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인상주의화가 클로드 모네
Ⅲ. 인상주의화가 에드가 드가
1. 베렐리 가족(LA FAMILLE BELLELLI)
2. 세탁물을 운반하는 두 세탁녀
3. 예술가의 초상( PORTRAIT DE L`ARTISTE)
4. 젊은 여인의 초상(PORTRAIT DE JEUNE FEMME)
5. 예술 애호가(L`AMATEUR)
Ⅳ. 인상주의화가 피사로
Ⅴ. 신인상주의화가 쇠라
1. 미역감는 사람들
2. 일요일오후의 그랑자트섬
3. 퍼레이드
Ⅵ. 후기인상주의화가 빈센트 반 고흐
1. 1881- 농부, 네델란드 풍경
2. 1886 파리
3. 1888 아를르 - 가장 왕성한 시기
4. 1889 생레미
Ⅶ. 후기인상주의화가 폴 세잔(폴 세잔느)
Ⅷ. 후기인상주의화가 폴 고갱
참고문헌
Ⅱ. 인상주의화가 클로드 모네
Ⅲ. 인상주의화가 에드가 드가
1. 베렐리 가족(LA FAMILLE BELLELLI)
2. 세탁물을 운반하는 두 세탁녀
3. 예술가의 초상( PORTRAIT DE L`ARTISTE)
4. 젊은 여인의 초상(PORTRAIT DE JEUNE FEMME)
5. 예술 애호가(L`AMATEUR)
Ⅳ. 인상주의화가 피사로
Ⅴ. 신인상주의화가 쇠라
1. 미역감는 사람들
2. 일요일오후의 그랑자트섬
3. 퍼레이드
Ⅵ. 후기인상주의화가 빈센트 반 고흐
1. 1881- 농부, 네델란드 풍경
2. 1886 파리
3. 1888 아를르 - 가장 왕성한 시기
4. 1889 생레미
Ⅶ. 후기인상주의화가 폴 세잔(폴 세잔느)
Ⅷ. 후기인상주의화가 폴 고갱
참고문헌
본문내용
되었고 무대위의 사람들은 부동성과 견고함을 가진 반면 우리에게도 등을 돌리고 있는 구경꾼들의 뒷모습은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작품은 수학적 조화를 이루는데 황금비례를 적용시켰다. 평론가 페네옹(Felix Feneon) 은 쇠라와 같이 광선과 색채를 체계적으로 구사한 미술을 \"신인상주의(Neo-Impressionisme)\" 라고 명명하였다. 쇠라와 함께 신 인상주의 미술이념에 가장 큰 역할을 한 화가 폴 시냑으로 앙그르, 뒤브와 필레, 뤼스, 크로스와 같은 화가들과 반데벨레(건축가)를 비롯, 뤼셀베그그에 의해 받아들여 빛과 색채의 조화를 최대한 나타내려고 했으나 그들의 체계적인 방법과 이념은 각자 개인의 감수성을 희생시겨야만 했기에 신인상주의에 잠시 머무르다 떠나가 버렸다. 신 인상주의는 1904년을 전후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데 마티스를 비롯한 야수주의 대부분의 화가들과 피카소, 들로네, 칸딘스키, 그리고 미래주의 작가들의 초기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Ⅵ. 후기인상주의화가 빈센트 반 고흐
세잔느와 쇠라가 인상주의 약식을 엄격한 고전주의 양식으로 만들어 가고 있을 때 고호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화필을 이끌어 갔다. 인상주의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을 표현하는 데 충분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믿었으며 이 점이 그의 주요관심사로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자연을 재구성하지 않고 사물의 전형적인 성질을 부각했으며 사물이 가진 독특한 면을 드러내려 했다. 화면의 모든 형태는 고호 바로 자신처럼 느껴지도록 개성적인 화필과 색면으로 균형감과 움직임을 강조했다. 특히 터치에 의한 동적인 화면은 그의 그림의 특색으로 고호 자신의 치열한 예술가로서의 삶과 생명의 모든 형태를 통합하여 표현하려 했던 그의 강한 종교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형태왜곡은 추상을 예고하여 병적 심리 내면적 드라마의 표출이라는 면에서 20세기 표현주의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1. 1881- 농부, 네델란드 풍경
목탄을 사용하는 드로잉이나 어두운 색의 유화가 대부분이며 농부들의 일상생활을 기독교의 도덕성과 복합시키는 주제를 사용했다.
2. 1886 파리
밝은 광선, 색채로 덮은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판화와 베르나르의 영향으로 색채를 평면으로 강렬하게 구사하며 윤곽선을 강조한다.
