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북한의 수령우상화 작업
1. 수령우상화의 사상적 기반
1) 수령절대주의
2) 봉건적 충효사상
3) 수령의 선출
2.〈혁명역사〉의 과장과 위조
1) 김일성의 진실과 거짓
2) 김정일의 비밀스런 탄생과 영웅 만들기
3) 우상화작업과 역사위조
Ⅱ. 수령우상화와 북한의 문화
1. 교 육
2. 문학예술 단체
3. 미술
4. 음악
5. 영화
6. 연극
7. 종교
1. 수령우상화의 사상적 기반
1) 수령절대주의
2) 봉건적 충효사상
3) 수령의 선출
2.〈혁명역사〉의 과장과 위조
1) 김일성의 진실과 거짓
2) 김정일의 비밀스런 탄생과 영웅 만들기
3) 우상화작업과 역사위조
Ⅱ. 수령우상화와 북한의 문화
1. 교 육
2. 문학예술 단체
3. 미술
4. 음악
5. 영화
6. 연극
7. 종교
본문내용
주의와 당의 지도에 충실한 미술을 요구하고 있다.
즉 미술을 "조형적 언어를 가지고 현실을 사상미학적으로 파악하며 시각적 구체성, 직관적 명료성을 특징으로 하는 조형적 형상을 통하여 인민들의 사상정서 교양에 이바지"하는 예술로 보고 있는 것이다.
4. 음악
노래의 가사는 당과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 혁명성, 노동의욕 등의 고취를 추구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순수 서정적인 가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조선음악 600곡집'에는 가극아리아 190곡, 가곡 302곡, 영화주제가 108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가곡 중 80%에 가까운 232편이 직접 김일성을 찬양하는 가사로 되어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 찬양가요까지 제작되었는데, '김정일화', '영원히 한길을 가리라',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노래', '빛나라 정일봉' 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이들 노래는 주제가 선명한 가사와 따라 부르기 쉬운 평이한 멜로디, 44조 혹은 43조의 전형적 박자를 사용하여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5. 영 화
예술을 순수예술로서가 아니라 목적예술로 파악하는 북한에서는 영화를 '직관예술'이라 하여 선전선동효과를 증진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보고 어떤 예술장르보다 중요시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의 영화는 북한당국의 정책적인 배려에 의해 노동당의 노선 및 정책을 그대로 반영할 수 있는 사상적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김정일의 개인적인 영화에 대한 관심은 지대한 것도 영화발달에 기여를 하고 있다.
1973년 4월 발표된 '영화예술론'은 김정일의 저술로서 주체사상과 주체적 문예이론을 영화분야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킨 문헌이라고 북한은 선전하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예술론'은 북한의 영화정책과 영화제작에 관한 구체적인 이론서이자 실무지침서로서 1970년대 중반 이후 제작된 모든 영화는 여기에 의지하고 있으며 김정일 체제에서의 영화제작의 지침이 되고 있다.
원래 북한 영화는 긍정 전형과 부정 전형의 대립에서 긍정 전형이 승리하는 구도로서, 악역은 미군일제반당분자지주자본가 등으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 전형인 악역이 시대적 공감을 상실하게 됨에 따라 김정일의 지시 아래 상대적으로 부정 전형이 없는 상태에서 '긍정 전형을 통한 감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그 이후 절대적 악역은 없어지고 오직 긍정적 주인공의 감동적인 태도로 모든 오류가 시정되는 구도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전제하에서 북한영화는 1950년대 천리마운동 이후 대형화되어 20편까지 이어지는 대작시리즈 등 방대한 작품제작에 치우쳤으나, 대작의 효용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해외영화제에서 외면받자 1984년 이후 스케일은 다소 줄이는 대신 서정성사실성을 강화하는 변화를 보였다. 그러나 1991년부터 김정일 지시에 의해 북한식 사회주의체제 선전을 위한 다부작 극영화 '민족과 운명'은 총 50부작을 목표로 제작중인데 1999년 5월 현재 47부(최현편 제3부)까지 제작되었다.
6. 연 극
북한의 연극은 영화의 등장으로 한때 쇠퇴하였지만 여전히 혁명 교양의 강력한 도구이다.
