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 芥川龍之介의 어두운 삶
· 생모의 광기와 죽음
· 양가사람들의 에고이즘
- 芥川龍之介의 삶이 문학에 미친 영향
· 대학시절
· 해군기관학교 교관시절
· 芥川龍之介의 말기작품
· 芥川龍之介의 자살
· 결론
2. 본론
- 羅生門
· 작품소개
· 작품의 줄거리
· 羅生門에 나타난 芥川龍之介의 인간관
· 소설 羅生門과 영화 羅生門
- 歯車
· 작품소개
· 작품의 줄거리
· 歯車에 나타난 芥川龍之介의 어두운 삶
3. 결론
- 芥川龍之介의 어두운 삶
· 생모의 광기와 죽음
· 양가사람들의 에고이즘
- 芥川龍之介의 삶이 문학에 미친 영향
· 대학시절
· 해군기관학교 교관시절
· 芥川龍之介의 말기작품
· 芥川龍之介의 자살
· 결론
2. 본론
- 羅生門
· 작품소개
· 작품의 줄거리
· 羅生門에 나타난 芥川龍之介의 인간관
· 소설 羅生門과 영화 羅生門
- 歯車
· 작품소개
· 작품의 줄거리
· 歯車에 나타난 芥川龍之介의 어두운 삶
3. 결론
본문내용
있는 것이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양가사람들 중에서 특히 주목하여야 할 사람은 바로 ふく의 언니인 이모 ふき이다. 井川 恭은 ふき가「이마가 넓고, 눈이 약간 패인 얼굴로, 조금은 사팔뜨기이고 좀처럼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말투가 연극에 나오는 궁중에서 일하는 여자를 연상시키고 있으며 예술적으로도 소질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ふき야말로 일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芥川을 친어머니처럼 돌보아준 사람이었다. 토고(東鄕克美)는「龍之介가 10살 때,芥川 가의 양부인 도쇼는 53세, 양모인 토모는 45세, 이모인 ふき는 46세였으며, 이미 노인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어린 芥川에게는 어머니가 3명(생모 ふく, 양모 토모, 그리고의모 후유(ふゆ))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芥川에게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이모 ふき가 어머니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아쿠타가와 또한 이런 ふき를 잘 따랐다고 한다. 그 예로 芥川는 ふき를「누구보다도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듯이, 어느 날 실부 토시죠가 어린 芥川을 자기 집으로 데려 오려고 과자나 과일, 음료수를 권하며 집에서 도망쳐 오라고 설득하였으나, 그는
「그 권유는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양가 부모님을 특히 이모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점귀부(点鬼簿)」
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처럼 ふき는 평생 동안 芥川을 위해 헌신을 하였고, 芥川 또한 이러한 그녀를 친어머니 이상으로 사랑해 왔다. 그러므로 ふき는 芥川의 성장 배경에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芥川가 작가로서의 꿈 또한 ふき를 포함해 양가 사람들 -「문학을 하는 것은 누구도 전혀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이모도 상당히 문학을 좋아하였기 때문입니다」(「문학을 좋아하는 가정에서」) -영향을 입은 바가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1927년 초 芥川가 사토(佐藤春夫)와 대화하면서「내 생애를 불행하게 한 자는 ××인 자야. 원래 이 사람은 나의 둘도 없는 은인이지만 말이야」라고 말하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 하면 여기에서 말한 ‘나의둘도 없는 은인’이란 다름 아닌 자신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ふき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芥川는「어느 바보의 일생」에서 ふき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언급 하고 있다.
그의 이모는 이따금 2층에서 그와 싸움을 하였다. 그리고 양부모에게 중재를 받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모를 누구보다도 사랑하였다. 일생 동안 독신이었던 이모는 이미 그가 20살 때에 60살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그는 어느 교외의 2층에서 몇 번이나 서로 사랑하는 것이 서로 괴롭히는 것인가를 생각하기도 하였다.