3. 1888 아를르 - 가장 왕성한 시기
대상은 야외의 풍경이나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지만 주제는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는 것들이다 물리적 세계에서 느끼는 주관적 감정 세계와 작가의 직접적 통화를 더 중시한다는 점에서 인상주의를 탈피하고 있다.
4. 1889 생레미
격렬하고 충동적인 붓처리로 표현주의 성격을 강조한다. 50*100cm 크기의 수평적 캔버스가 많으며 아를르 시기의 원색 사용보다 초록색, 파랑, 검은색 사용이 특징이다. -개인적이며 어느 그림에서나 화가 자신의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있다. 37점의 자화상이 남겨졌다.
Ⅶ. 후기인상주의화가 폴 세잔(폴 세잔느)
후기 인상파 화가들 중에서 최연장자인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은 지중해 연안에 가까운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매우 정서적인 기질의 소유자였던 그는 1816년 파리에 나가면서 곧 낭만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인상주의를 미술관의 미술처럼 견고하고 영속적인 것으로 마들 것을 결심했다. 그의 1860년대의 낭만주의적 감정의 분출은 이제, 감정을 억누르고 형태와 색체의 조화를 끈기 있고 세련되게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하여 필촉 하나하나가 마치 건축재(建築材)처럼 화면의 구성 안에 견고하게 놓여지게 되었다. 색체는 따뜻한 색과 찬색의 톤의 화음이 화면 전체에 울려 퍼지도록 신중하게 계산되어 있다. 세잔은 자기의 정서를 색이나 감각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무작정 그러한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자연을 해석하는 것을 통해서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을 택하였다는 것이다. 자연을 자기의 정서로서 일단 받아 드린 후 다시 자연의, 기본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새로운 자연 즉 예술적인 자연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비교적 규칙적인 필체로 묘사된 이 자화상은 뒷면 배경 왼쪽에 그어져 있는 두 개의 평행선과 평행 하는 수직선으로 기하학적인 구성을 지향하고 있는 세쟌 예술 세계의 맹아를 볼 수 있다. 색감에 있어서도 배경은 청록색을 주조로 비교적 어둡게 통일되고 있고 이는 인물에까지 퍼져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그의 이러한 색체의 구성과 필촉은 일찍이 베르나르에게 말한 대로 새르댕의 아름다운 파스텔<자화상>에서 영향받은 바 적지 않다고 하고 있다. 세쟌은 뒤에 원숙하여 초상화를 많이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하나가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이다. 무엇을 기다리며 명상에 잠긴 소년의 모습은, 쥐어진 손으로 그의 깊은 표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눈은 한없이 멀리 돌려져 있음을 볼 때, 생각과 아쉬움이 동시에 그를 싸돌고 있음이 감지(感知)된다. 비동질성을 가진 소년의 심적(心的) 무게는 배경 벽면의 구조적인 요소들이 짙은 보라색으로 횡선( 橫線)을 크게 지어 화면을 가로지르는 것으로 나타나고 현실이라는 구체성을 강조시켜, 대조적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에 곁들어 벽면의 액자가 일부 노출되고 있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이러한 고정적인 면에 대조적으로 머리를 대고 있는 대각선의 팔과, 테이블보, 좌측의 커튼 등이 동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빨간 조끼와 셔츠의 색은 빛의 작용을 감지하여 줄만큼 변화가 있다.
Ⅷ. 후기인상주의화가 폴 고갱
고갱은 오를레앙 출신의 저널리스트인 아버지와 페루의 프랑스계 혼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인 1851년 고갱 가족은 리마로 이주했다가 4년 뒤에 폴과 그의 어머니는 오를레앙으로 돌아왔다. 고갱은 17세부터 6년 동안 화물선과 군함을 타고 세계를 항해하다가 1871년 파리의 베르탱주식중개회사에 들어갔고, 1873년 젊은 덴마크 여인 메트 소피 가드와 결혼했다. 그는 후견인이었던 귀스타브 아로사의 영향으로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아로사는 코로
Ⅵ. 후기인상주의화가 빈센트 반 고흐
세잔느와 쇠라가 인상주의 약식을 엄격한 고전주의 양식으로 만들어 가고 있을 때 고호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화필을 이끌어 갔다. 인상주의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을 표현하는 데 충분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믿었으며 이 점이 그의 주요관심사로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자연을 재구성하지 않고 사물의 전형적인 성질을 부각했으며 사물이 가진 독특한 면을 드러내려 했다. 화면의 모든 형태는 고호 바로 자신처럼 느껴지도록 개성적인 화필과 색면으로 균형감과 움직임을 강조했다. 특히 터치에 의한 동적인 화면은 그의 그림의 특색으로 고호 자신의 치열한 예술가로서의 삶과 생명의 모든 형태를 통합하여 표현하려 했던 그의 강한 종교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형태왜곡은 추상을 예고하여 병적 심리 내면적 드라마의 표출이라는 면에서 20세기 표현주의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1. 1881- 농부, 네델란드 풍경
목탄을 사용하는 드로잉이나 어두운 색의 유화가 대부분이며 농부들의 일상생활을 기독교의 도덕성과 복합시키는 주제를 사용했다.
