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서론
2.본론
- 일본의 전국시대
- 임진왜란 발발과 참전국간 강화회의에서 조선의 소외
- 뜨는해와 지는해
3.결론
2.본론
- 일본의 전국시대
- 임진왜란 발발과 참전국간 강화회의에서 조선의 소외
- 뜨는해와 지는해
3.결론
본문내용
식의 방향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조선의 주전론이 일본과의 강화협상 과정에서걸림돌이 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전쟁의 당사국이자 지속적인 전쟁을 감수하더라도 일본의 완전구축을 추구하는 조선은 전쟁을 종결하는 것이 목표였던 명일의 강화회담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예로서 역사에서 찾아본다면 식민주의 경영자들을 위한 회의라고 할 수 있는 한말 만국평화회의에 일제의 부정함을 세계에 알리고 평화를 제창하고자 하였던 고종의 특사들이 입장할 수 없었던 것을 들 수도 있겠다.
결국 강화는 결렬되고 일본은 재차 조선을 침략한다. 하지만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 조정은 군사 제도를 능률적으로 개편하고 의병 부대를 관군으로 편입시키는 등 방비를 강화해 나갔다. 또한 이순신함대에의 지속적 패배와 명나라의 원군도 즉각 출동하여 일본군은 주로 남해안에 고립되어 있다가 본국으로부터 환국의 명령을 받고 즉시에 한반도에서 빠져나가게 된다. 한편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진린 지휘하의 명 수군과 함께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11월 노량에서 일본전선 300여 척과 해전을 벌였다. 그 결과 조선과 명이 일본의 함선을 200여 척이나 격침시키는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순신은 전사하고 말았다. 이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일본과의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7년간의 국제전쟁이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을 간단히 살펴본다면 조선에 남긴 것은 피폐한 국토와 수없이 많은 사상자들, 그리고 상당수의 문화재가 소실된 것이었다. 이후 조선은 전후복구에 힘쓰게 된다. 병제의 재편과 무기의 개량에 착수하여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얻어서 절강무예를 본받아 병술을 개혁하고 훈련도감을 설치, 삼수병을 두어 무예를 조련시켰다. 무기로서는 원래의 무기인 궁시창검·총통·완구·화전 외에 비격진천뢰와 화차가 발명되었고 조총과 불랑기를 이용하였다. 또한 전시기구인 비변사의 기능이 대폭 확대되어 정치적인 기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 국민들의 사상 면에서도 많은 변화를 일으켜 애국심과 자아반성 등 여러 방면에서의 개선과 명나라에 대한 사대사상이 더욱 굳어졌으며, 일본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사후 도쿠가와가 집권하게 된다. 무모한 대륙진출이 실패로 돌아가고 조선과의 외교관계상 극단적인 관계로까지 치닫게 된 일본은 하지만 전쟁 전부터 동경하던 조선의 문화와 또한 중계무역을 담당하던 대마도로서는 조선과의 관계개선이 필요하였다. 포로 송환이나 지속적인 방한 등으로 관계개선을 요구하던 일본으로서는 잠시 후 나올 북방의 신세력을 경계해야 하는 조선이 항상 등 뒤의 적을 두지 못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조선 북방의 국경이 침범당하는 등 북방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어서 조선으로 하여금 언제까지나 일본을 나라의 원수로서 저주하고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으로서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도쿠가와의 요청으로 사신을 파견하는 등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에 돌입하게 된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대국인 명나라에도 치명타로 작용한다. 이미 명으로서는 전쟁이 시작하기도 전에 망국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명은 전란이 터지기 전 당쟁이 시작되었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전쟁이 끝나자 명의 국력은 급속히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위에서 신세력이라 밝힌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나타나 여진족의 3대 부족을 통일하고 중원을 노리고 있었다. 가끔 명나라의 멸망 고등학교시절 역사 선생님이 그리 말하였고 이와같은 답을 추구하는 문제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주원인이 어려운 상황에서 조선에 파병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 같다. 당시 중국의 통치자였던 만력제는 초반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정을 게을리하고 낭비를 일삼았다. 특히 결정적으로 조선 출병까지 포함된 만력3정으로 대표되는 과도한 원정으로 재정은 고갈되어갔으며 민란과 외부의 침입 등으로 인해 망하였다고는 하지만 이는 일본에 대한 피해상황을 줄여 표현하기 위한 사관의 문제라 생각한다. 실제로 임진왜란 직후 일본의 도요토미정권은 붕괴하였지만, 명나라는 그 후 약 50년가량 존속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50년이 태평성대도 아니고 전성기가 아닌 극심한 혼란기라고 해도 위의 단서 하나로 인해 논란의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뜨는 해와 지는 해
마지막으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병자호란을 선택함은 서론에서 언급한 바 있다.
