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세 속 대만의 반한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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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제 정세 속 대만의 반한감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대만은? *P'1~3'

 ● 내용에 앞서 대만의 반한감정이라는 다소 생소한 주제를 선정한 이유
 ● 대만? 대만은 무슨 나라입니까?
 ● 대만은 후진국이다?

2. 대만의 반한 감정 표출 *P'4~5'

 ● 대만 언론의 거짓 보도

3. 국제 정세의 변화 속 한국과 대만 관계 *P'6~7'

 ● 1970년 데탕트 시대의 도래
 ● 대한민국의 선택

4. 미국, 일본의 선례가 있음에도 왜 유독 한국을 미워할까? *P'7~10'

 ● 단교과정
 ● 단교 과정의 문제점
 ● 대만의 한국 소유 재산
 ● 단교 통보 및 대사관 처리방식
 ● 한국 정부의 호칭 변경 문제

5. 맺음말 *P'10~11'

6. 참고 문헌 *P'11'

7. 소감 *P'11'

본문내용

정치적 이익이 중요해졌습니다. 즉,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며 , 그 속에서 대만은 국제사회 속에서 점점 고립되어 갈수 밖에 없었습니다.
4. 미국, 일본의 선례가 있음에도 왜 유독 한 국을 미워할까?
단교과정동
의안을 제일먼저성
1992년 7월 29일 - 한국, 중국 한-중수교협정 가서명
1992년 8월 18일 - 대만에 대한 단교조치1차통보(비공식)
1992년 8월 21일 - 대만에 대한 단교조치2차통보(공식)
1992년 8월 22일 - 한국, 한-중수교 협정공식발표
단교과정의 문제점
간접적 원인
대만의 한국 지원은 혈맹적 수준이였지만 국제적 정세에 의해 급격하게 돌아서버린 한국의 태도에 대만 정부 난색
대만의 지원?
1. 한국전쟁 파병 동의안을 제일 먼저 찬성
2. 장개석은 임시 정부 김구선생의 제일 후원자
3. 얄타회담 카이로선언 당시 일본의 지속적인 한반도 식민지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
4. 우리나라 건국의 큰 후원자역할 : 장개석은 대한민국건국훈장 1호
직접적 원인
너무 이른 중화민국의 호칭 ‘대만’ 변경
‘기정사실’화 되었던 중국수교 및 대만 단교 인정. 단 한국정부의 언행 불일치
당시 전 대통령 노태우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도 옛 친구도 소중히 하는 것이 동양의 도리\"
\"중국과의 수교 협상 진전 사항에 대해서는 대만측에 적절히통보할것\"
\"명동 대사관 처리 문제는 한국 정부가 간여할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허나 이 주장 모두가 중국과의 비밀회담을 만들고 대만의 재산권을 모두 중국으로 양도하려는 목적으로 드러남. 이는 대만 정부에 불신과 배신감을 줌. 따라서 반한감정은 대만 정부로부터 시작됨.
근거자료
[당시 외무부 김석우 국장 인터뷰 내용]
“수교 발표일을 월요일인 8월 24일로 잡은데는 이유가 있다. 대만 측에 한-중 수교사실을 통보한 시점은 금요일인 21일 이었다. 통보시점과 발표 시점 사이에 토요일과 일요일이 끼이도록 했다.”
이 밖에 전 노태우 대통령의 회고록에 역시 대만과의 단교과정에 문제점이 있었음을 시사.
(PPT자료)
대만측으로서는 명동 대사관을 처리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을 주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대만이 매각 또는 제3자에게로 명의 이전을 하려던 명동 대사관은 중국 측으로 반환 되었습니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단교 과정 상에서 대만 측에서는 옛 친구를 배려하지 않는 한국 정부에 대해서 서운한 감정이 일어남.
반한감정 = 단교 (X) 근거
당시의 주한국타이베이 대표부의 한 직원과의 인터뷰 발췌
