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쯔다박사의 농학교를 다시 찾았다. 일행은약 3개월의 체재기간이 지난 후 모두 귀환하였으나 이수정에게는 일본에 잔류하라고 하는 정부의 특별훈령이 내렸다.
쯔다박사는 이수정과의 담론을 통하여 그의 박학유식에 크게 놀랐으며 더구나 그가 심각하게 묻는 산상보훈에 관한 열의에 더욱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 수정은 기독교의 신앙교리에 관하여 논의를 거듭하다가, 붓을 들어 시 한 구를 써서 쯔다박사에게 주었다.(종덕문=농학교안에서 생명 빛을 찾았으니 마음대로 경작할 복된 발이 끝없이 전개되도다. 기쁨으로 몸을 비어 맞아주던 그 일을 밝은 날 아참에 생각한다면 그 느낌이야 또 다른 감회가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이수정의 시는 곧 칠일잡보에 게재되어 일본교계에 일대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그는 그 후에 동경제국 대학에서 한국어를 교수하는 직을 맡게 되었으며 일본학계나 교계로부터 받은 영예나 지위는 대단하였다. 그의 명성은 날로 떨치게 되었으며 도처에서 사랑과 대우를 받게 되었다. 특히 그의 글씨는 김옥균의 것처럼 명필이어서 일본사람들은 그것을 얻으려고 앞을 다투었다. 그리고 일본의 신문들은 그가 쓴 문장을 얻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이수정은 1884년 8월 [조선일본 선린호화] 라는 한국어 학습서를 저술하였고 또한 1887년도 간행인 [명치자전]의 한극 음훈 표기를 맡아 정리하였다. 그는 그 외에도 [금어신화] 등 한국의 풍습과 제도에 관한 여려가지 글을 발표하여 일본 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올바르게 인도하는데 무척이나 애쓴 흔적을 남겨놓고 있다.
이수정은 1883년 4월 29일 세례를 받은 지 10일 후인 5월 8일에 제3회 일본 전국 기독교 신도대회에 귀빈으로 초대되었다. 대회는 동경 싱에이 교회에서 19일까지 12일간 계속되었으며 참석자는 6백 명을 헤아리는 실로 공전의 대성황이었다. 매일 오전에도 기도회와 회의 진행이 있었고 오후에는 설교대회가 열렸다. 연사들은 우찌무라 니이자마, 가나무라 미야가와 고자끼 등 당대의 쟁쟁한 명사들이었다.
이러한 대회에 이수정이가 초빙되었음은 타격적 대우이었으며 이는쯔다 박사가 특별히 알선한 결과이었다. 통관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올 때를 띤 한국인 특유의 이수정의 의장과 천사와 같이 빛나는 얼굴은일본교계의 지도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5월 16일 이수정은 한국어로 기도를 올렸고 기념촬영을 할 때, 그는 앞줄 중앙에 귀빈의 대우를 받아 이채를 띠었다.
특히 이수정의 연설은 일동에게 말할 수 없이 큰 감명을 주었다. 이연설은 그의 완전한 신앙고백으로서 한국교회사상 중대한 문헌이 되어있다. 그 장문을 게재하지 못하나 [김광수 작, 한국기독교전래사(기독교교문사 발행)] PP.279-284에 원문과 번역한 글이 함께 실려있어 참고가 될 것이다.
Ⅸ. 결론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능동적인 소수 한국인 구도자들의 활약에 힘입어 복음이 수용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선교사들의 본격적인 선교활동이 전개되었다는 점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천주교나, 개신교회나 마찬가지 현상이었다.
한국 천주교는 1784년 9월 이승훈이 이 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비롯되었다. 이벽에게는 조선 천주교회의 예비자라는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으로, 권일신에게는 프란체스코 사베리오라는 세례명이 각각 주어졌다. 이 세례가 있은 이후로 자생적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며 평의회적 조직을 지켜나갔다.