북한 연극은 항일혁명시기에 김일성이 오가자무송 등지에서 공연했다는 '피바다'(혈해), '꽃파는 처녀', '한 자위단원의 운명' 등 3대 불후의 고전적 명작을 중심으로 이를 1969~74년 사이에 대규모 혁명가극으로 각색 공연되어 그들의 당의 사상 선전적 역할을 한 바 있다. 그리고 김정일이 1978년 6월 14일 연극 '성황당을 대규모 무대에다 음악무용 등을 가미 새롭게 창작하도록 지시한 이후 새로운 형태인 '성황당식 혁명연극' 방식이 발전을 보게 된다.
"김정일의 지도 아래 찬란히 개화발전하여 주체예술의 새 전성기"를 열게 하였다고 주장한 '성황당식 혁명연극'은 '5대혁명연극'으로 '성황당', '3인1당', '경축대회', '혈분만국회', '딸에게서 온 편지'를 꼽고 있다.
이와 같이 성황당식 혁명연극으로 꾸며진 연극들은 기존의 연극내용에 보다 웅장하고 화려한 무대와 음악무용을 가미함과 동시에 "원작에 밝혀진 주제와 사상을 철저히 살리고 그것을 주체사상의 근본원리에 기초하여 폭넓게 심화시켰다"고 선전된다.
이러한 5대혁명연극 외에 1980년대에 성황당식 혁명연극으로 새롭게 창조된 현대극으로는 '초석', '조국의 품을 찾아서', '이 길을 간다', '어머니와 아들' 등을 들 수 있다.
7. 종 교
북한에서는 이미 해방 전에 기독교, 천주교 등이 남한보다 먼저 전파되어 전통 종교인 불교, 천도교 등과 함께 주민들의 의식과 생활 속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이후부터 김일성 유일사상체계를 유지하는데 종교가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 내면적으로는 반종교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즉 북한에서의 종교는 종교 본연의 의미를 갖지 못한 채 유일사상 체계라는 테두리 속에서 한정적상대적 가치만 인정되었다. 이에 따라 종교가 아편, 미신으로 간주되어 투쟁과 척결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북한의 종교관은 김일성이 "종교는 일종의 미신입니다. 예수를 믿든지 불교를 믿든지 그것은 본질상 다 미신을 믿는 것입니다", "종교는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입니다. 종교는 아편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발언한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 결과 1955년경에는 북한에서 모든 종교단체와 종교의식이 사라졌거나 지하화 되었으며 1960년대에 이르러 종교 자체가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1972년에 남북대화가 시작되면서부터 북한 내에도 종교 활동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그간 유명무실한 단체에 불과하던 이른바 '조선기독교도연맹', '조선불교도연맹',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등의 활동을 재개시키면서 종교정책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정책의 변화는 남한 종교인과의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의 종교단체의 결성 및 활동에 관한 것이었지 순수한 종교 활동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에서 종교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로서 그 계기는 해외교포 종교인들의 빈번한 방북의 영향이었다.
즉 미술을 "조형적 언어를 가지고 현실을 사상미학적으로 파악하며 시각적 구체성, 직관적 명료성을 특징으로 하는 조형적 형상을 통하여 인민들의 사상정서 교양에 이바지"하는 예술로 보고 있는 것이다.
4. 음악
노래의 가사는 당과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 혁명성, 노동의욕 등의 고취를 추구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순수 서정적인 가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조선음악 600곡집'에는 가극아리아 190곡, 가곡 302곡, 영화주제가 108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가곡 중 80%에 가까운 232편이 직접 김일성을 찬양하는 가사로 되어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 찬양가요까지 제작되었는데, '김정일화', '영원히 한길을 가리라',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노래', '빛나라 정일봉' 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이들 노래는 주제가 선명한 가사와 따라 부르기 쉬운 평이한 멜로디, 44조 혹은 43조의 전형적 박자를 사용하여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5. 영 화
예술을 순수예술로서가 아니라 목적예술로 파악하는 북한에서는 영화를 '직관예술'이라 하여 선전선동효과를 증진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보고 어떤 예술장르보다 중요시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의 영화는 북한당국의 정책적인 배려에 의해 노동당의 노선 및 정책을 그대로 반영할 수 있는 사상적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김정일의 개인적인 영화에 대한 관심은 지대한 것도 영화발달에 기여를 하고 있다.
1973년 4월 발표된 '영화예술론'은 김정일의 저술로서 주체사상과 주체적 문예이론을 영화분야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킨 문헌이라고 북한은 선전하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예술론'은 북한의 영화정책과 영화제작에 관한 구체적인 이론서이자 실무지침서로서 1970년대 중반 이후 제작된 모든 영화는 여기에 의지하고 있으며 김정일 체제에서의 영화제작의 지침이 되고 있다.
