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전쟁과평화_나폴레옹러시아대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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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톨스토이의전쟁과평화_나폴레옹러시아대원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개요
▶ 전쟁과 평화의 개요
▶ 전쟁과 평화 줄거리
◈ 나폴레옹의 러시아 대 원정 (Russian Campaign)에 대해
▶ 나폴레옹의 러시아 대 원정이란
▶ 배경
▶전쟁 발발에서 발루티노 전투까지
▶보로디노 전투와 모스크바 입성
▶모스크바 대화재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체류와 교섭 시도
▶나폴레옹군의 후퇴
▶ 크라스니 전투
▶ 베레지나 전투
▶ 원정의 끝
▶ 전후 영향

본문내용

쇄하고 주변의 다리들을 파괴한 다음 강 좌안을 경비했다. 며칠 후 도착한 나폴레옹은 강 좌안에 교두보를 확보할 때까지 어떻게든 치챠고프의 주력을 도강 지점에서 떼어 놓을 필요가 있었으므로 이를 위해 몇몇 곳에서 동시에 도강 준비 작업을 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 치챠고프는 원정군이 바리사우보다 하류에 위치한 지점을 골라 도강할 것이라고 오판해 주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덕분에 에블레 장군이 감독하는 나폴레옹군 공병대는 바리사우의 약간 상류에 있는 스투디안카 마을에서 방해를 받지 않고 다리 건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동반한 이동식 부교들은 드네프르 강을 건널 때 사용한 후 수거하지 못하고 없애버렸으므로 새로운 다리를 만들어야 했는데 공병들은 알맞은 자재도 부족하고 한겨울에 강물 속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작업하는 등 험악한 조건을 딛고 두 개의 부교를 완성했다. 이렇게 해서 근위대를 포함한 나폴레옹군은 하루 이상 거의 방해받지 않고 강 너머로 건너갈 수 있었다. 이틀째 되는 날 아침 착각을 깨닫고 군대를 되돌린 치챠고프가 강 좌안을 방어하는 우디노와 네의 군대를 총공격했으나 저항도 격렬하여 교두보를 빼앗지 못했다. 한편 북쪽에서 접근한 비트겐슈타인의 군대는 아직도 강 우안에 있던 원정군을 공격하고 다리에 포격을 가했지만 빅토르 페랭이 이끄는 4천여 명의 후위 부대는 5배에 가까운 러시아군의 공격을 견뎌내었다. 부교는 자주 손상되었으나 주변에 널린 시체 등을 이용해서 간신히 지탱할 수 있었다. 이날 밤 빅토르 페랭의 후위대 역시 강을 건넜고 이튿날 아침 비트겐슈타인의 군대가 접근해오자 에블레는 결국 다리를 폭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강 우안에는 정규군은 더 이상 없었지만 부상자와 환자, 낙오병들과 비전투원들이 가득했고 다리 폭파 후 이들 대부분은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양군을 막론하고 포로가 된 병사들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는데 이는 가혹한 처분 외에도 실제로 많은 포로들을 부양하기가 어렵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러시아는 포로로 잡힌 병사가 소속된 나라가 러시아 편에 서는 대로 이들을 본국으로 돌려 보냈다. 이 동안 쿠투조프의 본대는 전장에서 동쪽으로 5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고 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 원정의 끝
11월 말에 남은 정규군을 이끌고 베레지나 강을 건너 에움을 벗어나는 데 성공한 나폴레옹은 12월 초 시달릴 대로 시달린 생존자들과 함께 빌뉴스에 도착했다. 적지를 거의 벗어났으므로 나폴레옹은 한시라도 빨리 군대를 재건하고 불안정한 수도의 정세를 완화시키기 위해 근위대를 뒤따라오게 하고 일부 측근들만 대동하여 즉시 파리로 떠났다. 총지휘권은 뮈라에게 인계했는데 나폴리 왕이기도 했던 뮈라는 12월 10일 빌뉴스를 포기하고 남은 군대와 함께 얼어붙은 네만 강을 되건너 바르샤바 공국으로 후퇴한 후 자신의 부재로 인해 왕국 내에서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 총지휘권을 넘겨주고 나폴리로 떠나버렸다. 남아 있는 병사는 원정 직전과 비교하면 얼마 되지 않아 12월 14일 네만 강 서쪽에 도착한 뮈라의 보고에 따르면 겨우 5천여명만이 싸울 수 있는 상태였다.
