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정치와 민주화운동 정치에 대해 설명.

본문내용

그러나 군사독재와 싸우는 과정의 엄혹함 때문이었겠지만 현대 자
유민주주의에서 통용되기 어려운 종류의, 독단적 진리의 정치로서의 민주
주의가 개방적 진리의 정치이념과 혼란스럽게 겹쳐 있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한국 현대정치사의 경우 민주화운동 정치의 행로에서 집중적으
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끊임없이 탄압받아오면서도 상대적인 의미에
서 노련한 현실 정치가의 균형감각을 잃지 않았던 김대중과는 달리 비주류
투사 정치인의 면모가 강했던 노무현과 386정치인들의 권력장(權力場)진
입이라는 극적 사건은 이들의 내면에 진리정치의 승리라는 사건으로 각인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의 권력 장악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으라는
역사의 소명으로 이해한 이들 민주화운동권 출신 인사들에게 참여정부의
출범은 진리정치이념의 정당성을 확인시켜주는 계기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스스로가 진리정치의 화신이라는 자의식 과잉을 빼놓고는 줄기차게
지속되었던 이들의 독선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경쟁
자들을 정치적 비(非)진리 자체(수구반동세력)라고 단죄할 때 정치공학적 계
산의 측면도 개입했겠지만 나의 시각에서 볼 때 더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강고(强圖)한 내적 확신이다.
내(우리)가 진리와 정의의 편일 때 나와 우리에 대한 반대자와 비판가들
은 허위의 편일 수밖에 없다. 동굴의 비유가 예증하듯 선각자는 우매한 동
시대인들이 가하는 부당한 핍박의 희생양이 되기 일부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집착하면 스스로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진다.
통치 행위가 정의의 실현으로 격상되고, 반대파의 건전한 비판조차 악랄한
음해로 치부되는 것이다. 자신들의 통치가 설령 실정(失政)으로 귀결되어
도 그 책임은 내가 아닌 남에게 전가되기 쉽다. 이들이 줄기차게 '남 탓'을
하면서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들을 오히려 나무랐던 것은 특정 정치
인의 왜곡된 심성이나 당파적 정략의 소산만은 아니었다. 그 밑바탕에는
폐쇄적인 진리의 정치이념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리의 정치는 지나간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도식화된 진리의 정치이념
은21세기의 민주화운동 정치에서도 현재진형형의 형태로 살아움직이면
서 한국 정치를 조형(裝形)하고 있는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우리
사회를 밝힌 '양심의 목소리'로 칭송되었고 한국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데 혁혁한 발자취를 남기기도 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2009년의
현실에서 퇴행적인 이명박 정부를 꾸짓으면서 고압적으로 구사하는 신앙
과 양심의 수사학은 진리정치의 21세기적 판본이라 할 수 있다. 사제단이
세속의 이해관계와 권력싸움으로부터 거리를 둔종교인이라는 사실이 이
들의 정치적 실천에 진정성의 광휘(洗輝)를 입히고 있다. 그러나 보다 흥미
로운 것은 민초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부터 격절(隔繕)된 성직자들로
하여금 현실 정치의 지형에서도 타당한 보편적 진리와 정의의 사도임을 자
처하게 만드는 우리 사회 특유의 사회문화적 맥락이다.
'2008년 촛불'을 계기로 복권의 계기를 맞은 민주화운동 진영의 실천을
추동하는 정치적 상상력도 진리의 정치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
된다. 이런 관행에는 미묘한 명암이 수반된다. 현실을 단순 명쾌한 흑백구
도로 재단할 때 운동을 견인하는 감성과 정의(情意)의 힘이 최대화하면서
강력한 투쟁전선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진리정치
의 레토릭이 제도정치의 빈틈을 메워 현실 정치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
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이하게 반복되는 경향이 있는 정태적(靜態的)
흑백논리가 이끄는 사회운동은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현실을 제대로 다루
기 어렵다. '2008년 출불'이 예증하듯 '정치적인 것'의 동학을 폭발시킨
위대한 역사적 순간도 사실과 합리성에 위배되는 감성의 힘에 의해 좌지우
지될 때 동력이 조만간 소진되기 마련이다. 특유의 독단성과 도식성을 가
능한 한 줄이면서 해석학적 자기성찰과 개방성을 살린 진리정치의 재구성
작업이 필수적인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참고문헌
-그레이 존, ‘자유주의’, 이후, 2007
-박길성 · 이택면, ‘경제사회학 이론’. 나남, 2007
-김흥우, ‘현상학과 정치철학', 문학과지성사, 1999
-김병국 외, ‘한국의 보수주의’, 인간사랑, 1999
-김선욱, ‘정치와 진리’, 책세상. 2001
-유홍림, ‘현대정치사상 연구’. 인간사랑. 2003
-최장집 외, ‘어떤 민주주의인가’. 후마니타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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