(彼の伯母はこの二階に度たび彼と喧をした。それは彼の養父母の仲裁を受けることもないことはなかつた。しかし彼は彼の伯母に誰よりも愛を感じてゐた。一生身だつた彼の伯母はもう彼の二十の時にも六十に近い年よりだつた。彼は或郊外の二階に何度も互に愛し合ふものは苦しめ合ふのかを考へたりした。)
(「어느 바보의 일생」, <3 집>全集9p.312)
물론 ふき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芥川에게 맹목에 가까운 사랑을 쏟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히려 그에게 불행을 주었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하지만 1914년 여름부터 다음 해에 걸쳐 요시다 야요이(吉田生)와의 첫사랑 파국에서 보인 양가 사람들의 <에고이즘>, 특히 ふき의 에고이즘은 芥川을 둘러싼 현실세계가 자유가 아닌 구속된 세계임을 자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芥川가 井川 恭에게 보낸 편지에서「어떤여자를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그 여자가 어떤 남자와 혼약을 하였다. 나는 그때가 돼서 비로소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중략) 집안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이모는 밤새도록 울었다. 나도 밤새도록 울었다. 다음날 아침에 못마땅한 얼굴로 나는 단념하겠다고 말했다」(1915년 2월 28일)라고 쓴 바와 같이, 이전까지 芥川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직 ふき만은 자신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 전적으로 찬성하고 밀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ふき가 요시다와 결혼을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것을 본 芥川는 이 결정적인 배반으로 인해 지금까지 믿고 있었던 ふき의 사랑이, 단지 노인의 에고이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인식의 전환이 있었던 것이다.
세키구치(口安義)는「양자라고 하는 신분은, 떳떳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유년 시대에는 느끼지 못했던 속박이 성인이 되어보니 너무나도 많은 것에 그는 놀랐다. 아무리 귀하게 키웠어도, 아니, 귀하게 키우면 키울수록, 그에게는 『양부모에게 효도』라고 하는 관례가 높게 솟아 있는 것을 인식되도록 강요되었던 것이다. <집>이 얼마나 자신을 속박하는 것인가를 알았던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듯이, 芥川는 吉田生과의 실연을 통해 단순히 양가 사람들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를 둘러싼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에고이즘의 추악함과 그것을 알면서도 일상생활을 영위하지 않으면 안되는 속박된 현실의 한계상황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곧 그에게 에고이즘 세계에서 벗어난 자유세계를 추구하고자 하는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芥川 龍之介의 삶이 문학에 미친 영향
1.대학시절
1913년 7월, 도쿄 제일 고등학교를 2등으로 졸업한 芥川는 그해 9월에 도쿄 제국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한다. 고교시절 줄곧 함께 했던 쓰네토 교가 교토대학 법학과에 진학했기 때문에 이후는 구메 마사오, 키쿠치 칸, 마쓰오카 유즈루, 후지오카 조로쿠(藤岡六) 등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구메 마사오나 키쿠치 칸은 일고시절부터 호탕하게 연극을 보러 다니거나 신극운동에 열중하여 ‘교우회잡지(校友誌)’에 희곡과 근대극론(近代劇論)을 발표하던 그룹의 학생들로, 芥川과는 그다지 친하게 지내는 학생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芥川는 그들을 질이 좋지 않은 학생으로 은근히 경멸하는 빛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쓰네토와 헤어졌기 때문인지 그들에게 접근한다.
이후는 학과 공부를 소홀히 하며 구메 마사오, 마쓰오카 유즈루, 나루세 세이치 등과 자주 어울리게 된다. 당시
「그 권유는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양가 부모님을 특히 이모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점귀부(点鬼簿)」
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처럼 ふき는 평생 동안 芥川을 위해 헌신을 하였고, 芥川 또한 이러한 그녀를 친어머니 이상으로 사랑해 왔다. 그러므로 ふき는 芥川의 성장 배경에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芥川가 작가로서의 꿈 또한 ふき를 포함해 양가 사람들 -「문학을 하는 것은 누구도 전혀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이모도 상당히 문학을 좋아하였기 때문입니다」(「문학을 좋아하는 가정에서」) -영향을 입은 바가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1927년 초 芥川가 사토(佐藤春夫)와 대화하면서「내 생애를 불행하게 한 자는 ××인 자야. 원래 이 사람은 나의 둘도 없는 은인이지만 말이야」라고 말하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 하면 여기에서 말한 ‘나의둘도 없는 은인’이란 다름 아닌 자신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ふき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芥川는「어느 바보의 일생」에서 ふき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언급 하고 있다.