마크도날이 이끄는 라트비아의 나폴레옹군은 12월 20일 철수를 시작했다. 12월 30일, 자국군과 함께 후위를 맡아야 했던 요르크는 마크도날 군대와의 연락이 끊어지자 리투아니아의 타우라게에서 러시아의 폰 디비치 소장과 비밀리에 정전에 합의하고 동프로이센으로 퇴각했다.
개전 후 슈바르첸베르크의 오스트리아군은 천천히 동북쪽으로 나아가 프리폐트 늪지대 남쪽에 다다른 후에는 교전을 회피하며 몇 달 동안 더 이상 내륙으로 전진하지 않고 있었는데 원정군 본대의 운명을 전해 듣고는 1813년 1월 초 전투를 중지하고 같은 달에 러시아와 무기한 정전 협정을 맺은 다음 본국으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러시아를 침공했던 원정군은 총퇴각했다.
▶ 전후 영향
러시아군은 거의 붕괴한 원정군을 추격해 바르샤바 공국으로 침입했다. 러시아군은 원정에서 큰 손실을 입고 자력으로 대항할 만한 힘이 없어진 바르샤바 공국을 빠른 속도로 제압해 1813년 2월에는 바르샤바를 함락하고 5월까지 공국 거의 전체를 점령했다. 러시아군이 바르샤바에 입성하자 프로이센은 대프랑스 동맹에 다시 참가해 징병제를 재도입하고 군비를 급속도로 증강하면서 3월 말에는 프랑스에 선전했다.
한편 파리로 되돌아온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수십만의 신병을 징집하고 엘베 강을 방어선으로 결정, 함부르크에는 수만 병력을 주둔시켜 다부가 지휘하게 하고 4월 말에는 바르샤바 공국 다음으로 러시아와 프로이센군의 목표가 될 작센 왕국으로 대군을 이끌고 진입해 러시아, 프로이센군에 대항했다. 작센은 그때까지 중립을 표명하던 오스트리아와 인접해 있는 지방이기도 했는데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까지 전쟁을 걸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쇤브룬 조약에 의해 양도받았던 일리리아 지방을 반환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으나 나폴레옹과 직접 교섭하던 메테르니히는 라인 동맹의 해체와 18세기 말까지 오스트리아의 세력권이었던 이탈리아 북부도 요구했고 이에 따라 교섭은 결렬되고 7월부터 오스트리아 역시 프랑스와 전쟁에 들어갔다.
러시아 원정에서 당장 만회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병력을 잃었고 그것은 라인 동맹 가입 국가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를 적으로 돌린 나폴레옹은 아주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특히 러시아 원정에서 포병과 기병이 거의 전멸한 것이 나폴레옹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어 결국 나폴레옹이 5월 동안에 프로이센과 러시아군을 이기지 못하고 정전에 동의했다가 8월에 열세인 상태로 3국 동맹군과 싸워 패배하게 되는 주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6월 말 웰링턴 후작이 지휘하는 7만여 명의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연합군이 1808년 나폴레옹에 의해 스페인 왕이 되었던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군대에 승리하고 프랑스의 전력이 거의 대부분 독일로 돌려지는 것에 힘입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추격, 툴루즈까지 육박했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 원정이 참담한 결과로 끝난 지 반년만에 유럽 대륙에서의 나폴레옹의 패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흔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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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5.18
  • 저작시기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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