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예배드릴 것이었다. 안식년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각 사람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모든 선한 것을 공평하게 나누어야 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영원한 휴식과 예배의 시간, 곧 안식일을 주셨다. 안식년이 에덴동산의 복사판인 것을 알게 되었으며 안식년은 그냥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해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40. 민수기의 히브리어 제목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말씀하셨다’ 혹은 ‘광야에서’라는 것이다. 영어 제목 ‘Numbers\'는 70인경과 벌게이트 역본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민수기라는 이름의 현재 형태가 70인경과 벌게이트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41. 나실인 서원은 평신도라 할지라도 일상의 생활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헌신의 상태에 들어갈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실인의 서원은 특정한 기간 동안 세 가지 사항을 금하는 것을 수반하는데 첫째로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는 것이고, 둘째로 머리를 자르지 않는 것이고, 셋째로 시체와 접촉하지 않는 것이다. 포도주나 독주를 금하는 것은 과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것과 관련한 오경의 보다 큰 그림의 한 부분이다. 나실인의 서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나실인의 서원을 통해서 하나님께 완전한 헌신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힘이 들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나실인 서원이 얼마나 중요하고 무게가 있는 것인지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42. 신 11장에서 하나님께서 불평한 자들에게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일만이 아니라 …… 그것들이 코 밖으로 나올 때까지 한 달 동안’ 고기를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시행되지 않고 불평한 자들은 ‘고기가 아직 이사이에 있는 동안’ 명망을 당하였다. 이러한 내용의 중심적인 목적은 중보자로서의 모세의 직책이 실패했음을 보이고자 했던 것이라고 저자는 밝힌다. 그것은 모세가 시내 산 율법 하에 형성된 것과는 현저하게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갈망했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에서 모세의 직책의 실패를 본다는 것은 의아한 생각을 가지게 해 준다.
43. 민 19장에서 암송아지의 ‘재’와 그것이 뿌려지는 ‘정결케하는 물’은 중요성을 지닌다. 이것은 창 3장의 타락 설화와 특별한 연결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먼지’와 ‘생명’ 이라는 용어가 타락 설화의 두 가지 핵심용어이다. 이렇게 두 개의 본문을 연결함으로, 암송아지의 재가 ‘먼지로 돌아가는 것’을 예증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저자는 밝힌다. 죽음이 주된 원수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임을 말한다. 본서를 통해서 창세기의 내용이 어떻게 진행되고 이어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고 성경에서 말하고자하는 구속사적 관점의 흐름에 대해서 확신하게 되었다.
44. 발람의 사건과 출애굽의 사건은 병행을 이루는데 바로의 이스라엘 자손이 많음으로 인한 박해이고 발락의 ‘너무 수가 많아졌다’로 인함이다. 이 이스라엘 자손의 많아짐으로 인해서 동기 유발되었다. 하지만 바로와 발락의 계획은 이스라엘에게 축복으로 바뀌었다. 이 외에도 병행의 패턴은 몇 가지가 있다. 이 구원행동들로부터 오경의 저자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미래의 왕의 통치를 바라보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병행으로 인한 이 사건은 미래도 동일하게 나타나게 될 것임을 보여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쓰신 의도가 미래에 오실 예수그리그도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의 사건들은 미래에 다시 나타날 수 있는 사건임을 깨닫게 된다.
45. 신 1장에서 ‘선악을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 전리품으로 사로잡혀 가지 않을까 하는 백성들의 염려를 처음으로 언급한다. 모세가 이렇게 이야기 하는 현 세대는 바로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들을 ‘선악을 알지 못하는’ 자들로 묘사함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과 에덴동산에서의 최초의 이야기 사이의 중요한 연결 관계를 도출한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에 창세기에서부터 신명기에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과의 관계가 에덴동산에서 나옴과 에덴동산과 같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감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경이 우연히 쓰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과 큰 주제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46. 신 6장에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사랑’으로 불려진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사랑은 일맥상통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굴종이 아니라 순종을, 걱정이 아니라 경배를 산출하는 두려움이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할 지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 같았다. 쉐마의 본문은 평소에도 마음에 깊이 간직하던 본문인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47. 신 8장에서 말하는 만나를 내리신 이야기는 에덴동산에서의 인간에게 대한 첫 번째 시험의 그림이 된다. 선악과나무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만나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시험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매번 시험의 도구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통해 ‘오늘날 본인에게 주어진 시험은 어떤 것일까?’하는 생각과 함께 시험을 잘 이겨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48. 신 10장의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의 길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모세의 마음에 품어져 있었던 그러한 마음의 변화가 ‘마음의 할례’로 서술된다. 이것을 통해서 진정한 할례는 마음의 할례임을 알게 되었고 로마서 2:29이 생각이 났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왜 그러한 이야기를 했는지 하나님께서는 오경에 이미 보여주고 계심을 깨닫았고 하나님께서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역사를 이끄심을 알게 되었다.
