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아랍인들의 신라지리관과 서역문물의 한반도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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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세 아랍인들의 신라지리관과 서역문물의 한반도 전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이드리시(1099~1166)란 누구일까?
2. 중세 아랍인들이 본 신라의 지리관
가. 이슬람제국 전기(7~10세기)
나. 이슬람제국 후기(11~13세기)
3. 아립인의 관점에서의 신라의 특징
4. 신라 역사의 아랍인의 모습
가. 처용설화
나. 괘릉무인석
5. 서역문물의 한반도 전례
가. 서역의개념
나. 서역문물의 한반도 전례
1) 각종유리기구
2) 옥기류
3) 각종 모직품
4) 조형유물
5) 계림로 단검
6) 각종악기
7) 향

본문내용

에 이르러서는 중앙아시아와 인도뿐만 아니라, 멀리 페르시아(이란)와 대식(아랍)까지를 망라하였다. 이것이 넓은 의미의 서역으로서 근세까지의 개념이다. 통일신라가 상대한 서역은 넓은 의미의 서역으로서, 지역이 광대하고 민족이나 문화도 다양하여 교류의 폭도 그만큼 넓었다.
나. 서역문물의 한반도 전례
서역개통으로 인해 서역문물이 한반도에 전래된 상황을 「삼국사기」등과 관련 사적과 유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신라에 유입된 서역 문물을 주로 다룰 것이다. 신라에 유입된 서역의 문물을 크게 7가지로 나누고 거기에 대한설명을 덧붙일 것이다.
각종 유리 기구
고신라 유리군에 속하는 유리 공예품은 경주일원을 중심으로 하여 주로 고분의 부장품으로 출토된 각종 유리 공예품이다. 1세기에 들어오면서 대롱불기 기법의 등장으로 기술력이 더 더욱 발달하여 시리아-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로마 유리용기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때 등장한 대롱불기 기법은 벽이 얇은 유리용기를 등장시켰을 뿐 아니라 유리용기를 빨리 제작할 수 있게 만들었고 생산단가도 낮추었다. 그 결과 다량의 유리용기들이 로마사회 전역으로, 일부는 아시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로마(비잔티움) 유리용기는 한반도에서도 발견되었는데, 1973-75년 황남대총 발굴 때 나온 것을 비롯해 천마총금령총서봉총 등에서 20여점의 로마(비잔티움) 유리용기가 출토되었다. 그러나 금관총천마 총황남대총 같이 대체로 규모가 큰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한 기에서 3만여 점의 토기들이 출토되는데 반해 로마(비잔티움) 유리용기의 출토는 그 수가 극히 적다. 이는 로마(비잔티움) 유리용기가 당시 생산과 세공기술을 갖추고 있던 금과 달리 고난도의 대롱불기 기법을 익히지 못했던 신라에서 제작되지 않던 물건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로마(비잔티움) 유리용기는 어떤 경로를 통해 신라로 유입되었을까? 지금까지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외래물품을 소재로 신라의 대외교류양상을 파악하려는 국내 학자들의 연구는 신라에 유입된 유리용기가로마(비잔티움) 유리라는 점과 이 유리용기가 황금장식품의 기원과 함께 북방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되었다는데 대해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다.
유리의 형태상이나, 분묘의 조성시기, 비잔티움의 동방정책,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자. 첫째, 유리의 형태상으로 시기를 살펴보자. 신라에서 발견된 로마(비잔티움) 유리용기의 형태는 다양하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로마(비잔티움) 유리용기는 3줄 물결무늬가 장식된 파상문배(유리컵), 낮은 굽이달린 갈색 목리문배(木理紋盃, 나뭇결 무늬 유리잔), 표면을 원형으로 깎아 장식한 유리잔(원형 커트문배), 외형이 독특한 봉수형(鳳首形) 유리병이 있고, 천마총에서는 구갑문배, 금령총에서는 반점문 그릇, 서봉총에서는 감색 그릇, 옥전M1호분에서는 반점문 그릇 등이 출토되었다.
이미지1
이미지2
위에 보이는 봉수형 유리병은 아래 <이미지 1>에서 <이미지 2>으로 오이노코에(oinochoai) 5-6세기 형 태로 발전된 후기 로마글라스계와 형태가 유사한 점으로 볼 때 5-6세 기에 비잔티움에서 신라로 유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옥기류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까지 전파된 옥의주산지는 오아시스로 남도에 자리한 우기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옥은 우기만이 아니고 서역 대진국이나 아라비아·페러스아 등 그밖의 여러 지역에서도 채취도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우기의 옥이 월지족의 중개로 중국에 반입되었다. 은·주시대부터 당·송대에 이르기까지의 분묘에서 여러 가지 옥기가 발굴된 점으로 보아 상고시대부터 옥이 중국에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옥의 신비한 주력이나 영력을 믿고 제기나 전례 용기, 장신구 등에 많이 사용하였던 것이다. “삼국사기”잡지에 기재된 사용 금지의 옥기나 발굴된 고 신라 옥기 유물은 거개가 서역산 옥을 재료로 하고 중국의 기법이나 형태의 영향을 받은 것이 역력하다.
각종모직품
“삼국사기” 잡지에는 신라때 기물의 일종인 구수와 답등의 사용제한에 대한 기사가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육두품·사두품, 그리고 백성에 이르기까지 구수와 답등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용도나 글자 모양으로 보아 구수와 답등은 모직물의 일종이 분명하다. 원래 모직물은 유목민족의 특산물로서 한 대에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산 모직물이 대량으로 중국에 수입되었다. 수입경로는 서아시아로부터 중앙아시아 북부와 볼가 강 융역을 따라 동진하여 시베리아와 우랄, 그리고 천산 산맥 이북을 거쳐 중국에 이르는 길로서 대체로 초원로와 일치한다. 일부 학자들은 모피무역이 성행한 이 길을 ‘모피의 길“이라고도 부른다.
모피와 모직물은 비단 ‘모피의 길’주변 여러나라에서 생산·교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멀리 로마제국이나 인도에까지 수출되어 그곳에서 가공된 다음 다시 해로를 통해 중국에 반입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신라에서 사용된 모직물의 일종인 구수와 답등은 서역으로부터 중국을 경유하였거나, 혹은 직접 초원로나 해로를 거쳐 전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조형유물
약 70년 전 경주에서 발견되어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른바 ‘입수쌍조문석조유물’이 바로 그 일례다. 나무를 한가운데 두고 두 마리 새가 마주하고 있는 석조유물이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진 이 유물과 더불어 비슷한 무늬를 가진 직경 2.5cm의 ‘화수대금문금구’(꽃나무를 사이에 두고 날짐승이 마주보고 있는 무늬의 금제 기구)도 1966년 경주 황용사 목탑지사리구멍 속에서 발견되었다. 이 두 유물의 공통적인 무늬는 평면이 원형이고, 중앙에 나무를 배치하고 좌우에 날짐승을 대칭시키며, 원 밖에 옥을 두른 연주대가 있는 것인데, 이것은 대표적인 사산(이란)계 무늬로서, 신라가 그 새김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계림로 단검
1973년 6월 5~6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경주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14호 폐분에서 동아시아에서는 일찍이 출토된 예가 없는 단검이 발굴되었다. 게림로 단검 이라고 명명된 이단검은 길이가 36cm의 환원단검으로서, 홍마노와 누금으로 장식되었는데, 철제의검신은 부식되어 없어지고 표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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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8.20
  • 저작시기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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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96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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