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고대 그리스도교(고대 기독교)
1. 사도 시대의 특색
2. 기독교의 기원
3. 기독교와 로마 제국과의 관계(로마 제국이 복음 전파의 도구로 사용된 실증)
1) 판도 확대
2) 교통의 편리
3) 언어 통일
4) 군제통일
5) 유대인의 分散
6) 도덕적 타락, 기독교 동경의 요인이 됨
7) 종교 상태
8) 철학 사상
4. 사도 바울
1) 생애
2) 사업
3) 신학
5. 네로와 도미티아누스의 박해
1) 네로(Nero)의 박해(54-68)
2) 도미티아누스(Domitian) 의 박해(81-96)
6. 예루살렘 멸망
1) 멸망 전 상태
2) 멸망의 원인
3) 멸망의 과정
4) 멸망의 결과 : 70년 9월 8일에 함락
7. 예루살렘 멸망이 기독교에 끼친 영향
8. 사도들의 종말
1) 야고보
2) 베드로
3) 바울
4) 야고보(주의 동생)
5) 유다
6) 안드레
7) 마태
8) 시몬
9) 도마
10) 바돌로매
11) 요한
9. 사도 시대의 예배와 예전
1) 직원
2) 예배
3) 예전
4) 축제(교회 명절)
Ⅲ. 중세 그리스도교(중세 기독교)
Ⅳ. 근대 그리스도교(근대 기독교)
Ⅴ.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이론
1. 배경
1) 복음
2) 두 번째 아담
2. 그리스도의 인격
1)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되시는 근거
2) 그리스도의 인성
3. 그리스도의 사역
1) 그리스도의 구속
2) 그리스도의 죽음
3) 그리스도의 부활
4) 그리스도의 승천
Ⅵ. 그리스도교(기독교)의 하나님
1. 선천적 지식(Innate Knowledge)
2. 후천적 지식(Acquired Knowledge)
Ⅶ.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사회봉사
1. 기독교 사회봉사의 성격
2. 성서에 나타난 기독교 사회봉사 사상
1) 구약에서 나타난 사회봉사와 그 사상
2) 신약에서 나타난 사회봉사와 그 사상
Ⅷ. 그리스도교(기독교)와 타 종교의 비교
1. 범신교에는 힌두교와 불교를 들 수 있다
2. 다신교에는 유교와 도교를 들 수 있다
3. 일신교에는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를 들 수 있다
Ⅸ. 결론
참고문헌
Ⅱ. 고대 그리스도교(고대 기독교)
1. 사도 시대의 특색
2. 기독교의 기원
3. 기독교와 로마 제국과의 관계(로마 제국이 복음 전파의 도구로 사용된 실증)
1) 판도 확대
2) 교통의 편리
3) 언어 통일
4) 군제통일
5) 유대인의 分散
6) 도덕적 타락, 기독교 동경의 요인이 됨
7) 종교 상태
8) 철학 사상
4. 사도 바울
1) 생애
2) 사업
3) 신학
5. 네로와 도미티아누스의 박해
1) 네로(Nero)의 박해(54-68)
2) 도미티아누스(Domitian) 의 박해(81-96)
6. 예루살렘 멸망
1) 멸망 전 상태
2) 멸망의 원인
3) 멸망의 과정
4) 멸망의 결과 : 70년 9월 8일에 함락
7. 예루살렘 멸망이 기독교에 끼친 영향
8. 사도들의 종말
1) 야고보
2) 베드로
3) 바울
4) 야고보(주의 동생)
5) 유다
6) 안드레
7) 마태
8) 시몬
9) 도마
10) 바돌로매
11) 요한
9. 사도 시대의 예배와 예전
1) 직원
2) 예배
3) 예전
4) 축제(교회 명절)
Ⅲ. 중세 그리스도교(중세 기독교)
Ⅳ. 근대 그리스도교(근대 기독교)
Ⅴ.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이론
1. 배경
1) 복음
2) 두 번째 아담
2. 그리스도의 인격
1)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되시는 근거
2) 그리스도의 인성
3. 그리스도의 사역
1) 그리스도의 구속
2) 그리스도의 죽음
3) 그리스도의 부활
4) 그리스도의 승천
Ⅵ. 그리스도교(기독교)의 하나님
1. 선천적 지식(Innate Knowledge)
2. 후천적 지식(Acquired Knowledge)
Ⅶ.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사회봉사
1. 기독교 사회봉사의 성격
2. 성서에 나타난 기독교 사회봉사 사상
1) 구약에서 나타난 사회봉사와 그 사상
2) 신약에서 나타난 사회봉사와 그 사상
Ⅷ. 그리스도교(기독교)와 타 종교의 비교
1. 범신교에는 힌두교와 불교를 들 수 있다
2. 다신교에는 유교와 도교를 들 수 있다
3. 일신교에는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를 들 수 있다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플로부터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던 교황들은 8세기 중반부터 북쪽에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따라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사이의 새로운 동맹관계가 성립되었다. 중세의 기독교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은 크게 두 가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 두 개의 조직체는 다름 아닌 수도원주의와 교황제도였다. 수도원주의와 교황제도는 중세 기독교에 통일성과 지속성을 부여한 것이기도 했다.