당시의 국제적인 정세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만주에서 성장한 후금은 명의 중원을 장악하기 위하여 1618년 누루하치는 이 문서에는 명나라가 예허에 가담하여 만주를 공격한 것, 조부와 부친이 명나라에 죽은 것 등이 적혀 있다.
\"일곱가지 큰 원한\"이라는 격문을 발표하고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명나라와의 전쟁중에 누루하치는 사망하고 아들 홍타이지가 잇는다. 이들이 후의 청태조와 청태종이 된다.
이미 임진왜란 중 명나라는 누루하치의 후금에 대하여 경계를 하고 있었다. 이는 명의 조선파견 수군제독인 진린이 황제에게 올린 서신과 전후 선조에게 올린 서신으로 하여금 당시 영웅이었던 이순신을 좁은 땅에 두지 말고 넓은 요동으로 와서 야만족을 막게 하라는 것과 통제사가 죽었으니 누구와 함께 돌아가 천자를 알현하겠는가하는 말로서 임진왜란중에서도 항상 북방을 염두해 왔다고 본다.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나타나 여진족의 3대 부족을 통일하고 중원을 노리게 되었고, 결국 이자성이 반란을 일으켜 자금성이 함락되게 된다. 명의 장수 오삼계는 반란군을 토벌하러 50만군을 이끌고 자금성으로 가지만 자금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험한 요충지인 산해관으로 들어간다. 이 일은 청 태조인 누르하치에게 상당히 걱정을 끼친다. 중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해관을 거쳐야 하는데 극히 험한 곳에 50만이란 대군을 이끌고 있으니 통과하려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하고 통과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드는 곳이다. 그러나 일은 쉽게 풀린다. 이자성이 오삼계의 가족을 죽이면서 오삼계는 청에 투항하게 되고 청은 결국 산해관을 쉽게 통과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중원을 청에게 내어주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들은 조선의 주전론이 일본과의 강화협상 과정에서걸림돌이 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전쟁의 당사국이자 지속적인 전쟁을 감수하더라도 일본의 완전구축을 추구하는 조선은 전쟁을 종결하는 것이 목표였던 명일의 강화회담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예로서 역사에서 찾아본다면 식민주의 경영자들을 위한 회의라고 할 수 있는 한말 만국평화회의에 일제의 부정함을 세계에 알리고 평화를 제창하고자 하였던 고종의 특사들이 입장할 수 없었던 것을 들 수도 있겠다.
결국 강화는 결렬되고 일본은 재차 조선을 침략한다. 하지만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 조정은 군사 제도를 능률적으로 개편하고 의병 부대를 관군으로 편입시키는 등 방비를 강화해 나갔다. 또한 이순신함대에의 지속적 패배와 명나라의 원군도 즉각 출동하여 일본군은 주로 남해안에 고립되어 있다가 본국으로부터 환국의 명령을 받고 즉시에 한반도에서 빠져나가게 된다. 한편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진린 지휘하의 명 수군과 함께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11월 노량에서 일본전선 300여 척과 해전을 벌였다. 그 결과 조선과 명이 일본의 함선을 200여 척이나 격침시키는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순신은 전사하고 말았다. 이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일본과의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7년간의 국제전쟁이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을 간단히 살펴본다면 조선에 남긴 것은 피폐한 국토와 수없이 많은 사상자들, 그리고 상당수의 문화재가 소실된 것이었다. 이후 조선은 전후복구에 힘쓰게 된다. 병제의 재편과 무기의 개량에 착수하여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얻어서 절강무예를 본받아 병술을 개혁하고 훈련도감을 설치, 삼수병을 두어 무예를 조련시켰다. 무기로서는 원래의 무기인 궁시창검·총통·완구·화전 외에 비격진천뢰와 화차가 발명되었고 조총과 불랑기를 이용하였다. 또한 전시기구인 비변사의 기능이 대폭 확대되어 정치적인 기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 국민들의 사상 면에서도 많은 변화를 일으켜 애국심과 자아반성 등 여러 방면에서의 개선과 명나라에 대한 사대사상이 더욱 굳어졌으며, 일본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사후 도쿠가와가 집권하게 된다. 무모한 대륙진출이 실패로 돌아가고 조선과의 외교관계상 극단적인 관계로까지 치닫게 된 일본은 하지만 전쟁 전부터 동경하던 조선의 문화와 또한 중계무역을 담당하던 대마도로서는 조선과의 관계개선이 필요하였다. 