그의 이모는 이따금 2층에서 그와 싸움을 하였다. 그리고 양부모에게 중재를 받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모를 누구보다도 사랑하였다. 일생 동안 독신이었던 이모는 이미 그가 20살 때에 60살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그는 어느 교외의 2층에서 몇 번이나 서로 사랑하는 것이 서로 괴롭히는 것인가를 생각하기도 하였다.
(彼の伯母はこの二階に度たび彼と喧をした。それは彼の養父母の仲裁を受けることもないことはなかつた。しかし彼は彼の伯母に誰よりも愛を感じてゐた。一生身だつた彼の伯母はもう彼の二十の時にも六十に近い年よりだつた。彼は或郊外の二階に何度も互に愛し合ふものは苦しめ合ふのかを考へたりした。)
(「어느 바보의 일생」, <3 집>全集9p.312)
물론 ふき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芥川에게 맹목에 가까운 사랑을 쏟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히려 그에게 불행을 주었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하지만 1914년 여름부터 다음 해에 걸쳐 요시다 야요이(吉田生)와의 첫사랑 파국에서 보인 양가 사람들의 <에고이즘>, 특히 ふき의 에고이즘은 芥川을 둘러싼 현실세계가 자유가 아닌 구속된 세계임을 자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芥川가 井川 恭에게 보낸 편지에서「어떤여자를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그 여자가 어떤 남자와 혼약을 하였다. 나는 그때가 돼서 비로소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중략) 집안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이모는 밤새도록 울었다. 나도 밤새도록 울었다. 다음날 아침에 못마땅한 얼굴로 나는 단념하겠다고 말했다」(1915년 2월 28일)라고 쓴 바와 같이, 이전까지 芥川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직 ふき만은 자신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 전적으로 찬성하고 밀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ふき가 요시다와 결혼을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것을 본 芥川는 이 결정적인 배반으로 인해 지금까지 믿고 있었던 ふき의 사랑이, 단지 노인의 에고이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인식의 전환이 있었던 것이다.
세키구치(口安義)는「양자라고 하는 신분은, 떳떳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유년 시대에는 느끼지 못했던 속박이 성인이 되어보니 너무나도 많은 것에 그는 놀랐다. 아무리 귀하게 키웠어도, 아니, 귀하게 키우면 키울수록, 그에게는 『양부모에게 효도』라고 하는 관례가 높게 솟아 있는 것을 인식되도록 강요되었던 것이다. <집>이 얼마나 자신을 속박하는 것인가를 알았던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듯이, 芥川는 吉田生과의 실연을 통해 단순히 양가 사람들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를 둘러싼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에고이즘의 추악함과 그것을 알면서도 일상생활을 영위하지 않으면 안되는 속박된 현실의 한계상황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곧 그에게 에고이즘 세계에서 벗어난 자유세계를 추구하고자 하는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芥川 龍之介의 삶이 문학에 미친 영향
1.대학시절
1913년 7월, 도쿄 제일 고등학교를 2등으로 졸업한 芥川는 그해 9월에 도쿄 제국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한다. 고교시절 줄곧 함께 했던 쓰네토 교가 교토대학 법학과에 진학했기 때문에 이후는 구메 마사오, 키쿠치 칸, 마쓰오카 유즈루, 후지오카 조로쿠(藤岡六) 등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구메 마사오나 키쿠치 칸은 일고시절부터 호탕하게 연극을 보러 다니거나 신극운동에 열중하여 ‘교우회잡지(校友誌)’에 희곡과 근대극론(近代劇論)을 발표하던 그룹의 학생들로, 芥川과는 그다지 친하게 지내는 학생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芥川는 그들을 질이 좋지 않은 학생으로 은근히 경멸하는 빛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쓰네토와 헤어졌기 때문인지 그들에게 접근한다.
이후는 학과 공부를 소홀히 하며 구메 마사오, 마쓰오카 유즈루, 나루세 세이치 등과 자주 어울리게 된다.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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