원래 북한 영화는 긍정 전형과 부정 전형의 대립에서 긍정 전형이 승리하는 구도로서, 악역은 미군일제반당분자지주자본가 등으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 전형인 악역이 시대적 공감을 상실하게 됨에 따라 김정일의 지시 아래 상대적으로 부정 전형이 없는 상태에서 '긍정 전형을 통한 감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그 이후 절대적 악역은 없어지고 오직 긍정적 주인공의 감동적인 태도로 모든 오류가 시정되는 구도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전제하에서 북한영화는 1950년대 천리마운동 이후 대형화되어 20편까지 이어지는 대작시리즈 등 방대한 작품제작에 치우쳤으나, 대작의 효용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해외영화제에서 외면받자 1984년 이후 스케일은 다소 줄이는 대신 서정성사실성을 강화하는 변화를 보였다. 그러나 1991년부터 김정일 지시에 의해 북한식 사회주의체제 선전을 위한 다부작 극영화 '민족과 운명'은 총 50부작을 목표로 제작중인데 1999년 5월 현재 47부(최현편 제3부)까지 제작되었다.
6. 연 극
북한의 연극은 영화의 등장으로 한때 쇠퇴하였지만 여전히 혁명 교양의 강력한 도구이다.
북한 연극은 항일혁명시기에 김일성이 오가자무송 등지에서 공연했다는 '피바다'(혈해), '꽃파는 처녀', '한 자위단원의 운명' 등 3대 불후의 고전적 명작을 중심으로 이를 1969~74년 사이에 대규모 혁명가극으로 각색 공연되어 그들의 당의 사상 선전적 역할을 한 바 있다. 그리고 김정일이 1978년 6월 14일 연극 '성황당을 대규모 무대에다 음악무용 등을 가미 새롭게 창작하도록 지시한 이후 새로운 형태인 '성황당식 혁명연극' 방식이 발전을 보게 된다.
"김정일의 지도 아래 찬란히 개화발전하여 주체예술의 새 전성기"를 열게 하였다고 주장한 '성황당식 혁명연극'은 '5대혁명연극'으로 '성황당', '3인1당', '경축대회', '혈분만국회', '딸에게서 온 편지'를 꼽고 있다.
이와 같이 성황당식 혁명연극으로 꾸며진 연극들은 기존의 연극내용에 보다 웅장하고 화려한 무대와 음악무용을 가미함과 동시에 "원작에 밝혀진 주제와 사상을 철저히 살리고 그것을 주체사상의 근본원리에 기초하여 폭넓게 심화시켰다"고 선전된다.
이러한 5대혁명연극 외에 1980년대에 성황당식 혁명연극으로 새롭게 창조된 현대극으로는 '초석', '조국의 품을 찾아서', '이 길을 간다', '어머니와 아들' 등을 들 수 있다.
7. 종 교
북한에서는 이미 해방 전에 기독교, 천주교 등이 남한보다 먼저 전파되어 전통 종교인 불교, 천도교 등과 함께 주민들의 의식과 생활 속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이후부터 김일성 유일사상체계를 유지하는데 종교가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 내면적으로는 반종교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즉 북한에서의 종교는 종교 본연의 의미를 갖지 못한 채 유일사상 체계라는 테두리 속에서 한정적상대적 가치만 인정되었다. 이에 따라 종교가 아편, 미신으로 간주되어 투쟁과 척결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북한의 종교관은 김일성이 "종교는 일종의 미신입니다. 예수를 믿든지 불교를 믿든지 그것은 본질상 다 미신을 믿는 것입니다", "종교는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입니다. 종교는 아편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발언한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 결과 1955년경에는 북한에서 모든 종교단체와 종교의식이 사라졌거나 지하화 되었으며 1960년대에 이르러 종교 자체가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1972년에 남북대화가 시작되면서부터 북한 내에도 종교 활동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그간 유명무실한 단체에 불과하던 이른바 '조선기독교도연맹', '조선불교도연맹',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등의 활동을 재개시키면서 종교정책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정책의 변화는 남한 종교인과의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의 종교단체의 결성 및 활동에 관한 것이었지 순수한 종교 활동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에서 종교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로서 그 계기는 해외교포 종교인들의 빈번한 방북의 영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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