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경제활동과 기록문화
2.중세 서양의 부기 사상
1)루카 파치오로의 부기 사상
2)여타 회계사상의 선지자
3)좀바르트와 베버의 회계사상
4)미술과 부기회계
3.미국 회계사상의 형성과정
1)새로운 질서와 회계 (1492-1775)
2)국가경제의 형성과 회계(1776-1826)
3)회사기업의 발전과 회계(1827-1865)
4)남북전쟁 후의 회계(1866-1896)
5)개혁운동과 공인회계사(1897-1918)
6)개혁의 회계사적 의미와 회계사상의 형성
4.일본의 서양 부기회계의 도입과 사상형성
1)후쿠자와 유키치의 장합지법
2)알렌 샨트의 역할
3)일본의 서양부기 도입에 대한 소고
5.한국의 서양 부기회계의 도입과 회계사상 형성
1)갑오개혁과 부기회계
2)유길준의 부기회계
3)초기 은행의 부기회계
4)부기서
5)서양과 동양의 부기회계 관의 비교
2.중세 서양의 부기 사상
1)루카 파치오로의 부기 사상
2)여타 회계사상의 선지자
3)좀바르트와 베버의 회계사상
4)미술과 부기회계
3.미국 회계사상의 형성과정
1)새로운 질서와 회계 (1492-1775)
2)국가경제의 형성과 회계(1776-1826)
3)회사기업의 발전과 회계(1827-1865)
4)남북전쟁 후의 회계(1866-1896)
5)개혁운동과 공인회계사(1897-1918)
6)개혁의 회계사적 의미와 회계사상의 형성
4.일본의 서양 부기회계의 도입과 사상형성
1)후쿠자와 유키치의 장합지법
2)알렌 샨트의 역할
3)일본의 서양부기 도입에 대한 소고
5.한국의 서양 부기회계의 도입과 회계사상 형성
1)갑오개혁과 부기회계
2)유길준의 부기회계
3)초기 은행의 부기회계
4)부기서
5)서양과 동양의 부기회계 관의 비교
본문내용
탁지아문(4)은 유명무실하게 되고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주1)가산국가:
국가가 군주의 세습재산으로 간주되는 국가.
주2)호조:
고려 ·조선시대에 호구(戶口) ·공부(貢賦) ·전토 및 식량과 기타 재화 ·경제에 관한 정무(政務)를 맡아보던 중앙관청
주3)수세관:
조세를 걷기 위하여 지방에 파견하던 중앙의 벼슬아치
주4)탁지아문:
조선 말기 근대적 개혁에 따라 새롭게 이름 붙여진 정부 부처로, 재정(財政)·조세(租稅)·국채(國債)·화폐(貨幣)등 국가의 재무를 총괄하였다.
2)유길준의 부기회계
(2)유길준의 부기회계 관
‘서유견문’ 제14편 상고의 대도에서 상인과 상업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상고의 직분, 상고의 공부, 상고의 경계를 해설하고 있다.
상고의 공부에서 “상인된 자는 남다른 공부를 하여야 한다. .... 물화를 거래하거나 재물을 주고받을 때에 조리 있게 치부하는 법과 약속을 정하며 자본을 합하여 착실하게 회사를 운영하는 일...을 배워야 한다” 고 서술하고 있다.
상고의 경계에서 “회사의 규칙을 굳게 지키고, 또 장부를 세밀하게 기입하며, 회사의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부지하기 어렵고 장부를 기입하는 법이 자세하지 않으면 타인의 의심을 사기 쉽고” 라고 서술하고 있다.
유길준은 치부와 장부의 중요성은 설명하고 있으나 ‘서유견문’이란 책의 성격 탓인지 그 양과 질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다.
3)초기 은행의 부기회계
초창기 조선은행, 한성은행, 대한천일은행 등 모두가 한국의 전통 부기인 ‘송도사개치부법’ 을 사용하였다. 전통 치부법을 사용하던 한성은행이 1903년 12월 7일 재출범하면서 처음으로 횡서체 서양부기를 사용하였다.
