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중국 시인 두보의 생애와 시
Ⅱ. 중국 시인 두보의 시풍
Ⅲ. 중국 시인 두보의 사상
Ⅳ. 중국 시인 두보의 집대성(集大成)이요 시사(時史)
참고문헌
Ⅱ. 중국 시인 두보의 시풍
Ⅲ. 중국 시인 두보의 사상
Ⅳ. 중국 시인 두보의 집대성(集大成)이요 시사(時史)
참고문헌
본문내용
다르다. 그의 작품 춘망(春望)만 해도 그렇다.
나라는 깨져도 산하(山河)는 남고
옛성에 봄이 오니 초목 우거져......
시세(時勢) 설워하여 꽃에도 눈눌 짓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 소리에도 놀래는 것.
봉화 석 달이나 끊이지 않아
만금(萬金)같이 어려워진 가족의 글월.
긁자니 또다시 짧아진 머리
이제는 비녀조차 못 꽂을레라.
반란군에 점령당한 장안에 납치돼 있을 때의 작품인데 여기에 넘쳐나는 것은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정서다. 현실의 참상은 정서 뒤에 깔려 있다. 물론 객관적 묘사에 기운 듯한 삼리, 삼별이나 북정 따위 작품이 없는 것도 아니라 해도 이런 경우에도 정서가 그 같은 현실 묘사 뒤에 깔려서 그것에 침통한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는 것이니까, 정서가 표출된 경우와 결과에 있어서는 매한가지다. 이런 점을 놓친다면, 그의 시에 접근하는 길은 영원히 막히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같이 특이한 감성의 소지자였기에, 그는 지극히 다양한 것을 시의 소재로 삼아 갖가지 기법을 동원하여 그것을 형상화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과거의 유교도 들은 두보의 시를 충군우국의 표본이나 되는 듯 보아 왔고 또 그런 점이 짙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황제에 대한 충성을 떠난 애국을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1200년 전의 시대적 제약에서 오는 결과라 해야겠고, 또 그런 종류의 시에서도 제왕의 실덕과 사치, 방탕 따위에 대한 규탄이 찬양하는 듯한 표현 속에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숨겨져 있는 일이 적지 않다. 허세를 부리는 고관과 무능한 장군에 대한 질책도 있다. 고통에 신음하는 서민의 참상이야 이를 것도 업지만, 때로는 한적함을 즐기는 풍류도 나타나는가 하면 귀뚜라미 같은 미물에 쏟는 애정도 나타난다. 심지어 생존의 부조리에 언급한 것도 있고, 불교, 도교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것까지 끼어 있다. 눈에 띄는 모든 것에 관심을 보인 것이 되려니와, 이를 시로 형성함에 있어서도 많은 것을 배운 것이니, 두보의 묘지명에서 백년 뒤의 시인 원진은 이렇게 말했다. “위로는 풍아(風雅)에 다가서며 아래로는 심송(沈宋)을 아우르고, 언어는 소리(蘇李)의 것을 빼으며, 기(氣)는 조류(曹劉)의 것을 삼키고, 안사의 고고를 뒤덮으며, 서유를 뒤섞어서 남김 없이 옛 사람의 체세를 얻은데다가, 지금 사람의 장점들을 겸했다.”
풍아란 국풍과 대아 소아를 지칭한 것이어서 시견이요, 그 아래 인명은 초당의 심전기, 송자문과 전환의 than 이릉
나라는 깨져도 산하(山河)는 남고
옛성에 봄이 오니 초목 우거져......
시세(時勢) 설워하여 꽃에도 눈눌 짓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 소리에도 놀래는 것.
봉화 석 달이나 끊이지 않아
만금(萬金)같이 어려워진 가족의 글월.
긁자니 또다시 짧아진 머리
이제는 비녀조차 못 꽂을레라.
반란군에 점령당한 장안에 납치돼 있을 때의 작품인데 여기에 넘쳐나는 것은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정서다. 현실의 참상은 정서 뒤에 깔려 있다. 물론 객관적 묘사에 기운 듯한 삼리, 삼별이나 북정 따위 작품이 없는 것도 아니라 해도 이런 경우에도 정서가 그 같은 현실 묘사 뒤에 깔려서 그것에 침통한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는 것이니까, 정서가 표출된 경우와 결과에 있어서는 매한가지다. 이런 점을 놓친다면, 그의 시에 접근하는 길은 영원히 막히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같이 특이한 감성의 소지자였기에, 그는 지극히 다양한 것을 시의 소재로 삼아 갖가지 기법을 동원하여 그것을 형상화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과거의 유교도 들은 두보의 시를 충군우국의 표본이나 되는 듯 보아 왔고 또 그런 점이 짙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황제에 대한 충성을 떠난 애국을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1200년 전의 시대적 제약에서 오는 결과라 해야겠고, 또 그런 종류의 시에서도 제왕의 실덕과 사치, 방탕 따위에 대한 규탄이 찬양하는 듯한 표현 속에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숨겨져 있는 일이 적지 않다. 허세를 부리는 고관과 무능한 장군에 대한 질책도 있다. 고통에 신음하는 서민의 참상이야 이를 것도 업지만, 때로는 한적함을 즐기는 풍류도 나타나는가 하면 귀뚜라미 같은 미물에 쏟는 애정도 나타난다. 심지어 생존의 부조리에 언급한 것도 있고, 불교, 도교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것까지 끼어 있다. 눈에 띄는 모든 것에 관심을 보인 것이 되려니와, 이를 시로 형성함에 있어서도 많은 것을 배운 것이니, 두보의 묘지명에서 백년 뒤의 시인 원진은 이렇게 말했다. “위로는 풍아(風雅)에 다가서며 아래로는 심송(沈宋)을 아우르고, 언어는 소리(蘇李)의 것을 빼으며, 기(氣)는 조류(曹劉)의 것을 삼키고, 안사의 고고를 뒤덮으며, 서유를 뒤섞어서 남김 없이 옛 사람의 체세를 얻은데다가, 지금 사람의 장점들을 겸했다.”
풍아란 국풍과 대아 소아를 지칭한 것이어서 시견이요, 그 아래 인명은 초당의 심전기, 송자문과 전환의 than 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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