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고려 말의 왜구
1. 고려 말 왜구의 실제 모습
2. 왜구가 발생한 원인
Ⅲ. 고려 말의 마산과 그 주변의 왜구
Ⅳ. 고려 말 마산의 군사적 위치
Ⅴ. 맺음말
Ⅱ. 고려 말의 왜구
1. 고려 말 왜구의 실제 모습
2. 왜구가 발생한 원인
Ⅲ. 고려 말의 마산과 그 주변의 왜구
Ⅳ. 고려 말 마산의 군사적 위치
Ⅴ. 맺음말
본문내용
의 요새로서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마산지역이 왜구문제와 더불어 군사적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은 이 지역이 가지고 있었던 지리적 요인 때문이기도 하다. 합포는 남해에서 내륙인 북쪽으로 깊게 들어간 합포만 안에 위치하고 있다. 만의 입구는 다수의 섬과 반도로 둘러싸여 있어 대양의 파도와 바람의 영향을 덜 받는 형태였다. 그래서 합포 해안에 안전하게 선박을 정박시킬 수 있는 천혜의 요건을 갖췄다. 또 합포만의 남쪽에는 대마도와 가까운 거제도가 있어 일본으로 가는 선박이 출발할 수 있는 곳으로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때문에 일찍이 일본 원정의 전초기지로 선정되어 군사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림 3> 참고)
왜구들의 눈에 합포는 그들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대마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고려 최대의 수군 기지였다. 만일 대마도를 비우고 규슈로 가거나 고려 내지 중국으로 원정을 갔을 경우 합포에서 침공이 올 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사료 ⑥에 등장하는 ‘구산현’은 마산이 군사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구산현은 현재의 마산시 구산면이다. 합포만의 입구에 위치하여 외양에 바로 접하고 있으며 ‘진해현’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길목이 되는 지역이다. 또한 복잡한 해안선과 많은 섬들로 이루어져 큰 규모의 선단도 은밀히 정박시키기 좋은 요건도 갖추고 있었다. 이렇듯 전략적 의미가 큰 곳이었기 때문에 고려로서도 신경을 써서 병력을 배치해 두었을 테고 그 결과 수백의 왜구를 베는 성과가 나온 것이 아닐까?(<그림 3> 참고)
그런데 왜구가 마산을 침공하게 된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고려시대 13개 조창 가운데 하나인 ‘석두창’이 마산에 있었다는 점이다. 『고려사』제79권-지 제33 식화2 조운, ‘이전에는 골포(骨浦)라고 하였는데 합포현(合浦縣) 석두창이 여기에 있다.’
마산 근처의 바다에는 일대의 세곡선이 모여들었을 것이고 석두창에서 개경으로 향하는 조운선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왜구의 탐스러운 먹잇감이 됐을 것이다. 사료 ⑩을 보자. ‘회원창’은 석두창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 가능성도 있고 사료상의 ‘품미’를 저장하는 별개의 창고였을지도 모른다. ‘회원’이라는 지명은 현재의 마산ㆍ창원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32권 경상도 창원도호부
결국 회원창이 석두창과는 다른 것으로 품미를 저장하는 또 하나의 창고였다 하더라도 마산 지역에서 왜구의 관심을 끄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때 지리적 요인 때문에 합포가 군사기지로서 성장하게 된다. 왜구의 입장에서는 첫째, 가까운 거리의 강력한 군사기지라는 점과 둘째, 병량미 약탈의 관점으로 봤을 때 석두창의 매력이 크다는 점의 두 가지 이유가 합포를 대규모로 공격하는 요인이 됐다. 대규모의 침략에 따라 고려로서도 합포의 군비를 더욱 강화하게 됐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과 비교해 매우 커다란 대군끼리의 싸움이 일어났고 왜구와 고려군의 전투는 양쪽 중 어느 한쪽이 크게 피해를 보는(사료 ⑤의 왜적 3천명, 사료 ⑦의 고려군 5천여명) 결과를 나타냈던 것이다.
Ⅴ. 맺음말
고려 말 경인년부터 왜구의 침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이후 50여 년 동안 고려의 커다란 문젯거리가 되었다. 왜구는 고려 관군도 위협할 정도로 상당한 규모였으며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지역에까지 침범하였다. 왜구는 다양한 전략전술을 활용하여 고려를 괴롭혔으며 그 폐해가 커져 고려의 존립까지 위태롭게 만들 정도였다.
