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무용평론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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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적 무용평론에 관한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서론

1. 주제 설정의 동기

2. 연구 방법

II.본론

1.평론 원리

2.한국 무용평론의 실상과 분석

Ⅲ.결론

1. 판단 기준의 분류

본문내용

.
A. 무녀도
“무녀도는 도대체 나이트 클럽의 쇼인지, 아니면 예술 무용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무녀도가 현대 무용화될 수 있으려면 마땅히 그 미몽의 세계에서 탈출하려는 갈등이 부각되던가, 아니면 프로그램이 표방했듯이 엑스터스가 관중에게 전달되었어야 했다. 무당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입신의 경지로 주변에 자석과도 같은 영향력의 마력을 지닌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로 시작하여 쇼로 끝나 버린 ‘무녀도’는 비교적 산 값으로 쇼를 구경했다는 씁쓸한 느낌을 안겨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B. 전원 조곡
“‘전원 조곡’ 또한 모호하기 짝이 없는 구성이었다. Ashton이 안무했던< syhmpjonic variations>을 연상케 해주기는 했지만 율동의 묘도, 구성의 아름다움도 텅 비어 버린 체 동작의 치졸성이 강조되고 있을 뿐인, 이 무용은 그런 무대 위에 두 대의 피아노와 외국인 한 사람을 등장시켰다는 허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무의미한 동작의 연속에 숨이 막힐 듯 하면서 필자는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던 농아들의 음악 연주를 생각했다. 그 연주에는 음률과 리듬은 있었지만, 음악은 없었다. 그래도 그들이 농아였다는 이유로 형언키 어려운 야릇한 감동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농아도 아닌 무용수들이 엮은, 오직 동작만 있고 무용이 없는 무용동작에서 관객은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
C. 슈퍼 스타
레퍼터리의 핵을 이루는 듯이 보이는 [슈퍼스타]는 그 주제 자체가 저항감을 갖게 했다. 외국의 뮤지컬을 도입해야 할만큼 그렇게 소재가 빈곤한 것일까? 더군다나 그 무용에 있어 안무자 자신의 언어라고는 단 하나도 엿볼 수가 없었다.“
나. 사례 2
제 8회 [홍정희 무용 발표회]에 부치는 평문의 일단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요즈음 우리 무대에는 슈퍼스타의 환상에 취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아무리 눈을 뜨고 보아도 슈퍼스타는커녕 [반짝 반짝 작은 별]조차 제대로 눈에 띄지 않는데도 말이다........중략. 원칙 없이 엮어진 동작의 연결과 여성만으로 구성된 아마존적의 단성 양식(단성 양식)이 어떻게 보면 혁신적이며 진보적인 것으로 착각될 수도 있어 ‘형식을 초월한 운운....’ 하는 어떤 장님의 칭찬을 받기는 했다. 그러나 스스로 눈이 멀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그런 파렴치한 장님들이 계속해서 내용 없는 언어를 나열하거나, 공연자가 그들의 박수 갈채에 귀가 멀어 있는 한, 우리 무대 위에서 무용의 만종들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원숭이를 불러 놓고 고고춤을 추게 한들 형식을 초월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우선 슈퍼스타에의 미몽에서 깨어나 후진들의 진출에 보다 적극성을 보여 주며 무성 무용을 지양하고, 쏠리스트가 배제된 초점 없는 무용에서 탈피하며 창작발표에 앞서 무용을 예술로 이끌어 가기 위한 미학의 정립과 아울러 기본 레퍼토리를 마스터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등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홍교수도 계속해서 독무대를 포착할 것을 고집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후진을 위해서 과감하게 길을 터주고 후배와 제자들의 교육에 정진하면서 안무에 대한 연구에 보다 헌신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일인지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다. 사례 3
[임성남 발레단 공연]에 부치는 평론에서 또 하나의 범례를 찾아보기로 한다. “임성남이 귀국할 시 처음으로 발레를 선 보였을 때,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감동을 맛보았다. 그것은 그가 예술적으로 완벽해서도, 그가 훈련시킨 무용수들이 성숙해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하면서 새로운 무대에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미숙했던 무대를 우리가 보았던 영화 속의 어느 훌륭한 무대보다도 더욱 감동에 겨워, 줄곧 눈물을 머금고 바라보고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어떻게 꽃피고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번의 임성남 공연에서 우리에게는 어떤 전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그러나 어제 올렸던 막이 색깔만 바꾸어 오늘 다시 올랐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공허감을 안겨 줄뿐이었다. 그때의 갖가지 어려웠던 여건, 그것이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때의 여건 그대로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런 대로 얼마나 발전하고 얼마나 달라졌는가? 20여년간 잠자는 동굴 속에서 고스란히 누어 있다가 다시 깨어났다 해도 수긍이 가리만큼 달라진 것이 없다는데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물론 달라진 것이 전혀 없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그 발전 속도가 우리의 기대에 너무 아득히 뒤져 있다면 우리에게는 발전은 커녕 오히려 후퇴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이에 뒤이어 또 다른 평론가가 맞장구를 치고 나왔다.
“달라진 것이 없는 무대인에겐 영광의 은퇴로가 있을 뿐이다.”
“이제 우리가 우리의 [국립 발레단]의 장래를 위해 할 수 있는 말이라면 눈을 가진 사람들의 말대로 임씨는 열려진 은퇴로를 통해 퇴장하라는 권고뿐이다. 이 길만이 그가 할 수 있는 발레에 대한 마지막 봉사의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2)반 응
이상에서 개관해 본 평론 성향은 대한 무용계의 반발을 쉽게 예측해 볼 수가 있다.
“박씨는 그 글에서 필자 개인에 대한 사랑(?)을 유감없이 토로하면서 필자더러 무용계에서 물러날 것을 강요하고 있다. 필자는 그 글을 읽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분함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
반발이랄까 저항이 여기에 이르면 이미 그 원인적 배경이 어디에 있고 시비의 가름이 어느 쪽에 있든 간에 평론의 기능은 역작용으로 나타났다고 풀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술을 평한다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무한한 관점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계승적인 비평의 단계를 넘어서는 누가 옳고 그르고 할 수는 없는 경우가 많겠지요...... 저마다 다른 가치의 싸움이겠지요....... 한편으로 비평하는 분들은 좀더 사랑을 지니고 무대를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무용가에 대한 비평 못지 않게 무용을 보는 관객의 눈을 뜨게 해주는 계몽적, 해설적 기능도 해주어야 되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우리 나라 무용가들이 무용 비평에 대해서 좀 더 허심탄회하게 귀를 기울여 주는 아량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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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4.22
  • 저작시기20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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