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발레의 역사
2. 초기 러시아 발레의 역사
3. 러시아 발레의 발전과정
4. 러시아 발레
5. 러시아 발레를 이끈 안무가들
1) 미하일 포킨(러시아)-Fokine,Michel(1880-1942)
2) 유리 그리고리비치(러시아)-Grigorivich,Yuri(1927-)
3) 마리우스 프티파(러시아)-Petipa,Marius(1819-1903)
4) 바슬라브 니진스키(러시아)-Nijinsky,Vaslav(1890-1950)
참고문헌
2. 초기 러시아 발레의 역사
3. 러시아 발레의 발전과정
4. 러시아 발레
5. 러시아 발레를 이끈 안무가들
1) 미하일 포킨(러시아)-Fokine,Michel(1880-1942)
2) 유리 그리고리비치(러시아)-Grigorivich,Yuri(1927-)
3) 마리우스 프티파(러시아)-Petipa,Marius(1819-1903)
4) 바슬라브 니진스키(러시아)-Nijinsky,Vaslav(1890-1950)
참고문헌
본문내용
황실 극장의 경영을 위해 그의 개혁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였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포킨의 초기 발레 작품은 《악시스와 갈라테아》(1905년)와 안나 파블로바를 위한 독무가 있는 《빈사의 백조》(1907년)가 있다. 1909년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포킨을 파리의 발레 루스의 안무가로 초청하였다. 그러나 포킨은 디아길레프와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깊은 관계에 질투심을 느끼고, 1912년 발레 루스와의 공동작업을 끝낸다. 포킨은 유럽과 미국에서 70개가 넘는 발레 작품을 공연하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Chopiniana(뒤에 《레 실피드》)로 개정되었다), 《사육제》, 《아르미드의 집》 등이 있다. 발레 루스를 위한 작품 중에는 《불새》와《장미의 정령》이 있다. 포킨은 1942년 8월 22일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작품은 계속해서 세계 유수 발레단에서 상연되고 있다.
황실 발레 학교에서 교육 받은 포킨은 일찍부터 안무에 재능을 보였다. 1909년 디아길레프의 권유로 무용수겸 안무가로서 ‘발레 뤼스\'에서 활동을 하여 <불새>, <페트루슈카> 등 걸작 발레를 안무하고 무용수로도 출연하였다. 그는 체계없고 인공적인 관습적 움직이나 테크직보다는 자연스러운 안무적 표현을 강조했다. 포킨의 이러한 생각은 발란신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발란신은 포킨의 생각과 양식을 발전시킨 신고전주의 발레 시대를 연다.
МИХАИЛ ФОКИН
2) 유리 그리고리비치(러시아)-Grigorivich,Yuri(1927-)
러시아의 안무가. 현재 볼쇼이 발레단 예술 감독
마린스키 극장의 솔리스트로 입단했고, 노보시비리스크에서 그의 첫 안무를 시작한다. 1957년 <돌꽃>을 발표하여 ‘새로운 천재의 등장\'이란 찬사를 받았으며, 그 이후 볼쇼이 발레단의 예술감독으로 활동을 하다가 2000년에는 국립발레단의 다양한 발레 공연의 안무 지도와 레파토리 지도를 하기도 했다.
러시아 레닌그라드 태생의 유리 그리가로비치는 상트 피체르부르크 발레학교를 졸업한 후 상트 피체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의 솔리스트로 입단했고 노보시리스크에서 그의 첫 안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1957년에 첫 작품 돌꽃을 발표하여 ‘새로운 천재의 등장’이란 찬사를 받는다. 1961년 그는 두번째 작품 사랑의 전설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다음해 키로프(현재 키로프-마린스키) 극장의 발레 마스터가 된다. 이후 그리가로비치의 발레는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함께 관객들의 갈채를 받으며 러시아 발레계의 새로운 경향을 주도하게 된다. 1964년 37세에 볼쇼이 발레단의 예술감독이 된 그는 서사적 스펙타클과 사회주의 사상과 사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호화로운 발레들이 일반적인 소련 무용계에서 그는 이 안에 모던 댄스의 조형적인 구도를 효과적으로 이식하는 작업을 볼쇼이에서 시작했다. 그가 키로프에서 안무한 돌꽃과 사랑의 전실, 그리고 스팔타커스는 볼쇼이의 가장 대표적인 현대물 레퍼토리로 그리가로비치의 주도 아래 볼쇼이 발레는 스타일가 방향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가로비치 작품의 공통된 테마는 (이것은 곧 볼쇼이 발레단의 공통적 테마가 된다) 인간이 자신의 이상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비극적인 삶과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적이고 높은 목적을 위해 개인적인 기쁨을 포기하고, 내적인 약함을 극복하고 용기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것은 돌꽃, 사랑의 전설, 스팔타커스에서 구현되고 있다. 이 대표적인 세 작품 이외에도 그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레이몬다, 지젤, 라 바야데어 와 같은 고전들을 재안무 했고 폭군 이반, 앵가라, 황금 시대를 게속 안무해 볼쇼이 발레단의 레퍼토리를 풍부하게 한다. 그는 1995년 정치적인 이유로 퇴임할 때까지 33년간이나 그 발레단의 예술 감독으로 있으면서 볼쇼이 발레단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줬다. 2000년부터 한국의 국립 발레단에서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스팔타커스 세 작품을 공연하면서 직접 한국에 와서 안무와 지도를 맡기도 했다. 최근 그의 뒤를 이은 블라디미르 바실리에프가 퇴진한 다음 볼쇼이의 예술감독으로 복귀해 다시 볼쇼이를 이끌고 있다.