2. 1886 파리
밝은 광선, 색채로 덮은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판화와 베르나르의 영향으로 색채를 평면으로 강렬하게 구사하며 윤곽선을 강조한다.
3. 1888 아를르 - 가장 왕성한 시기
대상은 야외의 풍경이나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지만 주제는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는 것들이다 물리적 세계에서 느끼는 주관적 감정 세계와 작가의 직접적 통화를 더 중시한다는 점에서 인상주의를 탈피하고 있다.
4. 1889 생레미
격렬하고 충동적인 붓처리로 표현주의 성격을 강조한다. 50*100cm 크기의 수평적 캔버스가 많으며 아를르 시기의 원색 사용보다 초록색, 파랑, 검은색 사용이 특징이다. -개인적이며 어느 그림에서나 화가 자신의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있다. 37점의 자화상이 남겨졌다.
Ⅶ. 후기인상주의화가 폴 세잔(폴 세잔느)
후기 인상파 화가들 중에서 최연장자인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은 지중해 연안에 가까운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매우 정서적인 기질의 소유자였던 그는 1816년 파리에 나가면서 곧 낭만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인상주의를 미술관의 미술처럼 견고하고 영속적인 것으로 마들 것을 결심했다. 그의 1860년대의 낭만주의적 감정의 분출은 이제, 감정을 억누르고 형태와 색체의 조화를 끈기 있고 세련되게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하여 필촉 하나하나가 마치 건축재(建築材)처럼 화면의 구성 안에 견고하게 놓여지게 되었다. 색체는 따뜻한 색과 찬색의 톤의 화음이 화면 전체에 울려 퍼지도록 신중하게 계산되어 있다. 세잔은 자기의 정서를 색이나 감각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무작정 그러한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자연을 해석하는 것을 통해서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을 택하였다는 것이다. 자연을 자기의 정서로서 일단 받아 드린 후 다시 자연의, 기본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새로운 자연 즉 예술적인 자연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비교적 규칙적인 필체로 묘사된 이 자화상은 뒷면 배경 왼쪽에 그어져 있는 두 개의 평행선과 평행 하는 수직선으로 기하학적인 구성을 지향하고 있는 세쟌 예술 세계의 맹아를 볼 수 있다. 색감에 있어서도 배경은 청록색을 주조로 비교적 어둡게 통일되고 있고 이는 인물에까지 퍼져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그의 이러한 색체의 구성과 필촉은 일찍이 베르나르에게 말한 대로 새르댕의 아름다운 파스텔<자화상>에서 영향받은 바 적지 않다고 하고 있다. 세쟌은 뒤에 원숙하여 초상화를 많이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하나가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이다. 무엇을 기다리며 명상에 잠긴 소년의 모습은, 쥐어진 손으로 그의 깊은 표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눈은 한없이 멀리 돌려져 있음을 볼 때, 생각과 아쉬움이 동시에 그를 싸돌고 있음이 감지(感知)된다. 비동질성을 가진 소년의 심적(心的) 무게는 배경 벽면의 구조적인 요소들이 짙은 보라색으로 횡선( 橫線)을 크게 지어 화면을 가로지르는 것으로 나타나고 현실이라는 구체성을 강조시켜, 대조적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에 곁들어 벽면의 액자가 일부 노출되고 있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이러한 고정적인 면에 대조적으로 머리를 대고 있는 대각선의 팔과, 테이블보, 좌측의 커튼 등이 동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빨간 조끼와 셔츠의 색은 빛의 작용을 감지하여 줄만큼 변화가 있다.
Ⅷ. 후기인상주의화가 폴 고갱
고갱은 오를레앙 출신의 저널리스트인 아버지와 페루의 프랑스계 혼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인 1851년 고갱 가족은 리마로 이주했다가 4년 뒤에 폴과 그의 어머니는 오를레앙으로 돌아왔다. 고갱은 17세부터 6년 동안 화물선과 군함을 타고 세계를 항해하다가 1871년 파리의 베르탱주식중개회사에 들어갔고, 1873년 젊은 덴마크 여인 메트 소피 가드와 결혼했다. 그는 후견인이었던 귀스타브 아로사의 영향으로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아로사는 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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