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역사
Ⅲ.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역사관
1. 기독교와 역사의 한계
2. 이스라엘에서부터의 역사관
3. 그리스도에 이르는 역사관
4. 바울의 역사관
5. 어거스틴의 역사관
6. 비데의 역사관
7. 단테의 역사관
8. 세속주의 역사관
9. 마르크스와 공산주의 역사관
Ⅳ.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은총
Ⅴ. 그리스도교(기독교)의 구원
Ⅵ. 그리스도교(기독교)의 박해
Ⅶ. 그리스도교(기독교)와 사이버문화(인터넷문화)
1. 사이버 문화가 기독교에 주는 도전
1) 협의의 진리개념에서 광의의 진리 개념에로의 인식 변화가 일어난다
2) 인간관계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
3) 사이버 시대는 해방적 지식의 중요성이 증대된다
4) 사이버 시대는 정보생존 능력이 요구되는 시대다
2. 기독교의 대응과 과제
1) 사이버스페이스 시대를 하나의 가능성과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
2) 사이버스페이스 시대 이전에도 기독교 공동체는 인간성을 보존하고 인간을 지키는 과제를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사랑의 과제로 받아들이고 실천해 왔다
3) 기독교 공동체는 사이버 시대의 악을 인지하고 이에 대한 윤리적 처방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Ⅷ. 그리스도교(기독교)와 도덕종교
Ⅸ. 결론
참고문헌
Ⅱ.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역사
Ⅲ.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역사관
1. 기독교와 역사의 한계
2. 이스라엘에서부터의 역사관
3. 그리스도에 이르는 역사관
4. 바울의 역사관
5. 어거스틴의 역사관
6. 비데의 역사관
7. 단테의 역사관
8. 세속주의 역사관
9. 마르크스와 공산주의 역사관
Ⅳ.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은총
Ⅴ. 그리스도교(기독교)의 구원
Ⅵ. 그리스도교(기독교)의 박해
Ⅶ. 그리스도교(기독교)와 사이버문화(인터넷문화)
1. 사이버 문화가 기독교에 주는 도전
1) 협의의 진리개념에서 광의의 진리 개념에로의 인식 변화가 일어난다
2) 인간관계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
3) 사이버 시대는 해방적 지식의 중요성이 증대된다
4) 사이버 시대는 정보생존 능력이 요구되는 시대다
2. 기독교의 대응과 과제
1) 사이버스페이스 시대를 하나의 가능성과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
2) 사이버스페이스 시대 이전에도 기독교 공동체는 인간성을 보존하고 인간을 지키는 과제를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사랑의 과제로 받아들이고 실천해 왔다
3) 기독교 공동체는 사이버 시대의 악을 인지하고 이에 대한 윤리적 처방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Ⅷ. 그리스도교(기독교)와 도덕종교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하나의 풍자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회혁명과 계급 없는 사회의 도래는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과정의 필연적인 결과이며 그 종국이 영적인 것이 아닌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유대교와 기독교의 순수한 천년왕국 사상 속에서는 모든 물질적인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지 않는다.
또한 윤리적이며 묵시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신화(Marxist myth)와 물질주의적이며 상대주의적 윤리관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 사이에는 실지로 이원론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이 두자 지 요소 중의 첫 번째 요소를 그 기원으로 하고 있으며, 이들의 준 종교적인 성격도 첫 번째 요소에서 찾는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의 신화에 나타난 절대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해석에 나타난 상대주의와 융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조속한 사회혁명의 실현과 무계급 사회의 도래를 위해 노력한다. 그렇지만 일단 노력에 달성하고 나면 변증법적 역사 변화 원리인 계급투쟁이 억제될 것임으로 역사의 종말을 맞을 것이다.
