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주제 선정 동기 및 준비 과정
Ⅱ. 조선의 교육기관
Ⅲ. 보존 및 개발 방안에 대한 의견
Ⅳ. 소감
Ⅴ. 참고문헌
Ⅱ. 조선의 교육기관
Ⅲ. 보존 및 개발 방안에 대한 의견
Ⅳ. 소감
Ⅴ. 참고문헌
본문내용
로 이전을 하였다. 홍영식은 3일천하인 갑신정변의 주모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그를 비롯, 그의 일가족이 참형을 당한 후 그의 집이 압수를 당해 빈 집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 때 광혜원도 제중원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헌법재판소 내에는 광혜원터 이외에도 박규수 집터, 홍영식집터, 최린집터, 이상재집터,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장소와 같은 다양한 역사적 현장이 존재하고 있다. 또한 광혜원터는 헌법재판소 초입에 있는 화단에 위치해 있었으나 위치를 바꿔야한다는 주장에 따라서 박규수 집터의 옆인, 백송 북편으로 이동했다.
Ⅲ. 보존 및 개발 방안에 대한 의견
1. 건축 문화재 (성균관과 양천향교)
성균관은 서울 사대문 안에서 가장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곳으로 북악산의 맥이 동쪽으로 휘감아 동대문으로 떨어지는 과정에 위치한 곳이다. 이곳은 산중턱이나 품이 넓고 양명한 기운이 가득찬 공부하기에 좋은 풍수상의 길지로 알려져 있다. 현재 서편에는 성균관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주변은 택지화되어 주택과 빌딩 등으로 둘러 쌓여 있어 원래 성균관의 주변 경관은 찾을 길이 없다. 서울에 인구의 1/4이 집중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여건상 문화재 주변까지도 유적으로 보존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균관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건물은 잘 보존되어 있지만 주변의 여건에 의해 문화재 관리에 많은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우리가 답사를 갔을 당시 성균관 주변에 있는 건물인 유림회관에서 전통혼례가 이루어 졌는데, 이 때문에 성균관 내부가 굉장히 지저분하고 혼란스러웠다. 특히 식에서 사용된 꽃들이 성균관 앞마당에 군데군데 떨어져 있고, 결혼식장에서 나온 쓰레기들이 성균관 내에 굉장히 많아 보였다. 이런 점에 대한 규제는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양천향교의 경우에는 향교 내에 상주하는 분이 계시고, 그 곳에서 직접 교육이 이루어져 향교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으며 관리까지 잘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성균관 또한 상주하는 분이 따로 계셔서 이곳에 관한 설명도 해주시며, 건물의 관리도 함께 담당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실제 성균관의 석전대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만이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주요무형문화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에 걸 맞는 세세한 관리나 체계적인 교육을 이어가는 데에는 무척 허술하다. 따라서 성균관 내에서의 유교경전 강의 등의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구성되어 성균관의 의미를 되돌아보고, 더불어 홍보효과 까지 극대화 시켜 성균관이 과거에 멈춰 있는 공간이 아니라 면면에 사람냄새가 배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2. 표석 유적지 (4부학당 및 사역원터, 광혜원터)
표석으로 지정되어있는 유적지는 우리가 다녀온 역사적 장소 이외에도 굉장히 많이 존재하고 있다. 종각근처나 종로3가 근처만 봐도 5분도 못가서 계속해서 표석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이번 답사를 통해서 둘러본 결과 관리가 잘 이루어져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도 존재하였지만,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방치되어 찾기 어려운 곳도 존재하였다. 이러한 표석들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법적인 제도가 마련되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우리가 생각한 법적인 제도는 ‘표석관리제’로 표석 주변의 건물이나 표석이 소속되어 있는 화단과 위치의 소유주가 표석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표석이 속한 곳이 공공장소일 경우에는 해당 구청이나 지역단체가 관리를 하고, 표석이 속한 곳이 건물의 소유일 경우에는 책임지고 건물주가 그것을 관리하는 제도이다.
표석의 이름을 널리 사용하고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어지기 때문에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 정류장 이름으로 사용하는 방안도 좋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또한 역사적 의미를 되살릴 수 있도록 관련된 표석을 연결하여 투어코스를 마련하는 것도 교육적으로도 긍정적이고, 문화를 활용하는 측면으로도 긍정적일 것으로 예상한다.
