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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민중미술][민중미술 변천][민중미술과 미술운동][민중미술 예술적 성과][민중미술 문제점]민중미술의 정의, 민중미술의 변천, 민중미술과 미술운동, 민중미술의 예술적 성과, 민중미술의 문제점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민중미술의 정의

Ⅲ. 민중미술의 변천
1. 신학철
2. 민정기
3. 이종구
4. 임옥상
5. 오윤
6. 최병수, 문명미, 김경고, 김태경, 이소연의 공동 제작
7. 광주시각매체연구소 공동작<광주민중항쟁>
8. 이반<동해의 횃불>
9. 박불똥<독점자본>

Ⅳ. 민중미술과 미술운동
1.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광자협): 1979~1984
2. 시각매체연구소(시매연): 1985~1988

Ⅴ. 민중미술의 예술적 성과
1. 강연균
2. 홍성담
3. 나상옥

Ⅵ. 민중미술의 문제점

참고문헌

본문내용

선출되기도 하였으며, 광미공의 지도위원직을 맡았다. 강연균의 사실주의의 표현기량과 청년작가들의 투쟁성과 선명성이 서로의 조건 속에서 역할을 갖고 상호교류를 통해 상호보완을 이룰 기회가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홍성담
홍성담은 1980년대 민족민중미술운동사에서 열정스런 몸짓으로 변혁기 예술의 사회실천적 역할을 조직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문예활동가이자 ‘5월의 작가’이다. 그리고 1980년대 홍성담의 본격적인 판화작업이 가져다준 결실 역시 괄목할 만하다. 홍성담의 목판화는 1983 - 84년에 오면 그 이전 시기와 다른 큰 변화를 가져온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5월 항쟁 직후 고개를 떨군 사람들의 패배적인 모습에서 전투적이고 저항심에 가득찬 표정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표현양식에서도 어두운 음각선묘 중심에서 굵은 양각선묘의 사용으로 그 변화가 두드러진다. <대동세상 1>(1984)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대동세상 1>은 계엄군을 몰아낸 ‘5월’의 해방공간에서 이루어진 시민군과 시민의 공동체적 즐거움을 담은 것으로 5월 연작판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작품의 크기도 비교적 대작이고 이 시기 홍성담 판화의 대표격이다. 이와 달리 1984 - 85년의 5월 연작판화에 등장하는 <칼춤>, <낫춤>, <시민군 신장도>, <불춤>과 광주문화신장의 <윤상원 열사도>는 민중적 항거의 몸짓을 무속적 도상으로 풀어낸 것이다. 이것들은 김정환의 시와 함께 해방판화시집(일월서각, 1987. 8)으로 발간되었다. 그리고 5월 판화 50점을 묶어『새벽』이라는 판화집을 내기도 했다.
아울러 평가되어야 할 일은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의 슬라이드를 1989년 평양 청년학생축전에 보낸 사실이다. 그 때문에 홍성담을 비롯하여 민미련의 주요 작가들이 구속되고 미술운동에 대한 공안당국의 탄압을 가중시켰지만 통일 지향의 미술교류 실천을 과감히 시도한 점은 높이 살 만하다. 재판과정에서 밝혀졌듯 이 걸개그림의 슬라이드는 평양화가들에 의해 원래 크기대로 다시 제작되어 북한 주민들이 감상했다고 한다.
또한 이 시기 해외활동의 길이 열리는데, 1988년도에는 4월부터 7월까지 서독 니더작센주 개신교 성인교육의 ‘한국의 행사’에 초청을 받게 된다. ‘한국민중판화 말뚝이전’을 비롯하여 대중강연, 판화교실, 개인전(헨켄화랑), 5월제 행사 등 문화행사를 통하여 홍성담은 우리의 전통적 민중예술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과 1980년대 민중미술을 해외에 올바로 알리는 데도 한몫 하였다. 1989년 구속된 이후에는 일본, 미국, 독일, 영국 등지의 구명운동과 함께 판화전시가 이루어졌으며, 1990년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영국지부는 홍성담을 ‘올해의 양심수’로 선정하여 그래스고우시에서 판화전을 개최했다.
3. 나상옥