이렇듯 교회가 다시금 서방제국의 문화적정치적 중심이 되어 중세 기독교 제국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도 기독교는 몇 가지 중요한 교리적 논쟁을 갖게 된다. 중세 기독교가 겪은 교리적 논쟁들 중 주요한 것은 펠라기우스 논쟁, 기독교 논쟁, 제3장 논쟁, 성상 논쟁 등이다. 이러한 논쟁들은 중세적 분위기 속에서 태동된 것이기는 하지만, 고대 기독교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동방 기독교와 서방 기독교의 갈등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여러 종교회의의 가르침은 동서방 제국의 영내에 있던 교회들에 의해서 널리 받아들여졌으나, 제국의 바깥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제국의 바깥에서 나름의 독자성을 확보해나간 일군의 기독교로는 페르시아 기독교, 아르메니아 기독교, 이디오피아 기독교, 콥트 기독교 등이 있다. 이러한 기독교들이 다양한 성격을 띠게 됨으로써 동서방 기독교의 반목은 날로 심화되었고 이는 전통을 내세우는 비잔틴제국과 신흥 프랑크 왕국 사이의 정치적 경쟁과 아울러 동방과 서방 사이의 뿌리 깊은 불신이 분쟁을 더욱 부채질하는 요소가 되었다. 마침내 최종적인 분열은 11세기에 일어났다. 교황이 남부 이탈리아의 희랍인들에게 라틴 관습을 강요하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세룰라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라틴 교회들을 폐쇄하였다. 이에 항의하기 위하여 훔베르트 추기경이 콘스탄티노플로 왔지만, 훔베르트와 미카엘 세룰라리우스는 서로를 저주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결국 1054년 6월 16일 총대주교가 성찬식을 거행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에 훔베르트 추기경은 성 소피아 성당 제단에 다음과 같은 파문칙서를 놓았다.
그리하여 동방과 서방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이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상호 저주는 1965년 로마 교황 바오로 6세와 동방 정교회의 정교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가 1054년의 파문 처벌을 폐지함에 이르러서야 기각되었다.
Ⅳ. 근대 그리스도교(근대 기독교)
신성로마 제국이 존재하는 한 제왕과 교황의 세력 하에서 루터가 몇몇 제후와 결탁하여 종교 혁명을 일으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구교 내부의 부패와 국수주의의 대두로 제국의 분열이 없었으면 루터의 운동이 뿌리를 박기 힘들었을 것이다. 구교회는 날로 증가하는 불란서 신교도들을 제거하기 위해 1559년 성바돌로매 제이르이 파리에서만 8천명이나 학살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신도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불란서를 채 신교화 하지는 못했으나 1598년에 낭트 칙령에 의하여 신교의 자유를 얻었다. 영국에 있어서는 헨리 8세의 종교개혁으로 성공회를 설립한 후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 때 일대 혁신을 해보았으나 몇 년이 못 되어 그의 누이 메리가 왕위에 오르자 이와 반대로 극단의 교구로 기울어졌다. 엘리자베드 여왕 때 서반아의 무적 함대를 쳐 무찔러 구교가 영국을 다시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16세기의 개혁자들이 전통을 버리고 신앙에만 의존한 데 반하여 17세기에는 이성을 통하여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하려는 영국의 자연신교와 불란서, 독일의 계몽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신학을 이성 하나로써 세우려 하였다.