왜구가 발생한 것은 1차적으로 일본의 내부 사정 때문이었다. 내란 속에서 병량미와 피난처를 얻기 위해 고려를 침략한 일본의 군세가 바로 왜구가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국제정세 또한 고려해야만 한다. 14세기 중반 이후 명의 등장과 더불어 몽골제국중심의 국제질서가 혼란해져 균열이 일었고 그 틈새로 왜구가 파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혼란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왜구의 활동은 오히려 혼란을 가속화하는 요인이 됐다.
경인년 이후의 왜구를 말할 때 마산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마산은 지리적인 요건 때문에 일찍부터 몽골의 일본원정 전초기지로 선정되어 군사기지로 발전했다. 그 때문에 왜구의 견제를 받아 수많은 침입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마산에는 또 석두창, 회원창 등이 있어 왜구의 침입에 좋은 구실이 됐다. 이 때문에 마산과 관련한 사료에 대규모의 왜구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영의 연구를 바탕으로 고려 말 경인년 이후의 왜구의 모습, 그리고 왜구와 마산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글의 머리말에서 밝힌 대로 시각적 자료를 활용했으며 비교적 가벼운 문체로 글을 쓰려고 노력하였다. 글로만 써 놓은 것보다는 훨씬 현장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물론 배경지식에 따라 개인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중고등학생들이 읽는 데도 크게 어렵지 않은 글이라 생각한다.
글이라는 것은 결국 읽어줄 독자를 위해 쓰는 것이다. 글이 아무리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이 소수로 한정되어 있다면 그 훌륭함이 퇴색되는 일일 것이다. 물론 이영의 글이 매우 어려워 이해하기 힘들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학술논문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글이었다. 나의 의도는 조금 더 쉬운 글을 통해 더 많은 독자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자료를 첨부함으로써 글로만 설명하는 한계를 극복해 보려고 했다. 나의 시도가 얼마만큼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기존의 논문보다는 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독자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단 한명이라도 그렇게 느낀다면 나의 시도는 의미있다고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정인지 외,『고려사』국역본, 북한사회과학원 고전연구소 역주, 1998
한국고전번역원, 『고려사절요』국역본
한국고전번역원, 『신증동국여지승람』국역본
이영, 「고려 말의 왜구와 마산」, 한국중세사학회, 『한국중세사연구』제17권, 2004
이익주, 「14세기 후반 원ㆍ명 교체와 한반도」, 역사학회, 『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 일조각 , 2006
이처럼 마산지역이 왜구문제와 더불어 군사적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은 이 지역이 가지고 있었던 지리적 요인 때문이기도 하다. 합포는 남해에서 내륙인 북쪽으로 깊게 들어간 합포만 안에 위치하고 있다. 만의 입구는 다수의 섬과 반도로 둘러싸여 있어 대양의 파도와 바람의 영향을 덜 받는 형태였다. 그래서 합포 해안에 안전하게 선박을 정박시킬 수 있는 천혜의 요건을 갖췄다. 또 합포만의 남쪽에는 대마도와 가까운 거제도가 있어 일본으로 가는 선박이 출발할 수 있는 곳으로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때문에 일찍이 일본 원정의 전초기지로 선정되어 군사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림 3> 참고)
왜구들의 눈에 합포는 그들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대마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고려 최대의 수군 기지였다. 만일 대마도를 비우고 규슈로 가거나 고려 내지 중국으로 원정을 갔을 경우 합포에서 침공이 올 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사료 ⑥에 등장하는 ‘구산현’은 마산이 군사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구산현은 현재의 마산시 구산면이다. 합포만의 입구에 위치하여 외양에 바로 접하고 있으며 ‘진해현’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길목이 되는 지역이다. 또한 복잡한 해안선과 많은 섬들로 이루어져 큰 규모의 선단도 은밀히 정박시키기 좋은 요건도 갖추고 있었다. 이렇듯 전략적 의미가 큰 곳이었기 때문에 고려로서도 신경을 써서 병력을 배치해 두었을 테고 그 결과 수백의 왜구를 베는 성과가 나온 것이 아닐까?(<그림 3> 참고)
그런데 왜구가 마산을 침공하게 된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고려시대 13개 조창 가운데 하나인 ‘석두창’이 마산에 있었다는 점이다. 『고려사』제79권-지 제33 식화2 조운, ‘이전에는 골포(骨浦)라고 하였는데 합포현(合浦縣) 석두창이 여기에 있다.’
