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신라의 멸망과 마의태자의 선택
1. 신라의 멸망
2. 마의태자의 선택
Ⅱ. 마의태자는 왜 인제를 선택했는가?
1. 인제로 들어 온 경로
2. 인제에 남아있는 전설과 유적의 분포양태
Ⅲ. 상남면 김부리의 大王洞祭
1. 마을 공동체로서 김부리
2. 치제 양태와 특징
맺음말
¶ 參考文獻
1. 신라의 멸망
2. 마의태자의 선택
Ⅱ. 마의태자는 왜 인제를 선택했는가?
1. 인제로 들어 온 경로
2. 인제에 남아있는 전설과 유적의 분포양태
Ⅲ. 상남면 김부리의 大王洞祭
1. 마을 공동체로서 김부리
2. 치제 양태와 특징
맺음말
¶ 參考文獻
본문내용
넘어 충주로 들어 온 것 같다. 충주를 지나 두 번째로 나타나는 장소는 양평이다. 양평 용문사에는 마의태자가 지팡이를 꽂아서 은행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양평을 거쳐 인제로 들어가는 관문인 홍천에서도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는데 홍천의 지왕동은 ‘왕이 지나갔다’라고 해서 생겨난 지명으로 위의 유적과 전설을 통해 볼 때 마의태자는 경주에서 계립령(하늘재)까지 와서 충주를 거쳐 양평에 이른 뒤 홍천을 지나 인제에 들어온 것 같다.
인제에는 3개면(상남면, 남면, 북면)에 걸쳐서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과 지명유래가 가장 많이 전해지는 곳이다. 옥새를 숨겨두었다는 옥새바위, 왕의 무덤이 있다는 대왕릉터, 맹장군이 병사를 모아 훈련을 시키고 군량을 모아 두었던 창고가 있었다는 맹개골과 군량리, 그리고 ‘옛 땅을 되찾자’ 라는 뜻의 다물리까지 인제 지역에는 유독 마의태자와 관련된 유적과 전설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경주에서 인제로 오기까지 남아 있는 충주, 양평, 홍천의 전설과 유적은 마의태자가 이동하면서 생겨난 전설인데 비해 인제에 남아 있는 유적과 전설은 한 동안 마의태자와 그 일행이 일정 기간 어떠한 형태로든 인제에 정착했었음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결국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일정 기간 인제에 정착하였고, 그로 인해 생겨난 유적과 전설들이 조선 초기 이후에 인제군 김부리 지역에 마을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전설과 지명 유래들이 다양하게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에는 대왕동제가 전해지고 있다. 이 동제는 조선 초기 때부터 지낸 것으로 보여 진다. 이는 적어도 마을 공동체의 성격을 전제로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輿地圖書』에 나타나는 김부리의 인구는 12호 45명으로 이런 사실로 볼 때 조선 초기에는 약 10호 정도의 사람들이 마을에 정착해 살고 있었을 거라 짐작된다. 김부리에 마을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마을 주민들은 김부리 지역에 남아있던 유적과 전설을 토대로 마의태자를 신격화하여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지내는 동제로 계승 발전 된 것으로 보인다.
한 나라의 태자였던 마의태자는 옷감이 거칠고, 장례식 때 주로 입는 삼베옷을 입고 다녔다. 아마도 당시 김부리 주민에게는 태자로서 화려하고 값 비싼 비단이 아닌 옷을 입으며 생활하던 마의태자의 서민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며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마의태자는 김부리 주민에게 단순히 쳐다 볼 수 없는 높은 곳에 있는 한 나라의 태자가 아니라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마을의 어르신 같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인제 사람들은 마의태자가 김부리에 머물다가 신라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고 믿고 있다. 물론 마의태자가 김부리에서 적극적인 항쟁을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인제 사람들에게 마의태자는 허무하게 모든 것을 버리고 개골산에 들어가 여생을 마친 나약한 태자가 아니라 나라를 다시 되찾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던 인물로 여겨지고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김부리 동제는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음력 5월 5일과 9월 9일 두 차례에 걸쳐 온 마을 주민들이 제사를 같이 지내고 끝난 후에는 길쌈과 그네 놀이를 즐기는 등 그 전통이 계승되었지만 군사훈련장이 들어서면서 모든 마을 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면서 마을 전체의 잔치이자 축제였던 김부리 동제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의태자를 시조로 모시고 있는 ‘부안 김씨’에서 매년음력 9월 9일 한 차례 씩 김부리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있어서 다행히 동제의 전통은 이어져 가고 있다.
필자가 뜻 한 바로는 경주→금강산까지의 마의태자의 이동경로를 구체적이면서 명확하게 살피고, 인제지역의 남겨진 마의태자의 전설과 유적이 갖는 지방사적 의미를 규명하며 ‘김부리 동제’의 제의 성격을 밝히고 싶었지만 사료의 한계에 따라 여러 가지 억측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작업이 그 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지방 사회의 향토문화 유적과 전설을 이해하고 재조명하는데 새로운 방향이 되지 않을까 자위한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 다면 인제 지역의 향토사에 대해 좀 더 연구하고 보완하고 싶다.
¶ 參考文獻
-원사료-
『高麗史』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增東國輿地勝覽』
『輿地圖書』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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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학연구회 엮음, 『한국역사학입문 2』, 풀빛,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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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에는 대왕동제가 전해지고 있다. 이 동제는 조선 초기 때부터 지낸 것으로 보여 진다. 이는 적어도 마을 공동체의 성격을 전제로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輿地圖書』에 나타나는 김부리의 인구는 12호 45명으로 이런 사실로 볼 때 조선 초기에는 약 10호 정도의 사람들이 마을에 정착해 살고 있었을 거라 짐작된다. 김부리에 마을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마을 주민들은 김부리 지역에 남아있던 유적과 전설을 토대로 마의태자를 신격화하여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지내는 동제로 계승 발전 된 것으로 보인다.
한 나라의 태자였던 마의태자는 옷감이 거칠고, 장례식 때 주로 입는 삼베옷을 입고 다녔다. 아마도 당시 김부리 주민에게는 태자로서 화려하고 값 비싼 비단이 아닌 옷을 입으며 생활하던 마의태자의 서민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며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마의태자는 김부리 주민에게 단순히 쳐다 볼 수 없는 높은 곳에 있는 한 나라의 태자가 아니라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마을의 어르신 같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인제 사람들은 마의태자가 김부리에 머물다가 신라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고 믿고 있다. 물론 마의태자가 김부리에서 적극적인 항쟁을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인제 사람들에게 마의태자는 허무하게 모든 것을 버리고 개골산에 들어가 여생을 마친 나약한 태자가 아니라 나라를 다시 되찾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던 인물로 여겨지고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김부리 동제는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음력 5월 5일과 9월 9일 두 차례에 걸쳐 온 마을 주민들이 제사를 같이 지내고 끝난 후에는 길쌈과 그네 놀이를 즐기는 등 그 전통이 계승되었지만 군사훈련장이 들어서면서 모든 마을 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면서 마을 전체의 잔치이자 축제였던 김부리 동제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의태자를 시조로 모시고 있는 ‘부안 김씨’에서 매년음력 9월 9일 한 차례 씩 김부리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있어서 다행히 동제의 전통은 이어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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