Ⅳ.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은총
만일 오늘날의 기독교 회중에게 설교할 때 , 가끔 들을 수 있듯이 개개인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말씀을 들을 수 있으려면 우선 막달라 마리아, 거지 나사로, 십자가상의 강도 등과 같이 모두 희미한 ”주변 인물(Randgestalten)\"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설교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그릇된 것이다. 기독교 메시지의 내용은 사람이 성서의 인물 가운데 이사람 혹은 저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 외에는 어떠한 방법도 우리를 이 목표로 인도할 방법은 없다. 그렇지 않다면 복음은 그 가치를 잃을 것이다. 그리고 고귀한 은총은 값싼 은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죄인을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적으로도 궁극적인 말씀이다. 궁극적인 말씀은 항상 궁극 이전의 어떤 것(etwas Vorletztes), 즉 어떤 행위, 고통, 운동, 의지, 패배, 출현, 탄원이나 소망, 즉 엄밀한 의미에서 순간을 전제로 하고 있고, 시간의 마지막에 궁극적인 말씀이 존재한다. 모든 시간이 은총의 시간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 결정적으로 “구원의 날”(고후6;2)이다. 은총의 시간은,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초월하여 멀리 미래의 말씀이 있을 것이지마는 과정을 전혀 예측 할 수 없는 것으로서 궁극적인 시간이다.
하나님이 허락하고,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간이 있고, 또 궁극 이전의 것을 심판하고 단절 하는 궁극적 시간이 있다. 궁극적인 말씀을 듣기 위해 루터는 수도원을 거쳐야 했고, 바울은 율법의 신봉의 시기를 거쳐야 했고, 저 도둑은 죄책으로 이해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야만 했다. 우리는 한 길을 걸어가고 궁극적인 길의 전 과정을 횡단해야 했다. 개개인은 무거운 짐을 지고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궁극적인 말씀은 궁극 이전의 성취가 아니라 그 완전한 파괴이다. 궁극적인 말씀에 직면했을 때 루터도 바울도 십자가위의 강도의 형편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는 그 길을 걸어 가야하고, 하나님이 그 길의 끝을 정해 준 곳까지 걸어가야 한다. 따라서 궁극적인 것에 의하여 지양되고 무력화됨에도 불구하고 궁극 이전의 것은 존재한다.
그러나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은 궁극적인 말씀으로서의 그 위치를 결코 떠날 수가 없으며, 단순히 획득되어진 결과로서, 즉 처음과 마찬가지로 마지막에도 똑같이 잘 되어질 결과로서 존재할 수는 없다.
궁극 이전의 것으로부터 궁극적인 것에 이르는 길은 결코 없애버려서는 안된다. 말씀은 궁극적인 것이어서, 궁극이전의 것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계산할 수 있는 것, 상품적인 것으로 환원되고 그렇게 됨으로써 그 신적인 본질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은총은 값싼 것이 되고 선물이 될 수 없다.
Ⅴ. 그리스도교(기독교)의 구원
하나님께서 창조한 최초의 인간 아담은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죄를 범하였고, 그 대가로 인하여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하였다. 그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식물(食物)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애초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永生의 축복을 상실한 채 언젠가 반드시 죽어야만 할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의 씨앗을 물려받은 후손으로서의 모든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原初的으로 죄인이다. 그러므로 그 죄를 救贖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도덕적인 행위, 善行으로 극복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의 원초적인 죄는 오직 ‘죄에서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예수’라는 이름 이외에는 인류를 구원할 만한 이름이 없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인간은 자기 힘으로 도저히 악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죄에 대한 삯’<롬6:23>으로 영원한 멸망,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그리하여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셔서 오직 하나 뿐인 獨生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이 人間의 모습으로 변하여(成肉身, 肉化, Incarnation)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온갖 수모와 핍박을 당하면서도 인류에 대한 구제의 가능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수치를 당하였으며, ‘흠 없는 어린 양’으로서 아무런 잘못이나 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했다.
그렇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가 왜 그런 고통을 받아야 했던 것인가? 여기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의롭다는 이유 때문에 아무런 賠償도 없이 인류(아담)의 죄를 사해줄 수는 없었다. 거기에는 무언가 희생의 제물이 필요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을 때에 ‘犧牲羊’을 광야에 내
또한 윤리적이며 묵시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신화(Marxist myth)와 물질주의적이며 상대주의적 윤리관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 사이에는 실지로 이원론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이 두자 지 요소 중의 첫 번째 요소를 그 기원으로 하고 있으며, 이들의 준 종교적인 성격도 첫 번째 요소에서 찾는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의 신화에 나타난 절대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해석에 나타난 상대주의와 융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조속한 사회혁명의 실현과 무계급 사회의 도래를 위해 노력한다. 그렇지만 일단 노력에 달성하고 나면 변증법적 역사 변화 원리인 계급투쟁이 억제될 것임으로 역사의 종말을 맞을 것이다.