포로 송환이나 지속적인 방한 등으로 관계개선을 요구하던 일본으로서는 잠시 후 나올 북방의 신세력을 경계해야 하는 조선이 항상 등 뒤의 적을 두지 못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조선 북방의 국경이 침범당하는 등 북방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어서 조선으로 하여금 언제까지나 일본을 나라의 원수로서 저주하고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으로서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도쿠가와의 요청으로 사신을 파견하는 등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에 돌입하게 된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대국인 명나라에도 치명타로 작용한다. 이미 명으로서는 전쟁이 시작하기도 전에 망국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명은 전란이 터지기 전 당쟁이 시작되었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전쟁이 끝나자 명의 국력은 급속히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위에서 신세력이라 밝힌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나타나 여진족의 3대 부족을 통일하고 중원을 노리고 있었다. 가끔 명나라의 멸망 고등학교시절 역사 선생님이 그리 말하였고 이와같은 답을 추구하는 문제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주원인이 어려운 상황에서 조선에 파병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 같다. 당시 중국의 통치자였던 만력제는 초반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정을 게을리하고 낭비를 일삼았다. 특히 결정적으로 조선 출병까지 포함된 만력3정으로 대표되는 과도한 원정으로 재정은 고갈되어갔으며 민란과 외부의 침입 등으로 인해 망하였다고는 하지만 이는 일본에 대한 피해상황을 줄여 표현하기 위한 사관의 문제라 생각한다. 실제로 임진왜란 직후 일본의 도요토미정권은 붕괴하였지만, 명나라는 그 후 약 50년가량 존속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50년이 태평성대도 아니고 전성기가 아닌 극심한 혼란기라고 해도 위의 단서 하나로 인해 논란의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뜨는 해와 지는 해
마지막으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병자호란을 선택함은 서론에서 언급한 바 있다.
당시의 국제적인 정세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만주에서 성장한 후금은 명의 중원을 장악하기 위하여 1618년 누루하치는 이 문서에는 명나라가 예허에 가담하여 만주를 공격한 것, 조부와 부친이 명나라에 죽은 것 등이 적혀 있다.
\"일곱가지 큰 원한\"이라는 격문을 발표하고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명나라와의 전쟁중에 누루하치는 사망하고 아들 홍타이지가 잇는다. 이들이 후의 청태조와 청태종이 된다.
이미 임진왜란 중 명나라는 누루하치의 후금에 대하여 경계를 하고 있었다. 이는 명의 조선파견 수군제독인 진린이 황제에게 올린 서신과 전후 선조에게 올린 서신으로 하여금 당시 영웅이었던 이순신을 좁은 땅에 두지 말고 넓은 요동으로 와서 야만족을 막게 하라는 것과 통제사가 죽었으니 누구와 함께 돌아가 천자를 알현하겠는가하는 말로서 임진왜란중에서도 항상 북방을 염두해 왔다고 본다.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나타나 여진족의 3대 부족을 통일하고 중원을 노리게 되었고, 결국 이자성이 반란을 일으켜 자금성이 함락되게 된다. 명의 장수 오삼계는 반란군을 토벌하러 50만군을 이끌고 자금성으로 가지만 자금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험한 요충지인 산해관으로 들어간다. 이 일은 청 태조인 누르하치에게 상당히 걱정을 끼친다. 중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해관을 거쳐야 하는데 극히 험한 곳에 50만이란 대군을 이끌고 있으니 통과하려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하고 통과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드는 곳이다. 그러나 일은 쉽게 풀린다. 이자성이 오삼계의 가족을 죽이면서 오삼계는 청에 투항하게 되고 청은 결국 산해관을 쉽게 통과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중원을 청에게 내어주게 되고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