한국 개신교는 1879년을 기원으로 매킨타이어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은 인원, 즉 백홍준, 이응찬과 1882년에 로스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은 김청송, 서상륜이 권서인으로서, 성경번역인으로서 한국개신교의 기초를 닦았고 이들의 노력으로 1885년에는 소래교회가 탄생하였으며, 정확치는 않으나 1889년에 언더우드가 의주를 방문했을 때 이미 이 곳에는 자생적 공동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887년 이후 국외에서 시작된 한국 기독교의 구심이 국내로 옮겨지며 한국교회는 한 교회를 형성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그것은 장로교와 감리교라는 두 교파로 나누어진 상황과 그리고 여러 교파의 선교과정에서 보인 지역 구분으로 인한 분파현상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주체적 활동이 올바르게 평가되지 못했다.
한국에 들어온 그리스도교 신앙은 여러 가지의 모진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면서 독특한 신앙전통을 이루어냈다. 이 신앙전통은 우리들의 마음 밭 속에서 이미 결실을 얻었다는 증거이다. 이 결실은 영아소동 후의 스크랜톤의 표현대로 ‘민중 시험기’(the time of probation with people)를 겪은 까닭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100세에 얻은 자식이 자랑스럽게 자라고 있구나.’ 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걱정하며 자식을 산 제사 지내라는 야훼 하나님의 명령이 오늘도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 하다.
참고문헌
김광식(1989), 기독교 사상, 서울 : 종로서적
유동식, 풍류신학, 한국신학, 이것이다!, 2005년 4월 29일에 있었던 한국문화신학회 주최 강연회 발제물
이근미(2005), 큰 교회 큰 목사 이야기, 서울 : 월간조선사
정하은(1990), 전후 기독교 윤리학의 신국면, 현대와 신학 제1집, 서울 : 유니온 학술자료원
폴 테이러, 김영신 옮김, 윤리학의 기본원리, 서광사
한길사(1988), 계몽과 해방 : 헤겔과 마르크스와 베버의 동양세계관
이수정은 1882년 9월 박영효 수신사 일행을 따라 일본에 건너갈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는 일본에 도착하자 일본 농학계의 대표적 인물인 쯔다 박사를 만났다. 쯔다박사는 1867년에 일본 최초의 농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그해에 감리교 선교사인 쏘퍼(Jurius Soper)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독실한 신앙을 구유하게 된 인물이었다.
이수정이가 그의 농학교에 갔을 때 강당 벽상에 걸려있는 족자에 눈이 쏠렸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한문으로 된 상상보훈의 글은 구구절절이 인간의 최대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금언명구임에 틀림없었다.
이수정은 수신사 일행이 돌아간 다음 그 어느 날에 산상보훈이 그리워 몽매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쯔다박사의 농학교를 다시 찾았다. 일행은약 3개월의 체재기간이 지난 후 모두 귀환하였으나 이수정에게는 일본에 잔류하라고 하는 정부의 특별훈령이 내렸다.
쯔다박사는 이수정과의 담론을 통하여 그의 박학유식에 크게 놀랐으며 더구나 그가 심각하게 묻는 산상보훈에 관한 열의에 더욱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 수정은 기독교의 신앙교리에 관하여 논의를 거듭하다가, 붓을 들어 시 한 구를 써서 쯔다박사에게 주었다.(종덕문=농학교안에서 생명 빛을 찾았으니 마음대로 경작할 복된 발이 끝없이 전개되도다. 기쁨으로 몸을 비어 맞아주던 그 일을 밝은 날 아참에 생각한다면 그 느낌이야 또 다른 감회가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이수정의 시는 곧 칠일잡보에 게재되어 일본교계에 일대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그는 그 후에 동경제국 대학에서 한국어를 교수하는 직을 맡게 되었으며 일본학계나 교계로부터 받은 영예나 지위는 대단하였다. 그의 명성은 날로 떨치게 되었으며 도처에서 사랑과 대우를 받게 되었다. 특히 그의 글씨는 김옥균의 것처럼 명필이어서 일본사람들은 그것을 얻으려고 앞을 다투었다. 그리고 일본의 신문들은 그가 쓴 문장을 얻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이수정은 1884년 8월 [조선일본 선린호화] 라는 한국어 학습서를 저술하였고 또한 1887년도 간행인 [명치자전]의 한극 음훈 표기를 맡아 정리하였다. 그는 그 외에도 [금어신화] 등 한국의 풍습과 제도에 관한 여려가지 글을 발표하여 일본 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올바르게 인도하는데 무척이나 애쓴 흔적을 남겨놓고 있다.