한성은행은 운영자금으로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으로부터 자금을 차입하였던 관계로 그들이 추천하는 감리인을 협의원이라는 직함으로 채용하여야 했다. 일본은 서양부기에 의해 기장 할 것을 요구 했을 것이다. 당시 한성은행장 이재완이나 부장 김종한은 횡서체 서양부기를 볼 줄 몰라, 실무를 총괄한 우총무 한산용은 따로 한문장부를 만들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1906년 3월21일 한국의 은행조례가 칙령 제12호로 공포되고 시행되었다. 그 내용은
“제5조 은행은 매반개년 영업의 보고서를 조제하야 도지부 대신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제6조 은행은 매반개년 대차대조표를 조제하야 신이지 기타의 방법으로 삼일간 공고 하여야 한다.”
이 은행조례의 공시제도는 현대의 공시제도와 별 다른 바가 없다.
4)부기서
(1)임경재의 부기서
임경재는 1876년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에서 출생하였다. 1895년 관립외국어학교가 설립되자 일어학부에 입학하고, 아마 여기서 서양부기를 습득한 것으로 생각된다. 후에 ‘조선어학회’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의 창립에 참가하여 초창기의 한국어운동에 이바지한다. 임경재의 부기서는 1908년 ’신편은행부기학‘, ’간이상업부기학‘ 이 출판되었다.
임경재의 ‘신편은행부기학’의 서문을 요약해서 보면
“문명적 실업에 대한 사상이 일어남에 따라 인간관계도 복잡해지고, 그러므로 인간의 한계 있는 두뇌로써는 일일이 기억이 불가능하게 됨에 따라 필묵의 힘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관계를 기록하고 학문의 이치를 저술하여 잊지 않고 전습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재산에 대한 회계는 기억이 어려움으로 부기의 학리와 법칙이 발명된 것이다. 회계와 부기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부기학 응용의 필요를 약술하면 크게는 국가와 작게는 기업이 각각 재산을 가지고 있는 이상 출납이 있어야 하고 출납이 있으면 기억 역시 필요하고 또한 기억이 있으면 필요한 경우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두뇌로써는 해결하기 어렵다. 고로 부기의 이용이 없으면 실업의 발전을 저지하게 될 것이고 국운의 발전도 저해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재정의 정리 여하는 사업의 진퇴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부기는 회계의 역사이기 때문에 과거의 재정은 이것을 경유하여야 알 수 있는 것이고, 현재의 계획도 이것을 경유하여야 탐구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부기의 필요함은 당연함이 아니겠는가.”
임경재의 서문은 에토스의 일면을 강조하였다고 해석하여도 큰 무리가 없다고 하겠으나 기장이 개인의 성실성과 정직성과 관계가 있다는 언급은 없다.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부기서는 임경재의 경우보다는 상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면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2)김대희의 부기서
김대희는 1978년 경기도 과천현에서 출생하였다. 1895년에 일본 게이오 대학에 입학한다. 그 후 사립동경상업학교에 입학하고 1900년 3월에 졸업하고 귀국한다.
귀국 후 낙영학교 교사로 취임, 1904년 12월에 농상공학교 교관으로 전임하나 1906년 8월에 교관생활을 그만 두고 집필생활로 소일하면서 광신상업학교 교사 생활도 한다. 1909년 부기일어강습소를 차렸으나, 1910년 6월30일 대한제국 편집관보로 관에 들어가나 한일합병을 맞게돠자 관직을 그만두고 1911년 4월에 보성전문학교에서 상업학의 강의 맡았으나, 그만 행적을 감추고 만다.