“한국과 대만은 한때 형제의 나라라고 불릴정도로 친한 나라였습니다. 단교는 북한 문제도 있고 여러가지 이유에서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다 이해합니다. 문제는 대만과 단교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저는 당시 명동 대사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한국 정부가 하루 아침에 단교통보 하면서 3일 내로 대사관간판 내리고 한 달 내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최소한 우리가 마음의 준비나 실무적인 준비를 할 시간은 줘야지 갑자기 단교 통보해서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앉게 만든 것은 너무 심한 처사 아닌가요”
우리들의 배경지식대로 단순 단교만으로 인한 반한 감정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단교 통보 및 대사관 처리방식
당시 한국 내 대만의 소유재산 목록
1. 서울 명동의 2700평의 대사관
2. 2300여평의 학교 부지
3. 명동과 수표동의 약 900평의 상가부지 4필지
4. 연희동의 약 8000평의 학교부지 6필지
5. 부산 총영사관저
도합 28필지 1만 5000여 평이 넘는 재산
프랑스, 일본
경찰력 투입을 통한 강제 퇴거 조치 및 대사관 중국측에 반환
미국
친 대만계 기업에 10달러라는 상징적인 금액으로 매각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등 대만의 외교자산을 그대로 대만에 양도
§미국과 사우디는 대만에게 우방으로서의 의리를 지킴.
§하지만 한국정부는 프랑스, 일본과 같이 강제 퇴거조치까지 염두.
한국 정부의 호칭 변경 문제
대 대만 단교 이 전의 너무 이른 호칭 변경
: 대만의 반한 감정 폭팔
대만“반공전선의 형제이자, 공식 수교국을 무시하는 조치”
보복조치 : 대한민국 호칭, 남한으로 격하
차 후 한국 정부의 호칭 변경 촉구
공문의 수신인 ‘대문 외교부’지칭 : 대만의 중국 정통성 무시
현재 호칭
중화민국 : 대만
대한민국 : 남한, 조선반도
5. 맺음말
대만의 반한 감정을 풀 수 있는 해결책을 강구해야 함.
: 민간외교
가능성
비교정치학자들 “ 지구상에서 가장 비슷한 나라 한국과 대만”
1. 일본의 식민 지배
2.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념 대결로 분단
3. 급속한 경제성장
4. 권위주의 체제를 겪은 뒤 민주화 이행
조현숙 <중앙북스 여행작가>
“ 정(情)이 많은 대만사람들은 우리나라와 가장 흡사한 정서를 지니 고 있다.”
우리와 그들은 한류 등 동아시아 지역 공동체의 형성시 일본, 중국에 비해 유리한 입장을 가졌음에도 잘 이용하지 못한 점을 반성하여야 할듯 합니다.
단교가 당연한 선택이었더라도 일본의 예처럼 민간외교를 유지했더라면 지금의 반한, 혐한 감정까지는 오지 않았을까 생각 합니다. 지금과 같이 중국의 변방이라는 식의 무시보다는 그들과 우리의 비슷한 부분을 역설하며 다가가려 한다면 발전적인 민간외교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단교를 선택했던 여타 다른 우방인 일본, 미국, 사우디에는 악감정 이 없음에도 유독 반한감정이 심한 원인은 과거 우리나라의 미숙한 단교과정에 있다. 이를 인정하는 자세가 우선시 된다.
6. 참고 문헌
노창희 회고록 <어느 외교관의 이야기>
홍덕화 <두 개의 중국과 실리 외교>
노태우 전 대통령 <회고록>
조현숙 <중앙 북스 여행작가>
미국 프리덤 < 2009년 세계 자유보고서>
한국외대 실습기사 <인터넷 취재연습>
안 천 <타이완의 힘>
김재엽 <122년간의 동거>
7. 소감
이번 과제를 조사하면서 힘들었던 부분은 인터넷 정보가 주관적인 주장으로 치우쳐져 있는 것이 였습니다.
한국 중심의 무분별한 반론들 뿐이였습니다. 보통의 주장들이 ‘대의명분’을 위한 단교인데 이 것을 어찌 반한 감정으로 몰아갈 수 있느냐라는 것이였습니다. 이는 정확한 인지가 없는 수박 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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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0.22
  • 저작시기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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