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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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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유가의 윤리학

Ⅱ. 유가의 사상

Ⅲ. 유가의 인의

Ⅳ. 유가의 대비

Ⅴ. 유가의 변질

Ⅵ. 유가의 국가개념

Ⅶ. 유가와 제자백가

Ⅷ. 유가와 묵가 및 도가

참고문헌

본문내용

하는 까닭이 바로 도덕 행위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한 개인의 행위가 도덕 행위라면 그것은 반드시 무조건적인 의무이어야 한다. 이는 곧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즉 자신의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행위는 결코 도덕적이 아니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같은 행위를 했다면 이것이 그에게는 의무적이지만, 만약 어떤 목적 달성을 원하지 않고 이런 일을 했다면 그에게 이 일은 의무적이지 않다. 반드시 무조건적으로 행한 의무의 이행이었다 해도 단지 의로운 행위에 부합되는 것일 뿐 의로운 행위는 아니다.
공자는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고 했고, 맹자는 “닭이 울자마자 일어나 열심히 선을 행하는 자는 순(舜)을 따르는 무리들이고 이를 추구하는 자는 도적의 무리이다. 순과 도적의 차이는 다른 것이 없다. 단지 이와 선의 차이 일뿐이다”고 하였다. 또한 공자는 민중의 생활이 넉넉함과 인구의 많음을 주의했다. 인구가 많고 부유함이 어찌 민중의 이가 아닌가? 맹자도 양혜왕을 만났을 때, 왕이 “노인장께서 천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장차 우리 나라에 무슨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맹자는 “왕은 하필이면 이로움을 말하십니까? 오직 인과 의가 있을 따름입니다.”하고 대답했다. 맹자는 양의 혜왕에게 오늘날의 경제 계획 같은 것을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사람들로 하여금 “50세가 된 사람은 비단 옷을 입고 70세가 된 사람은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며 “자녀를 키우고 죽은 이를 장사함에 유감이 없게” 하라는 것이었다.
예는 사람이 규정한 행위의 규범으로서 의를 나타낸다. 예의 내용은 ‘남을 이롭게 함’이다. 예기의(중니연거)에서 공자는 예란 중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위에서 의는 마땅함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마땅함이란 ‘때를 헤아려 알맞게 함’이라는 뜻이다. 지는 인·의·예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것을 비추어 보면 인·의·예·지는 표면적으로는 비록 나란히 말하나 실제로는 층차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맹자는 깨달았던 것이다. 맹자는 “인의 실제적인 내용은 부모를 섬기는 것이요, 의의 실제적 내용은 형을 따르는 것이요, 지의 실제적 내용은 이 두 가지를 알아서 결코 버리지 않음이요, 예의 실제적 내용은 이 두 가지를 꾸며 나타내는 것이다”라 했다. 이 말은 인의와 예지의 층차가 같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논어의 “나는 열 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 장과 <맹자>의 “호연지기를 기른다.”장을 이용하여 공자와 맹자의 경계를 밝혀 보고자 한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 서른에는 주장이 섰다. 마흔에는 미혹하지 않았다. 쉰에는 천명을 알았다. 예순에는 이순(耳順)했다. 일흔에는 마음이 원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를 넘기지 않았다.” 이는 공자가 일생 동안 도달해 놓은 경계의 변화를 스스로 서술한 것이다. 이른바 서른, 마흔 등은 시간적 경과의 큰 단위를 말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그런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의 경계는 십년마다 한 단계씩 변해갔다.
맹자가 자신의 경계에 대해서 자술한 것은 <맹자>의 <호연>장에 보인다. ‘호연지기’는 맹자 특유의 용어이다. 호연지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맹자도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맹자는 “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고 했는데 호연지기의 기는 맹시사 등의 수기(守氣)의 기와 성질상 같은 것이다. 그 다른 점은 그것이 호연한다는데 있다. 호연이란 ‘크다’는 말이다. 그것이 큰 까닭은 무엇인가? 맹시사 등이 지키는 기는 인간과의 관계에 관련된 것이다. 맹시사 등의 기를 지니면 사회 생활에서 당당하게 두려움 없이 설 수 있을 것이며, 호연지기가 있다면 우주 간에 당당히 서서 조금도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호연지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경계에 서게 하므로 그 기가 지극히 굳세어 잘만 기르면 천지 사이에 가득 차게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맹자가 말한 경지는 공자가 말한 경지보다 더 높다. 공자의 천은 주재적 천이며, 종교적 색채를 완전히 배제하지 못했다. 그의 사상은 다소 회화적·도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말한 최고의 경지는 단지 ‘하늘을 섬김’이나 ‘하늘을 즐김’의 경계와 유사하다. 그러나 맹자가 말한 경지는 ‘하늘과 같아짐’의 경계라 말할 수 있다.
맹자와 공자는 거의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두 사람 모두 주로 훌륭한 정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맹자는 그러한 정부는 인민을 위해서, 그리고 인민의 승인을 얻어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백성은 나라에서 가장 높으며 군주는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군주를 전능한 상전이라 했으며, 치자에 대한 백성의 신임이 중요하다고 인정했을 뿐이다. 결국 둘은 완전히 반대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둘째로 맹자는 논리적인 다음 귀결로서 인민과 신하에게 사악한 왕을 폐할 권리를 주었다. 이 혁명적인 개념을 옹호함으로써 맹자는 거의 현대적 의미에 있어서의 민주주의자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공자는 정적이고 변함없는 관계를 밝혔을 뿐이다. 셋째로 두 사람 다 훌륭한 정부는 물심양면의 복지에 의존한다는 견해를 용인했지만 맹자는 그의 선생보다 훨씬 자세했다. 그에게는 백성이 부유하고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했다. 오히려 그는 정전법, 조세 관리, 자원 보존과 같은 분야에서 그의 신념을 말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공자에게 ‘인도적인 것’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궁극적인 목표였다면, 맹자는 그의 성선설 이론에 초점을 두었다.
Ⅳ. 유가의 대비
墨子는 孔子가 사망한 직후에 태어나 墨學이라는 철학을 창시하였으며, 墨家라는 견고하게 조직된 집단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墨子는 자기가 누구보다도 세상의 악을 고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고 믿었으며 孔子와는 달리 다른 사람에게 자유로운 선택이나 판단의 여지를 허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한 墨子는 사람의 행동에는 반드시 天의 상벌이 따른다고 주장하는데, 天災가 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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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4.16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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