그의 저서 ‘응용상업부기학’ 의 내용은 오늘날의 것과 별 차이가 없다. 김대희는 제1장 총론에서 “서양부기를 알지 못하고도 태평성대로 백업이 흥왕 하였다. 하여 부기학을 경시하는 사람이 있다. 약육강식하는 경쟁시대에 구규를 고수하고자 하는 사람은 문명의 적이오 망국할 민이다. 물론 어떤 학도 그 발달의 유래를 보면 학의 기초는 사실이고 학리는 사실을 각 관계상으로 관찰하여 조화일치하게 한 것인데 계산의 학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부기를 사용하는 범위는 그 업무의 성질에 따라 천태만상일지라도 일정 불변하는 원리원칙을 해득 하면 공사광협은 물론이고 수기응변하여 그 사용이 결코 어렵지 않다.” 라고 말하고 있다.
김대희는 자본주의 경쟁원리, 실사구시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면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국가발전이라는 것보다는 기업차원에서 부기회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도 상인의 내면적 정신적 문제는 강조하지 않았다.
5)서양과 동양의 부기회계 관의 비교
동양의 강조점: 국가의 경제발전과 기업의 성장발전
서양의 강조점: 개인의 성실, 정직과 기업의 성장발전
주1)가산국가:
국가가 군주의 세습재산으로 간주되는 국가.
주2)호조:
고려 ·조선시대에 호구(戶口) ·공부(貢賦) ·전토 및 식량과 기타 재화 ·경제에 관한 정무(政務)를 맡아보던 중앙관청
주3)수세관:
조세를 걷기 위하여 지방에 파견하던 중앙의 벼슬아치
주4)탁지아문:
조선 말기 근대적 개혁에 따라 새롭게 이름 붙여진 정부 부처로, 재정(財政)·조세(租稅)·국채(國債)·화폐(貨幣)등 국가의 재무를 총괄하였다.
2)유길준의 부기회계
(2)유길준의 부기회계 관
‘서유견문’ 제14편 상고의 대도에서 상인과 상업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상고의 직분, 상고의 공부, 상고의 경계를 해설하고 있다.
상고의 공부에서 “상인된 자는 남다른 공부를 하여야 한다. .... 물화를 거래하거나 재물을 주고받을 때에 조리 있게 치부하는 법과 약속을 정하며 자본을 합하여 착실하게 회사를 운영하는 일...을 배워야 한다” 고 서술하고 있다.
상고의 경계에서 “회사의 규칙을 굳게 지키고, 또 장부를 세밀하게 기입하며, 회사의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부지하기 어렵고 장부를 기입하는 법이 자세하지 않으면 타인의 의심을 사기 쉽고” 라고 서술하고 있다.
유길준은 치부와 장부의 중요성은 설명하고 있으나 ‘서유견문’이란 책의 성격 탓인지 그 양과 질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다.
3)초기 은행의 부기회계
초창기 조선은행, 한성은행, 대한천일은행 등 모두가 한국의 전통 부기인 ‘송도사개치부법’ 을 사용하였다. 전통 치부법을 사용하던 한성은행이 1903년 12월 7일 재출범하면서 처음으로 횡서체 서양부기를 사용하였다.
한성은행은 운영자금으로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으로부터 자금을 차입하였던 관계로 그들이 추천하는 감리인을 협의원이라는 직함으로 채용하여야 했다. 일본은 서양부기에 의해 기장 할 것을 요구 했을 것이다. 당시 한성은행장 이재완이나 부장 김종한은 횡서체 서양부기를 볼 줄 몰라, 실무를 총괄한 우총무 한산용은 따로 한문장부를 만들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1906년 3월21일 한국의 은행조례가 칙령 제12호로 공포되고 시행되었다. 그 내용은
“제5조 은행은 매반개년 영업의 보고서를 조제하야 도지부 대신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제6조 은행은 매반개년 대차대조표를 조제하야 신이지 기타의 방법으로 삼일간 공고 하여야 한다.”
이 은행조례의 공시제도는 현대의 공시제도와 별 다른 바가 없다.