마산 근처의 바다에는 일대의 세곡선이 모여들었을 것이고 석두창에서 개경으로 향하는 조운선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왜구의 탐스러운 먹잇감이 됐을 것이다. 사료 ⑩을 보자. ‘회원창’은 석두창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 가능성도 있고 사료상의 ‘품미’를 저장하는 별개의 창고였을지도 모른다. ‘회원’이라는 지명은 현재의 마산ㆍ창원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32권 경상도 창원도호부
결국 회원창이 석두창과는 다른 것으로 품미를 저장하는 또 하나의 창고였다 하더라도 마산 지역에서 왜구의 관심을 끄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때 지리적 요인 때문에 합포가 군사기지로서 성장하게 된다. 왜구의 입장에서는 첫째, 가까운 거리의 강력한 군사기지라는 점과 둘째, 병량미 약탈의 관점으로 봤을 때 석두창의 매력이 크다는 점의 두 가지 이유가 합포를 대규모로 공격하는 요인이 됐다. 대규모의 침략에 따라 고려로서도 합포의 군비를 더욱 강화하게 됐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과 비교해 매우 커다란 대군끼리의 싸움이 일어났고 왜구와 고려군의 전투는 양쪽 중 어느 한쪽이 크게 피해를 보는(사료 ⑤의 왜적 3천명, 사료 ⑦의 고려군 5천여명) 결과를 나타냈던 것이다.
Ⅴ. 맺음말
고려 말 경인년부터 왜구의 침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이후 50여 년 동안 고려의 커다란 문젯거리가 되었다. 왜구는 고려 관군도 위협할 정도로 상당한 규모였으며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지역에까지 침범하였다. 왜구는 다양한 전략전술을 활용하여 고려를 괴롭혔으며 그 폐해가 커져 고려의 존립까지 위태롭게 만들 정도였다.
왜구가 발생한 것은 1차적으로 일본의 내부 사정 때문이었다. 내란 속에서 병량미와 피난처를 얻기 위해 고려를 침략한 일본의 군세가 바로 왜구가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국제정세 또한 고려해야만 한다. 14세기 중반 이후 명의 등장과 더불어 몽골제국중심의 국제질서가 혼란해져 균열이 일었고 그 틈새로 왜구가 파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혼란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왜구의 활동은 오히려 혼란을 가속화하는 요인이 됐다.
경인년 이후의 왜구를 말할 때 마산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마산은 지리적인 요건 때문에 일찍부터 몽골의 일본원정 전초기지로 선정되어 군사기지로 발전했다. 그 때문에 왜구의 견제를 받아 수많은 침입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마산에는 또 석두창, 회원창 등이 있어 왜구의 침입에 좋은 구실이 됐다. 이 때문에 마산과 관련한 사료에 대규모의 왜구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영의 연구를 바탕으로 고려 말 경인년 이후의 왜구의 모습, 그리고 왜구와 마산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글의 머리말에서 밝힌 대로 시각적 자료를 활용했으며 비교적 가벼운 문체로 글을 쓰려고 노력하였다. 글로만 써 놓은 것보다는 훨씬 현장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물론 배경지식에 따라 개인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중고등학생들이 읽는 데도 크게 어렵지 않은 글이라 생각한다.
글이라는 것은 결국 읽어줄 독자를 위해 쓰는 것이다. 글이 아무리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이 소수로 한정되어 있다면 그 훌륭함이 퇴색되는 일일 것이다. 물론 이영의 글이 매우 어려워 이해하기 힘들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학술논문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글이었다. 나의 의도는 조금 더 쉬운 글을 통해 더 많은 독자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자료를 첨부함으로써 글로만 설명하는 한계를 극복해 보려고 했다. 나의 시도가 얼마만큼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기존의 논문보다는 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독자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단 한명이라도 그렇게 느낀다면 나의 시도는 의미있다고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정인지 외,『고려사』국역본, 북한사회과학원 고전연구소 역주, 1998
한국고전번역원, 『고려사절요』국역본
한국고전번역원, 『신증동국여지승람』국역본
이영, 「고려 말의 왜구와 마산」, 한국중세사학회, 『한국중세사연구』제17권, 2004
이익주, 「14세기 후반 원ㆍ명 교체와 한반도」, 역사학회, 『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 일조각 ,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