칸트는 우리 사람들의 마음에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에 대하여 어떤 특정한 형을 꾸며 주는 상대적인 고유한 성질이 있다고 밝혔다. 칸트는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외재한 물건 자체 혹은 실재를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을 알게 됨에 불가하다고 하였다.
슐라이어머하의 종교관은 종교란 사유만도 아니고 행위만도 아니며 양자가 분립되지 않는 상태에 놓인 직관이라 했으며 종교의 본질은 신에게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인데 거기에는 신.인이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 뒤를 이은 리츨은 역사성을 새롭게 강조하여 인문 과학과 신학의 기초를 삼았다. 리츨은 역사를 중시하였지만 헤겔은 역사의 본질을 변증론으로 설명하였다. 새로이 역사 위에 등장한 미국의 기독교는 근세 기독교 발전에 큰 몫을 차지하였다. 제퍼는 대통령 시대의 미국 신학은 청교도들의 칼빈 주의적 경향에 동조하고 있었으나 여기서도 자연 신교적인 유니테리안주의와 대결하게 되어 심각한 변도의 고비를 넘게 되었다. 설교가 무디와 같은 인물들의 영향으로 많은 청년들이 세계 선교에 헌신하게 되어 세계 선교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Ⅴ.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이론
1. 배경
1) 복음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회복시켜 주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2) 두 번째 아담
바울이 그리스도를 서술하는 데 “두 번째 아담”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는 영화롭게 된 분이며 생명을 주시는 영이다.
2. 그리스도의 인격
1)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되시는 근거
-하나님의 이름이 그에게 주어졌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그에게 드려졌다.
-그는 하나님 품성의 자질을 소유하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그의 일로 기록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속성을 소유하셨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과 같이 쓰였다.
-그의 自意識
2) 그리스도의 인성
그리스도가 인간이라는 근거에는
-그는 인간의 부모를 가지고,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
-예수는 정상적인 아이와 똑같이 성장했다.
-그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을 했다.
-그는 육체적인 곤고를 느끼며 살았다.
등이 있다.
3. 그리스도의 사역
1) 그리스도의 구속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 화해의 길은 완전히 열렸다.
2) 그리스도의 죽음
(1)죽음의 의미
하나님의 수난의 종으로서 그는 온 인류의 죄를 대속했다.
“그분(예수)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이렇듯 교회가 다시금 서방제국의 문화적정치적 중심이 되어 중세 기독교 제국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도 기독교는 몇 가지 중요한 교리적 논쟁을 갖게 된다. 중세 기독교가 겪은 교리적 논쟁들 중 주요한 것은 펠라기우스 논쟁, 기독교 논쟁, 제3장 논쟁, 성상 논쟁 등이다. 이러한 논쟁들은 중세적 분위기 속에서 태동된 것이기는 하지만, 고대 기독교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동방 기독교와 서방 기독교의 갈등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여러 종교회의의 가르침은 동서방 제국의 영내에 있던 교회들에 의해서 널리 받아들여졌으나, 제국의 바깥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제국의 바깥에서 나름의 독자성을 확보해나간 일군의 기독교로는 페르시아 기독교, 아르메니아 기독교, 이디오피아 기독교, 콥트 기독교 등이 있다. 이러한 기독교들이 다양한 성격을 띠게 됨으로써 동서방 기독교의 반목은 날로 심화되었고 이는 전통을 내세우는 비잔틴제국과 신흥 프랑크 왕국 사이의 정치적 경쟁과 아울러 동방과 서방 사이의 뿌리 깊은 불신이 분쟁을 더욱 부채질하는 요소가 되었다. 마침내 최종적인 분열은 11세기에 일어났다. 교황이 남부 이탈리아의 희랍인들에게 라틴 관습을 강요하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세룰라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라틴 교회들을 폐쇄하였다. 이에 항의하기 위하여 훔베르트 추기경이 콘스탄티노플로 왔지만, 훔베르트와 미카엘 세룰라리우스는 서로를 저주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결국 1054년 6월 16일 총대주교가 성찬식을 거행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에 훔베르트 추기경은 성 소피아 성당 제단에 다음과 같은 파문칙서를 놓았다.