4)부기서
(1)임경재의 부기서
임경재는 1876년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에서 출생하였다. 1895년 관립외국어학교가 설립되자 일어학부에 입학하고, 아마 여기서 서양부기를 습득한 것으로 생각된다. 후에 ‘조선어학회’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의 창립에 참가하여 초창기의 한국어운동에 이바지한다. 임경재의 부기서는 1908년 ’신편은행부기학‘, ’간이상업부기학‘ 이 출판되었다.
임경재의 ‘신편은행부기학’의 서문을 요약해서 보면
“문명적 실업에 대한 사상이 일어남에 따라 인간관계도 복잡해지고, 그러므로 인간의 한계 있는 두뇌로써는 일일이 기억이 불가능하게 됨에 따라 필묵의 힘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관계를 기록하고 학문의 이치를 저술하여 잊지 않고 전습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재산에 대한 회계는 기억이 어려움으로 부기의 학리와 법칙이 발명된 것이다. 회계와 부기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부기학 응용의 필요를 약술하면 크게는 국가와 작게는 기업이 각각 재산을 가지고 있는 이상 출납이 있어야 하고 출납이 있으면 기억 역시 필요하고 또한 기억이 있으면 필요한 경우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두뇌로써는 해결하기 어렵다. 고로 부기의 이용이 없으면 실업의 발전을 저지하게 될 것이고 국운의 발전도 저해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재정의 정리 여하는 사업의 진퇴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부기는 회계의 역사이기 때문에 과거의 재정은 이것을 경유하여야 알 수 있는 것이고, 현재의 계획도 이것을 경유하여야 탐구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부기의 필요함은 당연함이 아니겠는가.”
임경재의 서문은 에토스의 일면을 강조하였다고 해석하여도 큰 무리가 없다고 하겠으나 기장이 개인의 성실성과 정직성과 관계가 있다는 언급은 없다.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부기서는 임경재의 경우보다는 상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면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2)김대희의 부기서
김대희는 1978년 경기도 과천현에서 출생하였다. 1895년에 일본 게이오 대학에 입학한다. 그 후 사립동경상업학교에 입학하고 1900년 3월에 졸업하고 귀국한다.
귀국 후 낙영학교 교사로 취임, 1904년 12월에 농상공학교 교관으로 전임하나 1906년 8월에 교관생활을 그만 두고 집필생활로 소일하면서 광신상업학교 교사 생활도 한다. 1909년 부기일어강습소를 차렸으나, 1910년 6월30일 대한제국 편집관보로 관에 들어가나 한일합병을 맞게돠자 관직을 그만두고 1911년 4월에 보성전문학교에서 상업학의 강의 맡았으나, 그만 행적을 감추고 만다.
그의 저서 ‘응용상업부기학’ 의 내용은 오늘날의 것과 별 차이가 없다. 김대희는 제1장 총론에서 “서양부기를 알지 못하고도 태평성대로 백업이 흥왕 하였다. 하여 부기학을 경시하는 사람이 있다. 약육강식하는 경쟁시대에 구규를 고수하고자 하는 사람은 문명의 적이오 망국할 민이다. 물론 어떤 학도 그 발달의 유래를 보면 학의 기초는 사실이고 학리는 사실을 각 관계상으로 관찰하여 조화일치하게 한 것인데 계산의 학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부기를 사용하는 범위는 그 업무의 성질에 따라 천태만상일지라도 일정 불변하는 원리원칙을 해득 하면 공사광협은 물론이고 수기응변하여 그 사용이 결코 어렵지 않다.” 라고 말하고 있다.
김대희는 자본주의 경쟁원리, 실사구시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면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국가발전이라는 것보다는 기업차원에서 부기회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도 상인의 내면적 정신적 문제는 강조하지 않았다.
5)서양과 동양의 부기회계 관의 비교
동양의 강조점: 국가의 경제발전과 기업의 성장발전
서양의 강조점: 개인의 성실, 정직과 기업의 성장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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