49. 신 11장에서 출애굽의 밤에 구원받은 ‘초태생의’ 아이들이 바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세대이다. 광야에서 애굽의 삶을 살던 이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죽고 그 밑에 애굽의 삶을 모르는 첫 세대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별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50. 신 33장에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그 땅에서
40. 민수기의 히브리어 제목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말씀하셨다’ 혹은 ‘광야에서’라는 것이다. 영어 제목 ‘Numbers\'는 70인경과 벌게이트 역본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민수기라는 이름의 현재 형태가 70인경과 벌게이트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41. 나실인 서원은 평신도라 할지라도 일상의 생활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헌신의 상태에 들어갈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실인의 서원은 특정한 기간 동안 세 가지 사항을 금하는 것을 수반하는데 첫째로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는 것이고, 둘째로 머리를 자르지 않는 것이고, 셋째로 시체와 접촉하지 않는 것이다. 포도주나 독주를 금하는 것은 과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것과 관련한 오경의 보다 큰 그림의 한 부분이다. 나실인의 서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나실인의 서원을 통해서 하나님께 완전한 헌신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힘이 들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나실인 서원이 얼마나 중요하고 무게가 있는 것인지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42. 신 11장에서 하나님께서 불평한 자들에게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일만이 아니라 …… 그것들이 코 밖으로 나올 때까지 한 달 동안’ 고기를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시행되지 않고 불평한 자들은 ‘고기가 아직 이사이에 있는 동안’ 명망을 당하였다. 이러한 내용의 중심적인 목적은 중보자로서의 모세의 직책이 실패했음을 보이고자 했던 것이라고 저자는 밝힌다. 그것은 모세가 시내 산 율법 하에 형성된 것과는 현저하게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갈망했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에서 모세의 직책의 실패를 본다는 것은 의아한 생각을 가지게 해 준다.
43. 민 19장에서 암송아지의 ‘재’와 그것이 뿌려지는 ‘정결케하는 물’은 중요성을 지닌다. 이것은 창 3장의 타락 설화와 특별한 연결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먼지’와 ‘생명’ 이라는 용어가 타락 설화의 두 가지 핵심용어이다. 이렇게 두 개의 본문을 연결함으로, 암송아지의 재가 ‘먼지로 돌아가는 것’을 예증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저자는 밝힌다. 죽음이 주된 원수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임을 말한다. 본서를 통해서 창세기의 내용이 어떻게 진행되고 이어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고 성경에서 말하고자하는 구속사적 관점의 흐름에 대해서 확신하게 되었다.
44. 발람의 사건과 출애굽의 사건은 병행을 이루는데 바로의 이스라엘 자손이 많음으로 인한 박해이고 발락의 ‘너무 수가 많아졌다’로 인함이다. 이 이스라엘 자손의 많아짐으로 인해서 동기 유발되었다. 하지만 바로와 발락의 계획은 이스라엘에게 축복으로 바뀌었다. 이 외에도 병행의 패턴은 몇 가지가 있다. 이 구원행동들로부터 오경의 저자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미래의 왕의 통치를 바라보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병행으로 인한 이 사건은 미래도 동일하게 나타나게 될 것임을 보여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쓰신 의도가 미래에 오실 예수그리그도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의 사건들은 미래에 다시 나타날 수 있는 사건임을 깨닫게 된다.
45. 신 1장에서 ‘선악을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 전리품으로 사로잡혀 가지 않을까 하는 백성들의 염려를 처음으로 언급한다. 모세가 이렇게 이야기 하는 현 세대는 바로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들을 ‘선악을 알지 못하는’ 자들로 묘사함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과 에덴동산에서의 최초의 이야기 사이의 중요한 연결 관계를 도출한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에 창세기에서부터 신명기에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과의 관계가 에덴동산에서 나옴과 에덴동산과 같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감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경이 우연히 쓰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과 큰 주제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46. 신 6장에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사랑’으로 불려진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사랑은 일맥상통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굴종이 아니라 순종을, 걱정이 아니라 경배를 산출하는 두려움이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할 지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 같았다. 쉐마의 본문은 평소에도 마음에 깊이 간직하던 본문인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47. 신 8장에서 말하는 만나를 내리신 이야기는 에덴동산에서의 인간에게 대한 첫 번째 시험의 그림이 된다. 선악과나무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만나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시험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매번 시험의 도구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통해 ‘오늘날 본인에게 주어진 시험은 어떤 것일까?’하는 생각과 함께 시험을 잘 이겨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48. 신 10장의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의 길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모세의 마음에 품어져 있었던 그러한 마음의 변화가 ‘마음의 할례’로 서술된다. 이것을 통해서 진정한 할례는 마음의 할례임을 알게 되었고 로마서 2:29이 생각이 났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왜 그러한 이야기를 했는지 하나님께서는 오경에 이미 보여주고 계심을 깨닫았고 하나님께서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역사를 이끄심을 알게 되었다.
49. 신 11장에서 출애굽의 밤에 구원받은 ‘초태생의’ 아이들이 바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세대이다. 광야에서 애굽의 삶을 살던 이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죽고 그 밑에 애굽의 삶을 모르는 첫 세대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별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50. 신 33장에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그 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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