3) 마리우스 프티파(러시아)-Petipa,Marius(1819-1903)
34년간 러시아 상트 페테르스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의 수석감독으로 있으면서 100여편의 발레 명작을 안무한 \"고전발레의 아버지\".
1869년부터 1903년까지 34년간 마린스키 극장의 수석예술감독으로 있으면서 54편의 신작발레, 17편의 개정안무, 35편의 오페라 발레를 제작했다. 마린스키 극장에서 수석예술감독으로 있는 동안 프티파는 차석 발레마스터였던 이바노프와 함께 파드뒤 형식을 최초로 만들었고, 솔리스트에서 군무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수학적 계산에 의해 발레 구도를 완성함으로써 ‘고전발레의 아버지\'로 평가받게 된다.
1898년 2월 14일의 마리우스 프티파
프랑스의 마르세유에서 태어났다. 청년시대는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엘슬러와 공연하는 등 오로지 무용수로서만 활약하였다. 그러한 그가 1847년 25세 때 러시아로 초빙된 것도 제1무용수로서였다. 그 무렵 페테르스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는 쥴 페로가 안무를 담당했으며, 프티파는 그에게서 안무를 배웠다. 그리하여 프티파가 마린스키 극장에서 최초의 안무를 한 것은 1858년에 상연된 《섭정전하(攝政殿下)의 결혼》이라는 2막물(二幕物)의 발레에서였다. 그 후 1900년까지 42년 동안에 약 54종의 신작(新作) 발레를 안무했을 뿐만 아니라 17곡의 옛 작품을 개작하고 또한 35종이나 되는 오페라의 발레를 안무했으니 참으로 놀라운 정력가라고 하겠다. 오늘날 여전히 세계 각국에서 상연되는 걸작인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등은 프티파가 완성한 고전 발레의 형식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작품들이다. 이리하여 프티파의 이름은 고전 발레의 완성자로서 크게 떨쳤다. 프티파는 또한 무용가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20세기에 들어와서 러시아로부터 다수의 명무용수를 배출하는 요인을 만들었다.
4) 바슬라브 니진스키(러시아)-Nijinsky,Vaslav(1890-1950)
1907년 상뜨 뻬쩨르부
황실 발레 학교에서 교육 받은 포킨은 일찍부터 안무에 재능을 보였다. 1909년 디아길레프의 권유로 무용수겸 안무가로서 ‘발레 뤼스\'에서 활동을 하여 <불새>, <페트루슈카> 등 걸작 발레를 안무하고 무용수로도 출연하였다. 그는 체계없고 인공적인 관습적 움직이나 테크직보다는 자연스러운 안무적 표현을 강조했다. 포킨의 이러한 생각은 발란신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발란신은 포킨의 생각과 양식을 발전시킨 신고전주의 발레 시대를 연다.
МИХАИЛ ФОКИН
2) 유리 그리고리비치(러시아)-Grigorivich,Yuri(1927-)
러시아의 안무가. 현재 볼쇼이 발레단 예술 감독
마린스키 극장의 솔리스트로 입단했고, 노보시비리스크에서 그의 첫 안무를 시작한다. 1957년 <돌꽃>을 발표하여 ‘새로운 천재의 등장\'이란 찬사를 받았으며, 그 이후 볼쇼이 발레단의 예술감독으로 활동을 하다가 2000년에는 국립발레단의 다양한 발레 공연의 안무 지도와 레파토리 지도를 하기도 했다.