Ⅳ. 소감
우리의 답사 과정은 스토리 중심보다는 주제 중심의 성격이기 때문에 답사를 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양천향교부터 시작해서 사역원터, 서학당터, 중학당터, 제중원터, 남학당터, 동학당터 마지막으로 성균관을 끝으로 답사를 마무리 하였다.
양천향교나 성균관은 당시 건물이 남아 있어서 찾기 쉬웠다. 하지만 4부학당터와 사역원터, 광혜원터는 표석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답사를 가기 전에 지도와 사진으로 여러 터들을 보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찾기가 어려웠다. 특히, 4부학당 중에 동학당터는 도로변 풀 속에 숨겨져 있어서 더욱더 찾기 힘들었다. 주변에는 오토바이들이 줄지어 서있었고, 버스나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곳이라서 정신이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성균관 다음으로 중요한 교육기관이었던 곳이 관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방치되어 있는 모습에 너무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렇게 조선의 교육기관을 답사·조사해봄으로써 위의 서론에 밝혔던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수도권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소외되고 방치되어있는 유적지에 대해 보존 및 개발 방안을 고려해볼 수 있는 뜻 깊은 경험이 되었다.
Ⅴ. 참고문헌
1. 단행본
- 송병렬, 이병주, 『한자로 풀어보는 우리 문화유산』, (한문교육, 2007).
- 한국 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15 서울』, (돌베개, 2004).
- 국립문화재연구소,『서울·경기도의 향교건축』, (국립문화재연구소, 2000).
- 서울문화사학회, 『서울문화재 나들이』, (수서원, 2002).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역사 2000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
- 이호진, 『한국 학교건축의 과거와 미래』, (한국교육환경연구원, 2008)
- 서울특별시, 『서울특별시 양천구』, (서울특별시, 1997)
- 정승교, 『중등우리교육(향교와 서원, 그곳에서 생각한 우리의 전통)』, (우리교육, 1998), p.89-95
- 박형우, 『제중원: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 (21세기 북스, 2010)
- 박형우,『제중원』, (몸과 마음, 2002)
2. 온라인 자료
- 성균관 홈페이지 http://www.skkok.com
- 양천향교 홈페이지 http://www.hyanggyo.net
현재 헌법재판소 내에는 광혜원터 이외에도 박규수 집터, 홍영식집터, 최린집터, 이상재집터,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장소와 같은 다양한 역사적 현장이 존재하고 있다. 또한 광혜원터는 헌법재판소 초입에 있는 화단에 위치해 있었으나 위치를 바꿔야한다는 주장에 따라서 박규수 집터의 옆인, 백송 북편으로 이동했다.
Ⅲ. 보존 및 개발 방안에 대한 의견
1. 건축 문화재 (성균관과 양천향교)
성균관은 서울 사대문 안에서 가장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곳으로 북악산의 맥이 동쪽으로 휘감아 동대문으로 떨어지는 과정에 위치한 곳이다. 이곳은 산중턱이나 품이 넓고 양명한 기운이 가득찬 공부하기에 좋은 풍수상의 길지로 알려져 있다. 현재 서편에는 성균관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주변은 택지화되어 주택과 빌딩 등으로 둘러 쌓여 있어 원래 성균관의 주변 경관은 찾을 길이 없다. 서울에 인구의 1/4이 집중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여건상 문화재 주변까지도 유적으로 보존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균관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건물은 잘 보존되어 있지만 주변의 여건에 의해 문화재 관리에 많은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우리가 답사를 갔을 당시 성균관 주변에 있는 건물인 유림회관에서 전통혼례가 이루어 졌는데, 이 때문에 성균관 내부가 굉장히 지저분하고 혼란스러웠다. 특히 식에서 사용된 꽃들이 성균관 앞마당에 군데군데 떨어져 있고, 결혼식장에서 나온 쓰레기들이 성균관 내에 굉장히 많아 보였다. 이런 점에 대한 규제는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양천향교의 경우에는 향교 내에 상주하는 분이 계시고, 그 곳에서 직접 교육이 이루어져 향교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으며 관리까지 잘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성균관 또한 상주하는 분이 따로 계셔서 이곳에 관한 설명도 해주시며, 건물의 관리도 함께 담당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실제 성균관의 석전대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만이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주요무형문화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에 걸 맞는 세세한 관리나 체계적인 교육을 이어가는 데에는 무척 허술하다. 따라서 성균관 내에서의 유교경전 강의 등의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구성되어 성균관의 의미를 되돌아보고, 더불어 홍보효과 까지 극대화 시켜 성균관이 과거에 멈춰 있는 공간이 아니라 면면에 사람냄새가 배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2. 표석 유적지 (4부학당 및 사역원터, 광혜원터)