이수정은 1883년 4월 29일 세례를 받은 지 10일 후인 5월 8일에 제3회 일본 전국 기독교 신도대회에 귀빈으로 초대되었다. 대회는 동경 싱에이 교회에서 19일까지 12일간 계속되었으며 참석자는 6백 명을 헤아리는 실로 공전의 대성황이었다. 매일 오전에도 기도회와 회의 진행이 있었고 오후에는 설교대회가 열렸다. 연사들은 우찌무라 니이자마, 가나무라 미야가와 고자끼 등 당대의 쟁쟁한 명사들이었다.
이러한 대회에 이수정이가 초빙되었음은 타격적 대우이었으며 이는쯔다 박사가 특별히 알선한 결과이었다. 통관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올 때를 띤 한국인 특유의 이수정의 의장과 천사와 같이 빛나는 얼굴은일본교계의 지도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5월 16일 이수정은 한국어로 기도를 올렸고 기념촬영을 할 때, 그는 앞줄 중앙에 귀빈의 대우를 받아 이채를 띠었다.
특히 이수정의 연설은 일동에게 말할 수 없이 큰 감명을 주었다. 이연설은 그의 완전한 신앙고백으로서 한국교회사상 중대한 문헌이 되어있다. 그 장문을 게재하지 못하나 [김광수 작, 한국기독교전래사(기독교교문사 발행)] PP.279-284에 원문과 번역한 글이 함께 실려있어 참고가 될 것이다.
Ⅸ. 결론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능동적인 소수 한국인 구도자들의 활약에 힘입어 복음이 수용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선교사들의 본격적인 선교활동이 전개되었다는 점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천주교나, 개신교회나 마찬가지 현상이었다.
한국 천주교는 1784년 9월 이승훈이 이 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비롯되었다. 이벽에게는 조선 천주교회의 예비자라는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으로, 권일신에게는 프란체스코 사베리오라는 세례명이 각각 주어졌다. 이 세례가 있은 이후로 자생적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며 평의회적 조직을 지켜나갔다.
한국 개신교는 1879년을 기원으로 매킨타이어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은 인원, 즉 백홍준, 이응찬과 1882년에 로스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은 김청송, 서상륜이 권서인으로서, 성경번역인으로서 한국개신교의 기초를 닦았고 이들의 노력으로 1885년에는 소래교회가 탄생하였으며, 정확치는 않으나 1889년에 언더우드가 의주를 방문했을 때 이미 이 곳에는 자생적 공동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887년 이후 국외에서 시작된 한국 기독교의 구심이 국내로 옮겨지며 한국교회는 한 교회를 형성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그것은 장로교와 감리교라는 두 교파로 나누어진 상황과 그리고 여러 교파의 선교과정에서 보인 지역 구분으로 인한 분파현상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주체적 활동이 올바르게 평가되지 못했다.
한국에 들어온 그리스도교 신앙은 여러 가지의 모진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면서 독특한 신앙전통을 이루어냈다. 이 신앙전통은 우리들의 마음 밭 속에서 이미 결실을 얻었다는 증거이다. 이 결실은 영아소동 후의 스크랜톤의 표현대로 ‘민중 시험기’(the time of probation with people)를 겪은 까닭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100세에 얻은 자식이 자랑스럽게 자라고 있구나.’ 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걱정하며 자식을 산 제사 지내라는 야훼 하나님의 명령이 오늘도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 하다.
참고문헌
김광식(1989), 기독교 사상, 서울 : 종로서적
유동식, 풍류신학, 한국신학, 이것이다!, 2005년 4월 29일에 있었던 한국문화신학회 주최 강연회 발제물
이근미(2005), 큰 교회 큰 목사 이야기, 서울 : 월간조선사
정하은(1990), 전후 기독교 윤리학의 신국면, 현대와 신학 제1집, 서울 : 유니온 학술자료원
폴 테이러, 김영신 옮김, 윤리학의 기본원리, 서광사
한길사(1988), 계몽과 해방 : 헤겔과 마르크스와 베버의 동양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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