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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전기 농업][농업생산력][수전농업][농업의 기술][이앙법]조선전기 농업의 성격, 조선전기 농업의 농업생산력, 조선전기 농업의 수전농업, 조선후기 농업의 기술, 조선후기 농업의 이앙법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조선전기 농업의 성격
1. 조선전기의 농업환경
2. 조선전기의 자연환경
3. 조선전기의 노동력
4. 조선전기의 노동수단
5. 조선전기의 노동대상

Ⅲ. 조선전기 농업의 농업생산력

Ⅳ. 조선전기 농업의 수전농업
1. 14~15세기 화경금지론의 의미
2. 15세기 수리정책과 수리시설
3. 15~16세기의 저평지․저습지 개간
4. 선산지역의 경제발전과 수전농업

Ⅴ. 조선후기 농업의 기술

Ⅵ. 조선후기 농업의 이앙법

참고문헌

본문내용

의 그것과 어떻게 달랐었는지를 완벽하게 밝혀내기 어렵다 하겠다. 단지 당시의 기후가 오늘날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건조지수를 통해본 한국의 기후가 중국과 일본의 중간자적 성격을 가졌었다고 일단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의 기후가 중국과 맞먹는 봄가뭄(春旱)과 일본을 능가하는 여름 장마(夏雨), 그리고 작물의 월동이 곤란할 만큼 추운 겨울을 가졌었다고 추정할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황토’와 다른 토양조건, 그리고 평야보다는 산이 월등하게 많아서(전국토의 70%) 대부분의 농작업이 계곡 간에 의치한 경사지에서 전개되었으리란 조건도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당시의 우리 농민들은 이러한 특유의 자연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사정은 이 시대 농업의 기본적인 성격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었다고 생각된다.
3. 조선전기의 노동력
조선전기의 농민들의 계급구성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파악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이 시대의 인구수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의 권태환등의 연구는 조선초기의 인구를 약 400-500만 명 정도로 추정하였었다. 그에 비해 필자는 1392년의 인구가 대략 750만 명이었는데, 이 인구가 1592년경에는 1,012만 명으로 증가하였으며 그 인구성장률이 0.15 - 0.20%였었다고 대략 추정하였다. 비교적 정확한 추정이 가능한 조선말기의 인구수(1910년; 약 1,750명)와 비교할 때 조선전기의 인구는 약 그 절반정도에 머물고 있었다. 이로보아 조선전기는 전반적으로 조선후기에 비해 낮은 인구밀도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전기의 인구밀도도 지역간에 있어 심대한 격차를 가졌었는데 특히 하삼도의 그것은 타 지역에 비해 비교적 높은 밀도를 가졌을 것이다. 한편 조선전기 인구의 계급구성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조선전기 인구 중에서 농민은 전체인구의 적어도 85%이상을 차지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조선전기 호의 성격이 통계적으로 평균 3 자연호 정도가 한 법제호(法制戶)를 이루는 편호(編戶)였으며, 당시 호구통계에서 나타난 구(口)도 남정(男丁)만을 의미하였음이 밝혀졌다. 또한 현존하는 호적 중에서 가장 조선전기에 근접한 1690년경의 대구부 호적을 살펴볼 때 이 시대 이 지역의 계급구성은 양반호 평민호 노비호가 각 각 9.2%, 53.7%, 37.1%였었다. ‘양반호의 증가’ ‘노비호의 감소’라는 전반적인 변화과정을 감안할 때 조선전기의 인구는 이 수치보다 더욱 적은 양반호, 더욱 많은 노비호로 구성되었었음을 우리는 추정할 수 있겠다. 물론 상당한 규모의 양인호가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전기에는 노비가 전체인구의 적어도 40-50%를 넘고 있었다고 생각되며, 그러한 사정은 조선전기 농업노동의 상당부분이 노비에 의해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최근 들어 ‘조선전기 노비의 존재형태’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들이 조금씩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재기를 중심으로 한 조선전기 고문서에 대한 분석결과에 주목하고자 한다. 우리는 여기에 대한 오랜 통설의 허구성에 대해 검토해야만할 것이다. 먼저 필자가 검토해본 자료에 관한한 조선전기의 노비들은 솔거노비(率居奴婢)가 외거노비(外居奴婢)보다 더욱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또한 이들 솔거노비들은 비록 주가(主家)의 강한 경제적 신분적 압박을 받고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통설이 이해하는 것처럼 그 모두가 ‘가내사환노비(家內使喚奴婢)’적 존재로만 구성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조선전기의 솔거노비들은 주가의 농장(農莊) 주변에 거주하면서 “제한된 형태나마 자기경리를 가지면서 수시로 부역노동만을 제공하는 형태”인 솔하노비(率下奴婢)가 지배적이었다. 이른바 독자적인 자기의 농업경영을 가지면서 주가에 신역(身役)으로서의 부역노동을 주로 제공하였던 이들이 조선전기 노비의 주류였었던 것이다. 한편 주가에 그들의 잉여생산물을 신공(身貢)이란 이름으로 제공하였던 외거노비들 중에서도 노비전호 노비자작농 노비지주 등의 유형이 존재하였었다.
김석형에 의해 조선전기 노비의 전형이라까지 지칭되었던 이 노비전호(전호적 노비)의 수나 비중은 실제에 있어서는 솔하노비의 경우보다 오히려 적었다고 보여진다. 솔거노비가 전체 노비의 7-80%를 차지하였던 상황에서 외거노비의 한 유형인 노비전호가 갖는 비중은 작을 수밖에 없었으며, 의외로 노비자작농이나 노비지주의 경우도 적지 않게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보아 조선전기의 인구는 대략 700-1,000만 명에 달하였는데, 이들은 농업생산 및 조세 부역을 이유로 편호의 형태로 묶여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특히 조선전기에는 노비의 비중이 비교적 컸었는데 그 주류는 자기의 경영을 가진 채 주가에 부역노동을 제공하였던 솔거노비(솔하노비)였고, 외거노비로서 타인의 토지를 소작하였던 노비전호가 그 다음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다음으로 양인자작농 양인전호 양인지주 등의 양인신분의 농민도 존재하였던 것이다.
4. 조선전기의 노동수단
다음으로 역축 농구 토지개량설비 등을 하나하나 검토해봄으로서 이 시대 노동수단의 역사적 성격을 살펴보자. 조선전기의 주요한 역축은 바로 ‘소’였다. 조선전기 재지사족층의 농장경영에 사용된 대농법을 주로 기술하였던 농사직설에서는 반드시 ‘두 마리의 소’가 한 셋트로서 작업에 동원되었을 정도로 풍부하게 사용되었다. 그에 비해 당시 경기도지역 소빈농층의 농법을 기술한 금양잡록서는 “100가(家)가 사는 마을에 농사일을 맡을 수 있는 소가 겨우 몇 마리뿐”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전기 농업이 ‘소’를 풍부히 구사하는 노동생산성 중심의 대농법과 그렇지 못한 열악한 소농법으로, 일견 모순되게 구성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이중구조는 농구분석에서도 더욱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조선전기의 농구체계는 다양한 우경구(牛耕具)와 수경구(手耕具)가 각각 분화 발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뚜렷한 특징을 드러내 보였다. 이른바 선진기술로 편집된 직설에서는 ‘보(有僻反轉黎)’ ‘발외(作條黎)’등의 다양한 종류의 경려와 축력농구가 등장하였는데 비해, 소빈농층의 경기작업에서는 ‘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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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9.01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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