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민족교육의 정의
Ⅲ. 민족교육의 현황
Ⅳ. 민족교육과 역사교육
Ⅴ. 민족교육과 해동 홍주일
Ⅵ. 민족교육과 재일동포사회
Ⅶ. 향후 민족교육의 개선 과제
Ⅷ. 결론
참고문헌
Ⅱ. 민족교육의 정의
Ⅲ. 민족교육의 현황
Ⅳ. 민족교육과 역사교육
Ⅴ. 민족교육과 해동 홍주일
Ⅵ. 민족교육과 재일동포사회
Ⅶ. 향후 민족교육의 개선 과제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교회와 기독교인 가정에 국기를 게양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주일에 태극기를 단 가정이 예수를 믿는 가정이라는 것을 널리 알림과 동시에 기독교인들의 애국심을 나타냄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을 모범으로 보이고자 한 것이다. 특히, 1909년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고종황제가 서북지방을 순시할 때는, 일제의 조종으로 각 관공서와 가정에 태극기와 함께 일장기를 게양하도록 명령하였었으며 통감이었던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도 동행하였었는데, 안창호의 대성학교와 이승훈의 오산학교를 필두로 한 그곳의 기독교 학교와 기독교인 가정에서는 일본기는 게양하지 않았다. 당시 신문에서는 이 사실을 보도하기를, 단군의 옛 도읍지이며 동명왕의 옛 땅에 대한제국의 만세소리가 울려 퍼진다고 하면서 온 동포의 국가정신과 애국심이 개성에서 의주에 이르도록 높으므로 언젠가는 반드시 독립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도산은 헌병대에 끌려가 문초를 당했으며, 대성학교는 폐교의 위기까지 몰리게 되다가 결국 1912년 폐교되고 만다.
Ⅴ. 민족교육과 해동 홍주일
홍주일은 일본유학을 1906년 구마모도와 1907년 동경에 갔었는데, 어떤 연고로 갔는지 소상하지 못 하다. 당시 구한말 봉건제도가 엄연하게 존재한 시대였고, 경상도가 당시는 추로지향이라 칭할 정도로 보수적이고 완고한 양반의 고을이었는데, 누구의 권유를 받아들여 경상도 청년으로 일찍이 개명에 눈을 떠서, 서울도 아닌 일본으로 신학문을 배우러 떠났는지 매우 놀라울 지경이다. 그리고 1908년 다시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지금으로서는 구마모도는 어느 학교에서 공부를 했는지 알 수 없고, 또 동경유학 한 학교가 앞의 연보에서 밝혀졌다. 이 당시 이광수나 최남선(1890~1957)도 일본 유학을 갔다가, 1908년 귀국하여 최남선은 <소년>이란 잡지를 출간하던 때였다.
홍주일이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기 때문에, 동경물리학교 출신이라 하나 이는 추측일 뿐이다. 홍영기는 동경 정칙예비학교를 다녔다고 증언했는데, <한민족독립운동자료집,8>에 홍주일자신 법정 신문조서와 같았다.
홍주일이 학교교육에 관련한 것은, 1907년 동경의 연수학관에서 34개월 공부하고 귀국하여, 평북 의주 백마옥천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다하나, 이도 어느 기간쯤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1908년 봄에 다시 동경유학을 떠나, 정칙예비학교에서 1년반동안 자연과학분야인 물리화학을 공부하고, 1909년 가을에 돌아와 경북 예안 협동학교 교원을 지냈다. 1910년은 구포에 있는 구명학교에 교원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한일강제합방이 되고 난 뒤 대구의 사학인 협성학교 교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인하여 국권이 송두리째 일본에게 강탈당하고는, 오로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슬로건아래, 당시 개명한 선각자들은 처처에 다니면서 학교를 세우고 청소년을 모아놓고, 신학문을 가르치기에 골몰했던 것이다. 따라서 홍주일이 교편을 잡았던 학교는 옥천협동구명학교 등은 사학이었다.
