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와 현대에 나타난 평화론과 전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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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대와 현대에 나타난 평화론과 전쟁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영구 평화론의 배경
(1) 근세 이후의 사회ㆍ정치적 배경
(2) 영구평화론의 생성
3. 계몽시대의 영구평화론들
(1) 17세기의 평화론자들
(2) 루소의 영구평화론
(3) 칸트의 영구 평화론
(4) 제한전쟁론
4. 유럽교회의 평화운동
(1) 서유럽 교회의 평화운동
(2) 동유럽 교회의 평화운동
5. 미국 교회의 평화운동
6. 한국교회의 평화운동과 과제
7. 맺는 말
- 참 고 문 헌 -

본문내용

개혁주의자 연합의 태도에서 드러났다. 1982년 여를 정치적 평화가 기독교 신앙고백의 문제이며, 대량파괴 수단을 고려하는 것은 복음을 거절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서독의 교회는 핵무기 문제를 신앙고백의 문제로 삼고 있으며, 핵무기제거를 생존의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동유럽 교회의 평화운동
동유럽의 기독교인들은 1958년 기독교평화회의를 결성하였다. 그들은 동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온 40여명의 개별 기독교인들 이었지만 영향력있는 신학자나 교회지도자들 이었기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있다. 서유럽의 많은 사람들은 이 회의에 불신감을 표현했고, 동유럽의 정치적 선전기구 이상일 수 없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화해와 평화적 공존을 위한 그들의 열의를 발겸하게 되었고, 그 후 히 회의는 평화운동과 교회이치운동의 디딤돌로서 평가받게 되었다.
동독의 개신교회연합회는 스스로를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중언과 봉사를 위한 공동체”로 규정하고, 시초부터 교회와 사회를 위한 단체로서 설립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변화하는 세계와 사회 속에서 기독교의 증온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를 선교적 과제로 삼고 출발했다.
이러한 개신교회연합회의 평화사역은 1980년 세계정치상황에 관한 선언분에서 밝히고 있듯이, 복음의 멧세지에 근본적이고 직접적인 근거를 두고 있다.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제일의 축복이고, 또한 앞으로 성취될 약속이라는 것이드.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이미’ 와 ‘아직 아니다’의 긴장속에서 무기력한 관찰자가 되기 보다는 기독교의 평화사역을 소망하고 실천하는 자로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평화사역을 위한 개신교회연합회의 노력을 그들의 평화교육에서 불 수 있다. 그들의 평화교육은 의식의 근본적 전환을 목표로 하여 정보제공,태도변화, 구체적 실천에 촛점을 맞추고 있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갈등과 폭력을 제거하고 상호 신뢰와 공존을 진작시키도록 고무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1980년부터 매년 10일 간의 평화파역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고 또 수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각 평화기간의 표어를 참고로 살펴보면 “무기없는 세상을 만들자” “정의,무장해제,평화, ”약자들의 힘으로 평화를 만들자“, ”죽음에 대항하는 생명“ 등으로써 평화를 갈망하는 그들의 노력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들은 이 평화를 갈망하는 그들의 노력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들은 이 평화기간을 10일간의 행사로 제한하지말고 매일 실생활 속에서 구체화되도록 하자고 역설한다.
우리는 동독의 교회가 사회주의 사외의 근본원리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무기없는 세계를 교회의 소망이자 사명이라 생각하면서 사회에 간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동독의 교회는 사회여론을 창출하고, 정부와 사회단체의 관심을 통해 약자들의 힘을 드러내고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폴란드의 가톨릭교회가 평화운동을 위해 어떤 공헌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폴란드의 가톨릭교회는 국가와 연결되어 성장해왔고, 폴란드 문화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 또한 대화지향적인 개방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 쟈코뱅당 같은 극단주의자들의 설자리를 뿌리채 흔들어 왔다.
1952년 7월25일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헌법은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통해 교회와 다른 종교들에 대한 합법적 지위를 보장했다. 따라서 교회는 폴란드 영토 내에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고 정부와 공산당은 폴란드의 실체적 요소인 가톨릭교회와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폴란드 가톨릭교회는 평화운동에 관한 자신의 선언문을 거의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평화문제에 있어서는 거의 바티칸과 그 입장을 같이 하고 있다. 따라서 평화문제와 관련된 교황의 회칙과 교설들은 거의 에외없이 번역ㆍ출판되었고, 그 문서들은 폴란드 국민들의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켜 왔다.
이러한 폴란드의 평화운동에 있어 괄목할 사건은 1983년 6월 16일-22일 사이의 본국출신 교황인 요한 바울 2세의 방문으로부터 비롯된다. 당시 교황은 여러 곳에서 평화를 위한 강연을 실시했고, 이 강연회는 수 백만 군중의 참여와 함께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던것이다. 강연을 통해 교황은 평화교육의 필요성과 인간존엄성의 보호, 그리고 평화의 전제조건인 사회정의의 수립 등을 강조했고,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비폭력과 대화를 제안했다. 그는 나아가 무기경쟁의 위협과 핵무기의 엄청난 파괴력을 언급하면서, 세계평화를 위한 대화와 협조를 역설했다. 이러한 강연내용은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교황의 방문이후 폴란드의 교회들은 동서체제와 군사양대진영이 만나는 폴란드의 평화가 유럽과 세계의 평화임을 인식하게 되었고, 평화의 봉사를 교회의 사명으로 삼게 되었다. 또한 평화를 이루는 방법을 비폭력과 대화로 삼게 되었고, 평화를 위한 교회의 엄청난 가능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폴란드의 가톨릭교회가 정부와의 주기적이고도 공식적인 대화를 통해 정책에 평화를 반영토록 노력하고 있고, 평화운동의 ㅣ범위도 핵을 포함하여 사회정의를 배제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5. 미국 교회의 평화운동
미국은 1960년대 초 케네디의 “지상핵실험 금지조약”이 만들어진 이래 20여년 동안 엄청난 수의 핵무기공장을 건설하여 왔다. 그동안 핵전쟁에 대한 논의는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고, 일반 시민들은 철저히 배제되고 있었다. 그러나 핵동결 캠페인은 미국전역에 확산되어, 개별적인 시민들로 하여금 우리 시대의 가장 비판적인 문제인 핵문제에 참여하게 하였다.
에리카는 그녀의 남편이 미네아풀리스의 경찰국장 임에도 핵무기회사 허니웰을 차단하는 1983년의 시위에 몇 차레 참여했다. 그녀는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체포되기도 했고 10일간의 구류를 살기도 했다. 그녀는 보석상을 우영하며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처지엿지만, 핵무기의 위협을 인식하면서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주의 사람들은 남편의 지위에 악영향을 줄 것이니 참여하지 말라고 권했지만, 핵무기는 저지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참여했고, 결국 그녀는 평범한 시민들의 대변자가 될 수 잇었던 것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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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5.12
  • 저작시기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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