그리하여 동방과 서방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이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상호 저주는 1965년 로마 교황 바오로 6세와 동방 정교회의 정교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가 1054년의 파문 처벌을 폐지함에 이르러서야 기각되었다.
Ⅳ. 근대 그리스도교(근대 기독교)
신성로마 제국이 존재하는 한 제왕과 교황의 세력 하에서 루터가 몇몇 제후와 결탁하여 종교 혁명을 일으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구교 내부의 부패와 국수주의의 대두로 제국의 분열이 없었으면 루터의 운동이 뿌리를 박기 힘들었을 것이다. 구교회는 날로 증가하는 불란서 신교도들을 제거하기 위해 1559년 성바돌로매 제이르이 파리에서만 8천명이나 학살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신도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불란서를 채 신교화 하지는 못했으나 1598년에 낭트 칙령에 의하여 신교의 자유를 얻었다. 영국에 있어서는 헨리 8세의 종교개혁으로 성공회를 설립한 후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 때 일대 혁신을 해보았으나 몇 년이 못 되어 그의 누이 메리가 왕위에 오르자 이와 반대로 극단의 교구로 기울어졌다. 엘리자베드 여왕 때 서반아의 무적 함대를 쳐 무찔러 구교가 영국을 다시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16세기의 개혁자들이 전통을 버리고 신앙에만 의존한 데 반하여 17세기에는 이성을 통하여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하려는 영국의 자연신교와 불란서, 독일의 계몽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신학을 이성 하나로써 세우려 하였다.
칸트는 우리 사람들의 마음에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에 대하여 어떤 특정한 형을 꾸며 주는 상대적인 고유한 성질이 있다고 밝혔다. 칸트는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외재한 물건 자체 혹은 실재를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을 알게 됨에 불가하다고 하였다.
슐라이어머하의 종교관은 종교란 사유만도 아니고 행위만도 아니며 양자가 분립되지 않는 상태에 놓인 직관이라 했으며 종교의 본질은 신에게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인데 거기에는 신.인이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 뒤를 이은 리츨은 역사성을 새롭게 강조하여 인문 과학과 신학의 기초를 삼았다. 리츨은 역사를 중시하였지만 헤겔은 역사의 본질을 변증론으로 설명하였다. 새로이 역사 위에 등장한 미국의 기독교는 근세 기독교 발전에 큰 몫을 차지하였다. 제퍼는 대통령 시대의 미국 신학은 청교도들의 칼빈 주의적 경향에 동조하고 있었으나 여기서도 자연 신교적인 유니테리안주의와 대결하게 되어 심각한 변도의 고비를 넘게 되었다. 설교가 무디와 같은 인물들의 영향으로 많은 청년들이 세계 선교에 헌신하게 되어 세계 선교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Ⅴ.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이론
1. 배경
1) 복음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회복시켜 주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2) 두 번째 아담
바울이 그리스도를 서술하는 데 “두 번째 아담”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는 영화롭게 된 분이며 생명을 주시는 영이다.
2. 그리스도의 인격
1)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되시는 근거
-하나님의 이름이 그에게 주어졌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그에게 드려졌다.
-그는 하나님 품성의 자질을 소유하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그의 일로 기록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속성을 소유하셨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과 같이 쓰였다.
-그의 自意識
2) 그리스도의 인성
그리스도가 인간이라는 근거에는
-그는 인간의 부모를 가지고,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
-예수는 정상적인 아이와 똑같이 성장했다.
-그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을 했다.
-그는 육체적인 곤고를 느끼며 살았다.
등이 있다.
3. 그리스도의 사역
1) 그리스도의 구속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 화해의 길은 완전히 열렸다.
2) 그리스도의 죽음
(1)죽음의 의미
하나님의 수난의 종으로서 그는 온 인류의 죄를 대속했다.
“그분(예수)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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