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지리학 발달과 시대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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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지리학 발달과 시대적 배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차>
Ⅰ서론

Ⅱ본론

1. 발달 배경

2. 지리학의 시대별 발전과정
1.고려시대 그 이전
2.고려시대
3.조선시대
4.개화기
5.해방이후

3.한국지리학의 연구 전통

Ⅲ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그 절정에 달하였다. 지리학의 경우를 볼 때 19세기 중엽은 최한기, 김정호 등 대가들이 배출된 황금기였다고 할 수 있다.
2. 지리학의 시대별 발달과정
1. 고려시대 그 이전 시기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지리적인 지식과 사고방법이 싹트기 시작하였다고 하지만, 삼국시대 이전의 우리나라의 지리학에 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단지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해서나 중국의 기록물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단나라와 교류가 빈번히 이루어졌기때문에 삼국시대의 지리적 사고는 중국의 영향력을 지대하게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따라 통일 신라시대에는 풍수지리설이 도입되어 도시- 촌락의 택지, 묘지의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통일신라의 고승이었던 혜초는 6년동안의 긴 여행을 통해 해로로 인도까지 숭례한 후 그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하였다. 혜초는 신라로 돌아오지 않고 당나라에 입적한 관계로 이 책이 우리나라 지리학에 미친 여향은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 사람이 쓴 현존하는 최고의 여행기로서 그 가치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 혜 초(704-787)
신라 경덕왕 때의 고승으로 723년 당나라 광주에 가서 남인도의 밀교승 금강지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권유로 나신국을 경유하여 바닷길로 인도에 도착해서 대 사령탑 등의 모든 불교성지를 순례했다. 그 후 오천축국의 각지를 두루 돌아다녔으며 다시 가섭미대, 소발률, 건태라, 오장, 구위, 남파, 범인, 토화라 등지와 페르시아의 대식, 불림 등의 지방을 돌아다녔다. 다시 동쪽으로 안국, 조국, 사국, 석라국, 미국, 당국, 발하나국, 골돌국, 호밀국, 소륵국 등을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어 727년 당나라 안서도호부가 있는 Kucha로 돌라왔다. 여기서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을 지었으나 전하지 않고 있다가, 1906-1909년 사이에 프랑스의 동양학자 Pellot가 중국의 감숙성 지방을 탐사하다가 온황 명사산 천불동의 석실에서 앞뒤가 떨어진 책 2권을 발견함으로써 세계적으로 고대의 동서교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또한 8세기 무렵의 인도와 중앙 아시아에 관해거 이 책만큼 자세한 기록이 없고, 당시의 역사나 풍속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혜초의 이 ‘왕오천축국전’은 우리나라 사람이 쓴 현존하는 최고의 여행기로서 그 가치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733년 당나라 장안의 천복사 도량에서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금강성해만주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이라는 밀교경전을 연구하였다. 740년부터 이 경전의 한역에 착수하였으나, 이듬해 금강지가 죽음으로써 중단되었다. 금강지의 법통을 이은 불공삼장의 6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당나라에서도 이름을 떨쳤으며, 오대산 건보리사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 도 선(827 - 898)
신라말의 중으로 영암출신이다. 15세에 중이 되어 화엄사에서 대경을 공부하여 바로 대의에 통하니 수많은 불학도들이 신으로 추앙하였다. 그 후 수도행각에 나서서 동리산의 혜철대사를 찾아 소위 <무설설>, <무법법>을 배워 크게 깨닫고, 23세에 구계를 얻었다.도선은 운봉산에다 굴을 파서 불도를 닦고, 태백산 앞에 움막을 치며 수도생활을 하였다. 헌강왕이 그의 명성을 듣고 궁중으로 모셔가니 도선은 여러가지 정신적 영향을 주었으나 얼마후 다시 산으로 돌아 왔다. 그의 음양지리설과 풍수상지법은 고려, 조선 왕조를 통하여 크게 영향을 주었다. 풍수지리설은 산천, 수류의 모양을 인간의 길흉화복에 연결시켜 설명하는 설이다. 이 설은 중국의 전국시대말에 시작하여 이 후 도교의 성립에 의해 체계화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를 크게 선양한 것은 도선이었다. 그는 불교의 선근공덕사상이나 도교의 음양오행설 등을 결합해서 이를 폈다. 그에 의하면 지형이나 지세는 국가나 개인의 길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지리에는 솨왕이 있고 순역이 있는데, 왕처 순처 즉 명당을 택하여 주택이나 분묘를 지으면 국가나 개인이 행을 누릴 수 있다. 그 반면에 쇠처 역처는 인체에 쑥을 놓아 뜸을 뜨듯이 불사를 세워 재액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반도를 백두산을 뿌리로 하고 가지가 뻗어 나간 나무로 비기기도 하고 혹은 배모양에 견주기도 하였다. 각지의 호족들은 이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자기들의 근거지를 명다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존재를 정당화하려고 하였던것 같다. 특히 왕건은 후삼국통일이 마치 송학의 지덕 탓인것으로 믿었다. 끝까지 반항하더 후백제의 옛 땅을 배역처라고 말한것도 당시의 호족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신라 말에는 또한 호족의 대두와 함께 풍수지리설이 널리 유포되었다. 중 도선에 의해 선양된 풍수지리설은 호족 세력에게 수용되었는 바 이에 각지의 호족들은 풍수지리설에 입각해서 그들의 존재를 정당화하였다. 고려의 통일 후 풍수지리설은 크게 발전하여 지배자나 지방호족들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2.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들어와 풍수지리사상은 더욱 유행하게 되었으며, 궁궐입지 및 남경 설치 문제 및 한양 천도 문제까지 이 사상이 지배하게 되었다. 당시 풍수 지리의 대가로는 도선과 무학대사를 손 꼽을 수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고려시대의 지리학과 관련된 사람들에 대해 알아보자.
-이 첨
고려말 문장가로서 자는 중숙이고 호는 쌍매당이며 시호는 문안이다. 본관은 충주이며 65년 진시에 합격, 68년 친시에 급제,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우정언에 뽑힌후 여러벼슬을 거쳐 92년 지신사에 이르러 사건으로 결성 홍성에 귀양갔다. 조선에 들어와 사조전서를 거쳐 지호정부사로 하윤을 따라 명나라 성조의 등극에 진화부사로 다녀와서 정헌대부가 됐다.
문장에도 능하여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고 글씨도 잘써서 필적으로 모간한 것이다. 지리학적으로는 삼국지도를 편찬하는데 공헌했다.
3. 조선 시대
지리학은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에 들어 와서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 초기의 지리자 편찬과 지도 작성사업을 지리학과 지도 발달의 견인차의 역할을 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 정상기의 [동국지도], 김정호의 [청구도]와 [대동여지도]는 조선시대지리학의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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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2.19
  • 저작시기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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