러시아 레닌그라드 태생의 유리 그리가로비치는 상트 피체르부르크 발레학교를 졸업한 후 상트 피체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의 솔리스트로 입단했고 노보시리스크에서 그의 첫 안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1957년에 첫 작품 돌꽃을 발표하여 ‘새로운 천재의 등장’이란 찬사를 받는다. 1961년 그는 두번째 작품 사랑의 전설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다음해 키로프(현재 키로프-마린스키) 극장의 발레 마스터가 된다. 이후 그리가로비치의 발레는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함께 관객들의 갈채를 받으며 러시아 발레계의 새로운 경향을 주도하게 된다. 1964년 37세에 볼쇼이 발레단의 예술감독이 된 그는 서사적 스펙타클과 사회주의 사상과 사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호화로운 발레들이 일반적인 소련 무용계에서 그는 이 안에 모던 댄스의 조형적인 구도를 효과적으로 이식하는 작업을 볼쇼이에서 시작했다. 그가 키로프에서 안무한 돌꽃과 사랑의 전실, 그리고 스팔타커스는 볼쇼이의 가장 대표적인 현대물 레퍼토리로 그리가로비치의 주도 아래 볼쇼이 발레는 스타일가 방향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가로비치 작품의 공통된 테마는 (이것은 곧 볼쇼이 발레단의 공통적 테마가 된다) 인간이 자신의 이상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비극적인 삶과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적이고 높은 목적을 위해 개인적인 기쁨을 포기하고, 내적인 약함을 극복하고 용기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것은 돌꽃, 사랑의 전설, 스팔타커스에서 구현되고 있다. 이 대표적인 세 작품 이외에도 그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레이몬다, 지젤, 라 바야데어 와 같은 고전들을 재안무 했고 폭군 이반, 앵가라, 황금 시대를 게속 안무해 볼쇼이 발레단의 레퍼토리를 풍부하게 한다. 그는 1995년 정치적인 이유로 퇴임할 때까지 33년간이나 그 발레단의 예술 감독으로 있으면서 볼쇼이 발레단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줬다. 2000년부터 한국의 국립 발레단에서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스팔타커스 세 작품을 공연하면서 직접 한국에 와서 안무와 지도를 맡기도 했다. 최근 그의 뒤를 이은 블라디미르 바실리에프가 퇴진한 다음 볼쇼이의 예술감독으로 복귀해 다시 볼쇼이를 이끌고 있다.
3) 마리우스 프티파(러시아)-Petipa,Marius(1819-1903)
34년간 러시아 상트 페테르스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의 수석감독으로 있으면서 100여편의 발레 명작을 안무한 \"고전발레의 아버지\".
1869년부터 1903년까지 34년간 마린스키 극장의 수석예술감독으로 있으면서 54편의 신작발레, 17편의 개정안무, 35편의 오페라 발레를 제작했다. 마린스키 극장에서 수석예술감독으로 있는 동안 프티파는 차석 발레마스터였던 이바노프와 함께 파드뒤 형식을 최초로 만들었고, 솔리스트에서 군무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수학적 계산에 의해 발레 구도를 완성함으로써 ‘고전발레의 아버지\'로 평가받게 된다.
1898년 2월 14일의 마리우스 프티파
프랑스의 마르세유에서 태어났다. 청년시대는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엘슬러와 공연하는 등 오로지 무용수로서만 활약하였다. 그러한 그가 1847년 25세 때 러시아로 초빙된 것도 제1무용수로서였다. 그 무렵 페테르스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는 쥴 페로가 안무를 담당했으며, 프티파는 그에게서 안무를 배웠다. 그리하여 프티파가 마린스키 극장에서 최초의 안무를 한 것은 1858년에 상연된 《섭정전하(攝政殿下)의 결혼》이라는 2막물(二幕物)의 발레에서였다. 그 후 1900년까지 42년 동안에 약 54종의 신작(新作) 발레를 안무했을 뿐만 아니라 17곡의 옛 작품을 개작하고 또한 35종이나 되는 오페라의 발레를 안무했으니 참으로 놀라운 정력가라고 하겠다. 오늘날 여전히 세계 각국에서 상연되는 걸작인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등은 프티파가 완성한 고전 발레의 형식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작품들이다. 이리하여 프티파의 이름은 고전 발레의 완성자로서 크게 떨쳤다. 프티파는 또한 무용가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20세기에 들어와서 러시아로부터 다수의 명무용수를 배출하는 요인을 만들었다.
4) 바슬라브 니진스키(러시아)-Nijinsky,Vaslav(1890-1950)
1907년 상뜨 뻬쩨르부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