나상옥에게 5월의 의미는 각별하다. 1980년 5월 당시 대학 3학년으로 학생운동의 경험조차 없던 그는 참상을 목격하면서 자발적인 참여를 하게 된다. 친구 몇몇과 함께 무질서한 차량운행을 통제하는 데 거들다가 백운동 파출소의 무기고를 찾았다. 5월 21일의 일이다. 교련시간에 배운 지식을 십분 발휘하여 사격이 가능한 총을 가려내고 나누어주는 일을 맡았고, 화정동에서는 계엄군의 진입로에 원목을 끌어다 바리케이드를 치는 작업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조직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터에 결국 5월 26일 오후 도청을 나와 집으로 향하게 된다. 이 행동은 훗날 그가 산 자로서의 부담과 비굴했다는 등짐을 지고 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생활 속에서 5월의 체험을 새롭게 재인식하게 된 것은 1985년 5월 행사 중 유가족행렬을 보면서였다고 한다. 그 광경은 1980년 5월 26일 도청을 빠져나온 죄책감을 되살아나게 하였고, 작업에 대한 다짐은 물론 작품세계의 방향을 설정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 때 조각한 작품이 상복을 입고 영정을 든 남자인물상으로 <3일째 되는 날>이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5월의 체험들을 형상화하는 데 어느 정도 자신감을 주었고 이 때부터 본격적인 작품구상에 몰두하게 된다. 그 결실은 1989년 6월에야 ‘5월의 사람들’이라는 개인전으로 보게 된다. 이 작품전은 5월을 형상화한 최초의 개인전이라는 데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 때 나상옥이 자신감 넘치는 묘사력으로 설명한 5월 광주사람들의 격정적인 형상들은 그가 발로 체험한 현장 그대로를 담은 것이었다.
나상옥의 인물 형상들을 때로는 치밀하게 묘사하면서도 거칠게 단순화시킨 재빠른 손놀림으로 광주 5월의 정서를 풀어내었다. 이런 작업은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담는 서술적 이야기 조각의 전형적인 창작방법을 보여준 좋은 사례이다. 더욱이 열악한 광주지역의 조각계 풍토에서 그가 배출되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나아가 그는 뜻을 같이 하는 후배들과 5월 조각패를 결성하였고, 그 이후의 활동성과를 토대로 1996년 망월동의 성역화에 따라 광주항쟁기념탑과 조각을 제작하였다.
Ⅵ. 민중미술의 문제점
80년대 민족민중미술에서의 한계와 문제점은 미술이 정치적 지향논리에 종속되어 동시대 미적 가치를 사회적, 이념적 가치로만 해석하여 90년대 국내외적인 정치적 변수에만 매달려 그들 스스로 자기한계에서 벗어나는 창조논리를 펼쳐 내지 못했다는 점이 한계점과 문제점으로 제기된다.
이러한 80년대 민족민중미술에서의 두드러진 면모는 이데올로기적인 특성이 강하게 노출되었고 또한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중미술에의 관심도 지대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정치적 투쟁이 앞섰지 진정한 민중미술로는 꽃 피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한 선명한 운동논리에 미술이 종속되어 미적 가치를 잃어버렸다. 조직의 이름으로, 민중의 이름으로, 혁명의 이름으로 예술적 실패가 합리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참고문헌
○ 김춘일(1984), 미술교육론, 홍성사
○ 박휘락(1998), 한국 미술 교육사, 서울 : 예경
○ 성완경, 민중미술, 모더니즘, 시각문화, 열화당
○ 이재선 저(1999), 민중미술을 향하여, 과학과 사상
○ 월간미술(1994), 민중미술-15년을 다시 본다
○ 현실과 발언 편집부 편(1990), 민중미술을 향하여, 서울 : 과학과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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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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