표석으로 지정되어있는 유적지는 우리가 다녀온 역사적 장소 이외에도 굉장히 많이 존재하고 있다. 종각근처나 종로3가 근처만 봐도 5분도 못가서 계속해서 표석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이번 답사를 통해서 둘러본 결과 관리가 잘 이루어져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도 존재하였지만,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방치되어 찾기 어려운 곳도 존재하였다. 이러한 표석들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법적인 제도가 마련되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우리가 생각한 법적인 제도는 ‘표석관리제’로 표석 주변의 건물이나 표석이 소속되어 있는 화단과 위치의 소유주가 표석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표석이 속한 곳이 공공장소일 경우에는 해당 구청이나 지역단체가 관리를 하고, 표석이 속한 곳이 건물의 소유일 경우에는 책임지고 건물주가 그것을 관리하는 제도이다.
표석의 이름을 널리 사용하고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어지기 때문에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 정류장 이름으로 사용하는 방안도 좋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또한 역사적 의미를 되살릴 수 있도록 관련된 표석을 연결하여 투어코스를 마련하는 것도 교육적으로도 긍정적이고, 문화를 활용하는 측면으로도 긍정적일 것으로 예상한다.
Ⅳ. 소감
우리의 답사 과정은 스토리 중심보다는 주제 중심의 성격이기 때문에 답사를 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양천향교부터 시작해서 사역원터, 서학당터, 중학당터, 제중원터, 남학당터, 동학당터 마지막으로 성균관을 끝으로 답사를 마무리 하였다.
양천향교나 성균관은 당시 건물이 남아 있어서 찾기 쉬웠다. 하지만 4부학당터와 사역원터, 광혜원터는 표석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답사를 가기 전에 지도와 사진으로 여러 터들을 보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찾기가 어려웠다. 특히, 4부학당 중에 동학당터는 도로변 풀 속에 숨겨져 있어서 더욱더 찾기 힘들었다. 주변에는 오토바이들이 줄지어 서있었고, 버스나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곳이라서 정신이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성균관 다음으로 중요한 교육기관이었던 곳이 관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방치되어 있는 모습에 너무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렇게 조선의 교육기관을 답사·조사해봄으로써 위의 서론에 밝혔던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수도권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소외되고 방치되어있는 유적지에 대해 보존 및 개발 방안을 고려해볼 수 있는 뜻 깊은 경험이 되었다.
Ⅴ. 참고문헌
1. 단행본
- 송병렬, 이병주, 『한자로 풀어보는 우리 문화유산』, (한문교육, 2007).
- 한국 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15 서울』, (돌베개, 2004).
- 국립문화재연구소,『서울·경기도의 향교건축』, (국립문화재연구소, 2000).
- 서울문화사학회, 『서울문화재 나들이』, (수서원, 2002).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역사 2000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
- 이호진, 『한국 학교건축의 과거와 미래』, (한국교육환경연구원, 2008)
- 서울특별시, 『서울특별시 양천구』, (서울특별시, 1997)
- 정승교, 『중등우리교육(향교와 서원, 그곳에서 생각한 우리의 전통)』, (우리교육, 1998), p.89-95
- 박형우, 『제중원: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 (21세기 북스, 2010)
- 박형우,『제중원』, (몸과 마음, 2002)
2. 온라인 자료
- 성균관 홈페이지 http://www.skkok.com
- 양천향교 홈페이지 http://www.hyang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