홍주일의 민족교육은, 강제합방전에 3개 학교에서 선생을 한 것도 국권회복 차원에서 이루어졌지만,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이후는 본격적인 민족교육의 진로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한일강제합방이 되던 9월부터 그는 협성학교 교원이 되었는데, 19111912년쯤 안확도 같이 이 학교에 교원으로서 청소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 협성학교는 시초가 1899년 달성학교로, 1905년 한국에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달성학교 심상과는 1905년 8월 27일 남일동에 새로 설립된 공립대구보통학교로 넘겨주고, 고등과만으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1909년 3월 8일 사립달성학교 고등과는 교명을 사립 협성학교로 바꾸고, 교사는 당시 관찰사감영내에 속한 대구향교(현 동문동부근)를 사용하였다.
<경북중·고등학교육십년사>에 의하면, 홍주일은 동경물리학교(정칙예비학교) 출신으로, 일어를 잘 알면서도 평생을 두고 쓰지 않았던 지조 있는 선각자였다. 홍교사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의 끊임없는 애국활동은, 일제 관헌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당시 이 학교 3학년생들은 조선총독부 처사에 반항하여, 졸업을 앞두고 3월초에 동맹휴학을 결행하였다가, 경찰에 10여명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고, 또 가택을 수색 당하여 “지구상에 신대한을 세운다”는 학우들의 규약 등을 압수당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 협성학교를 통하여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이 협성학교는 홍주일이 구심점이 되어 민족교육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사학의 민족교육기관을 없애는 방편으로, 일제는 1911년 8월 칙령 제229호인 조선교육령을 공포하면서, 한성고보를 경성고보로 만들었고, 1916년 대구에도 관립대구고보를 신설하면서 협성학교학생을 선발함으로써, 이 협성학교는 자연적으로 폐교를 당하는 운명이 되었다.
민족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던 협성학교가 사라지고는, 1917년 명신학교의 교장을 맡기는 했으나, 교남학교를 설립할 때까지는 무직상태로 경찰서 유치장과 감옥을 들락거렸고, 서상일이 경영했던 대궁상점의 점원으로서 호구지책을 이어 나갔던 것이다.
대구에서는 미국의 북장로회가 계성학교를 1906년에 설립한 바 있다. 이렇게 일제에 의하여 민족학교가 사라진 마당에, 기미독립만세운동 뒤 민족학교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1921년 개교한 교남학교였다. 이 교남학교의 설립에는 31만세사건으로 복역하고 출옥한 홍주일이 중심이 되고, 김영서(1880~1975)와 정운기(1887~1963)도 동참하였다. 홍주일과 김영서는 소위 항일운동을 한 전과자로 정규학교 인가를 불허하여, 정운기를 설립신고자로 하여 설립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21년 9월 15일 대구시북성로 우현서루(서성로와 북성로가 교차하는 지점)를 가교사로 하여, 사설강습소 교남학원을 정운기의 명의로 설립 개교하게 되었다. 당시의 광경을 동아일보(1921. 9. 21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대구유지 수씨는 는 피로서 설립된 교남학원에서는 예정과 여히 거십오일 개학식을 거행한 후 십칠일부터 교수한다는대 생도는 각과에 예정수를 초과하
Ⅴ. 민족교육과 해동 홍주일
홍주일은 일본유학을 1906년 구마모도와 1907년 동경에 갔었는데, 어떤 연고로 갔는지 소상하지 못 하다. 당시 구한말 봉건제도가 엄연하게 존재한 시대였고, 경상도가 당시는 추로지향이라 칭할 정도로 보수적이고 완고한 양반의 고을이었는데, 누구의 권유를 받아들여 경상도 청년으로 일찍이 개명에 눈을 떠서, 서울도 아닌 일본으로 신학문을 배우러 떠났는지 매우 놀라울 지경이다. 그리고 1908년 다시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지금으로서는 구마모도는 어느 학교에서 공부를 했는지 알 수 없고, 또 동경유학 한 학교가 앞의 연보에서 밝혀졌다. 이 당시 이광수나 최남선(1890~1957)도 일본 유학을 갔다가, 1908년 귀국하여 최남선은 <소년>이란 잡지를 출간하던 때였다.
홍주일이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기 때문에, 동경물리학교 출신이라 하나 이는 추측일 뿐이다. 홍영기는 동경 정칙예비학교를 다녔다고 증언했는데, <한민족독립운동자료집,8>에 홍주일자신 법정 신문조서와 같았다.