Ⅳ.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은총
만일 오늘날의 기독교 회중에게 설교할 때 , 가끔 들을 수 있듯이 개개인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말씀을 들을 수 있으려면 우선 막달라 마리아, 거지 나사로, 십자가상의 강도 등과 같이 모두 희미한 ”주변 인물(Randgestalten)\"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설교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그릇된 것이다. 기독교 메시지의 내용은 사람이 성서의 인물 가운데 이사람 혹은 저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 외에는 어떠한 방법도 우리를 이 목표로 인도할 방법은 없다. 그렇지 않다면 복음은 그 가치를 잃을 것이다. 그리고 고귀한 은총은 값싼 은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죄인을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적으로도 궁극적인 말씀이다. 궁극적인 말씀은 항상 궁극 이전의 어떤 것(etwas Vorletztes), 즉 어떤 행위, 고통, 운동, 의지, 패배, 출현, 탄원이나 소망, 즉 엄밀한 의미에서 순간을 전제로 하고 있고, 시간의 마지막에 궁극적인 말씀이 존재한다. 모든 시간이 은총의 시간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 결정적으로 “구원의 날”(고후6;2)이다. 은총의 시간은,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초월하여 멀리 미래의 말씀이 있을 것이지마는 과정을 전혀 예측 할 수 없는 것으로서 궁극적인 시간이다.
하나님이 허락하고,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간이 있고, 또 궁극 이전의 것을 심판하고 단절 하는 궁극적 시간이 있다. 궁극적인 말씀을 듣기 위해 루터는 수도원을 거쳐야 했고, 바울은 율법의 신봉의 시기를 거쳐야 했고, 저 도둑은 죄책으로 이해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야만 했다. 우리는 한 길을 걸어가고 궁극적인 길의 전 과정을 횡단해야 했다. 개개인은 무거운 짐을 지고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궁극적인 말씀은 궁극 이전의 성취가 아니라 그 완전한 파괴이다. 궁극적인 말씀에 직면했을 때 루터도 바울도 십자가위의 강도의 형편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는 그 길을 걸어 가야하고, 하나님이 그 길의 끝을 정해 준 곳까지 걸어가야 한다. 따라서 궁극적인 것에 의하여 지양되고 무력화됨에도 불구하고 궁극 이전의 것은 존재한다.
그러나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은 궁극적인 말씀으로서의 그 위치를 결코 떠날 수가 없으며, 단순히 획득되어진 결과로서, 즉 처음과 마찬가지로 마지막에도 똑같이 잘 되어질 결과로서 존재할 수는 없다.
궁극 이전의 것으로부터 궁극적인 것에 이르는 길은 결코 없애버려서는 안된다. 말씀은 궁극적인 것이어서, 궁극이전의 것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계산할 수 있는 것, 상품적인 것으로 환원되고 그렇게 됨으로써 그 신적인 본질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은총은 값싼 것이 되고 선물이 될 수 없다.
Ⅴ. 그리스도교(기독교)의 구원
하나님께서 창조한 최초의 인간 아담은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죄를 범하였고, 그 대가로 인하여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하였다. 그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식물(食物)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애초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永生의 축복을 상실한 채 언젠가 반드시 죽어야만 할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의 씨앗을 물려받은 후손으로서의 모든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原初的으로 죄인이다. 그러므로 그 죄를 救贖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도덕적인 행위, 善行으로 극복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의 원초적인 죄는 오직 ‘죄에서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예수’라는 이름 이외에는 인류를 구원할 만한 이름이 없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인간은 자기 힘으로 도저히 악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죄에 대한 삯’<롬6:23>으로 영원한 멸망,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그리하여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셔서 오직 하나 뿐인 獨生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이 人間의 모습으로 변하여(成肉身, 肉化, Incarnation)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온갖 수모와 핍박을 당하면서도 인류에 대한 구제의 가능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수치를 당하였으며, ‘흠 없는 어린 양’으로서 아무런 잘못이나 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했다.
그렇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가 왜 그런 고통을 받아야 했던 것인가? 여기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의롭다는 이유 때문에 아무런 賠償도 없이 인류(아담)의 죄를 사해줄 수는 없었다. 거기에는 무언가 희생의 제물이 필요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을 때에 ‘犧牲羊’을 광야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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