홍주일이 학교교육에 관련한 것은, 1907년 동경의 연수학관에서 34개월 공부하고 귀국하여, 평북 의주 백마옥천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다하나, 이도 어느 기간쯤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1908년 봄에 다시 동경유학을 떠나, 정칙예비학교에서 1년반동안 자연과학분야인 물리화학을 공부하고, 1909년 가을에 돌아와 경북 예안 협동학교 교원을 지냈다. 1910년은 구포에 있는 구명학교에 교원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한일강제합방이 되고 난 뒤 대구의 사학인 협성학교 교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인하여 국권이 송두리째 일본에게 강탈당하고는, 오로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슬로건아래, 당시 개명한 선각자들은 처처에 다니면서 학교를 세우고 청소년을 모아놓고, 신학문을 가르치기에 골몰했던 것이다. 따라서 홍주일이 교편을 잡았던 학교는 옥천협동구명학교 등은 사학이었다.
홍주일의 민족교육은, 강제합방전에 3개 학교에서 선생을 한 것도 국권회복 차원에서 이루어졌지만,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이후는 본격적인 민족교육의 진로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한일강제합방이 되던 9월부터 그는 협성학교 교원이 되었는데, 19111912년쯤 안확도 같이 이 학교에 교원으로서 청소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 협성학교는 시초가 1899년 달성학교로, 1905년 한국에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달성학교 심상과는 1905년 8월 27일 남일동에 새로 설립된 공립대구보통학교로 넘겨주고, 고등과만으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1909년 3월 8일 사립달성학교 고등과는 교명을 사립 협성학교로 바꾸고, 교사는 당시 관찰사감영내에 속한 대구향교(현 동문동부근)를 사용하였다.
<경북중·고등학교육십년사>에 의하면, 홍주일은 동경물리학교(정칙예비학교) 출신으로, 일어를 잘 알면서도 평생을 두고 쓰지 않았던 지조 있는 선각자였다. 홍교사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의 끊임없는 애국활동은, 일제 관헌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당시 이 학교 3학년생들은 조선총독부 처사에 반항하여, 졸업을 앞두고 3월초에 동맹휴학을 결행하였다가, 경찰에 10여명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고, 또 가택을 수색 당하여 “지구상에 신대한을 세운다”는 학우들의 규약 등을 압수당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 협성학교를 통하여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이 협성학교는 홍주일이 구심점이 되어 민족교육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사학의 민족교육기관을 없애는 방편으로, 일제는 1911년 8월 칙령 제229호인 조선교육령을 공포하면서, 한성고보를 경성고보로 만들었고, 1916년 대구에도 관립대구고보를 신설하면서 협성학교학생을 선발함으로써, 이 협성학교는 자연적으로 폐교를 당하는 운명이 되었다.
민족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던 협성학교가 사라지고는, 1917년 명신학교의 교장을 맡기는 했으나, 교남학교를 설립할 때까지는 무직상태로 경찰서 유치장과 감옥을 들락거렸고, 서상일이 경영했던 대궁상점의 점원으로서 호구지책을 이어 나갔던 것이다.
대구에서는 미국의 북장로회가 계성학교를 1906년에 설립한 바 있다. 이렇게 일제에 의하여 민족학교가 사라진 마당에, 기미독립만세운동 뒤 민족학교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1921년 개교한 교남학교였다. 이 교남학교의 설립에는 31만세사건으로 복역하고 출옥한 홍주일이 중심이 되고, 김영서(1880~1975)와 정운기(1887~1963)도 동참하였다. 홍주일과 김영서는 소위 항일운동을 한 전과자로 정규학교 인가를 불허하여, 정운기를 설립신고자로 하여 설립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21년 9월 15일 대구시북성로 우현서루(서성로와 북성로가 교차하는 지점)를 가교사로 하여, 사설강습소 교남학원을 정운기의 명의로 설립 개교하게 되었다. 당시의 광경을 동아일보(1921. 9. 21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대구유지 수씨는 는 피로서 설립된 교남학원에서는 예정과 여히 거십오일 개학식을 거행한 후 십칠일부터 교수한다는대 생도는 각과에 예정수를 초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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